샤바 분쟁(Shaba Conflict)
추방된 자이레 무장 경관들이 앙골라에서 자이레로 2차례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자이레인들은 前카탕카지역을 현재 샤바게로 부르고 있다. 추방경관들은 모부투(Mobutu)가 권력을 잡은 1964년 사바지역을 도망가 앙골라 국경을 넘어갔다. 그 시기 그들의 목표는 자이레로 부터 카탕카를 분리하려는 것이었다.
앙골라에서 그들은 포르투갈 지도자들이 자이레에 대항한 군사적 습격에 대한 조직과 계획에 대한 도움을 받았으며 대신 그들은 자유전사자들과 싸우는 포르투갈을 지지하였다. 이견상으로 그들은 살라자르 독재가 전복되긴 전까지 포르투갈을 지지하였으며 그후 그들은 MPLA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1977년 3월 7일 첫 번째 사바지역으로의 침입을 하였으나 그들의 목표가 풍부한 지하자원이 많은 사바지역을 분리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이레의 모부투 정권을 전복시키려 하는지가 명확치 않았다. 그 침입자들은 그들 스스로 콩고 민족해방(FNLC)이라 불렀다.
FNLC 지도자들은 그들이 카탕카인이라 든지 분리주의자들이라 든지 하는 명명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모부투정권을 전복시키는데 목적을 둔 반군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이레 병사들은 너무나 무능하여 모부투는 정부를 구하기 위해 비아프리카 외국 세력들을 요청하였다. 미국, 벨기에, 프랑스, 중국 그리고 남아공이 물자품, 식량 등을 보냈으며 프랑스는 모로코 병사들을 수송하기 위해 항공기를 사용하였다.
앙골라로 쫓겨난 FNLC는 재규합하여 1978년 5월 11일 다시 침입하였다. 비록 자이레 군대들이 1977년도와 마찬가지로 무력하였으나 FNLC군대 또한 몇일 후에는 붕괴되었다. 혼란속에 콜웨지(Kolwezi)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살해사건이 만연해지면서 많은 유럽인들이(대개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인질로 잡혔다. 모부투의 요청으로 4백명의 프랑스 외인부대가 투입되었다. 그들은 콜웨지를 장악하여 대부분의 유럽인들을 구조했으며 반군들을 앙골라와 잠비아로 몰아냈다. 프랑스 군대가 떠날 때 모로코, 코뜨디브아르, 세네갈, 토고인들의 군대들이 자이레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형성하였다.
사바분쟁은 비록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분리주의 단체들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기에 충분하였다. 사바침입의 중요성은 국제적 개입의 양성이었다는 것이다.
모부투는 앙골라의 MPLA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 쿠바군이 FNLC를 배후에서 재정적,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국도 쿠바군이 FNLC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여하튼, 그 분쟁에는 4개국의 아프리카 국가와 비 아프리카 국가들이 개입함으로서 OAU의 허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났다. 더구나 모부투는 외국세력에 의해 존재하고 있으며 유능한 군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침입에 대한 아프리카의 취약점이 사바분쟁에 의해 다시 비추어졌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해 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부패한 모부투정권에 대해서 존경은 하지 않았지만 분리주의 운동에 대한 어떠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
추방된 자이레 무장 경관들이 앙골라에서 자이레로 2차례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자이레인들은 前카탕카지역을 현재 샤바게로 부르고 있다. 추방경관들은 모부투(Mobutu)가 권력을 잡은 1964년 사바지역을 도망가 앙골라 국경을 넘어갔다. 그 시기 그들의 목표는 자이레로 부터 카탕카를 분리하려는 것이었다.
앙골라에서 그들은 포르투갈 지도자들이 자이레에 대항한 군사적 습격에 대한 조직과 계획에 대한 도움을 받았으며 대신 그들은 자유전사자들과 싸우는 포르투갈을 지지하였다. 이견상으로 그들은 살라자르 독재가 전복되긴 전까지 포르투갈을 지지하였으며 그후 그들은 MPLA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1977년 3월 7일 첫 번째 사바지역으로의 침입을 하였으나 그들의 목표가 풍부한 지하자원이 많은 사바지역을 분리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이레의 모부투 정권을 전복시키려 하는지가 명확치 않았다. 그 침입자들은 그들 스스로 콩고 민족해방(FNLC)이라 불렀다.
FNLC 지도자들은 그들이 카탕카인이라 든지 분리주의자들이라 든지 하는 명명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모부투정권을 전복시키는데 목적을 둔 반군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이레 병사들은 너무나 무능하여 모부투는 정부를 구하기 위해 비아프리카 외국 세력들을 요청하였다. 미국, 벨기에, 프랑스, 중국 그리고 남아공이 물자품, 식량 등을 보냈으며 프랑스는 모로코 병사들을 수송하기 위해 항공기를 사용하였다.
앙골라로 쫓겨난 FNLC는 재규합하여 1978년 5월 11일 다시 침입하였다. 비록 자이레 군대들이 1977년도와 마찬가지로 무력하였으나 FNLC군대 또한 몇일 후에는 붕괴되었다. 혼란속에 콜웨지(Kolwezi)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살해사건이 만연해지면서 많은 유럽인들이(대개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인질로 잡혔다. 모부투의 요청으로 4백명의 프랑스 외인부대가 투입되었다. 그들은 콜웨지를 장악하여 대부분의 유럽인들을 구조했으며 반군들을 앙골라와 잠비아로 몰아냈다. 프랑스 군대가 떠날 때 모로코, 코뜨디브아르, 세네갈, 토고인들의 군대들이 자이레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형성하였다.
사바분쟁은 비록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분리주의 단체들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기에 충분하였다. 사바침입의 중요성은 국제적 개입의 양성이었다는 것이다.
모부투는 앙골라의 MPLA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 쿠바군이 FNLC를 배후에서 재정적,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국도 쿠바군이 FNLC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여하튼, 그 분쟁에는 4개국의 아프리카 국가와 비 아프리카 국가들이 개입함으로서 OAU의 허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났다. 더구나 모부투는 외국세력에 의해 존재하고 있으며 유능한 군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침입에 대한 아프리카의 취약점이 사바분쟁에 의해 다시 비추어졌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해 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부패한 모부투정권에 대해서 존경은 하지 않았지만 분리주의 운동에 대한 어떠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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