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재미있는 Africa 이야기 I

[ 아프리카인의 철학과 사고체계 ] - 근대와 종교

africa club 2003. 9. 25. 19:53
2. 아프리카의 근대와 종교

2.1 단절의 경험과 아프리카의 근대

아프리카 종교 서술에서 특징적인 두 가지 축이 있다. 그 하나는 종교사의 서술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전통종교와 전래종교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구분은 시기적 선후의 문제로서가 아니면 신관을 비롯한 종교내적 성격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다른 하나는 사회와 종교의 관계를 다룰 때, 특히 식민지배 이후 아프리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 흔히 보인다. 여기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종교적 움직임을 피억압자의 종교라고 규정지으면서 식민지 침탈에 대한 저항의 양식으로 접근해 왔다.

전자의 구분에서 생기는 문제는 종교현상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 곧 고등종교와 저급한 신앙이라고 하는 판단을 함축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과 공시적인 현상에 대한 서술을 통시적인 배열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손상시키는 데 있다. 후자의 구분의 경우 종교현상을 미리 규정해 놓은 사회적 요인으로 환원시켜버려 상호관계의 양상을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종교현상은 전통종교와 전래종교의 서술에서 보이는 시기적 선후의 문제도 아니고 사회와 종교의 서술에서 나타나는 위계적 상하의 문제도 아니다. 이들 종교현상은 역사적 계기들이 마련하는 하나의 장 안에서의 변화의 흐름이며 이 흐름의 역동성의 문제이다.

서구 문화의 본격적 유입 이래로 아프리카는 전례 없이 격심한 문화적 변동을 겪었다. 서구사회에 있어 근대가 근대 이전의 사회에 대해 불연속성을 지닌다고 말해질 수 있다면 아프리카의 경우는 보다 더하게 단절을 경험했다. 이 변화는 선택가능한 것으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불가피한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보다 더한 단절로 있게 된다. 아프리카 문화를 서술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절이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조건을 형성한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는 점이다.

아프리카가 경험하고 있는 이 단절의 중요성은 곧바로 단절의 경험을 서술할 필요로 이어진다. 경험이란 삶의 조건지워진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면서 그에 대한 주체의 수용이다. 따라서 경험의 서술은 주체를 상실함이 없이, 곧 아프리카에 대해 서술하면서도 아프리카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서술과는 달리, 그 내용을 담아낼 수가 있다. 또한 경험은 직접성과 구체성을 지님으로써 개념적 적합성이라고 하는, 타문화의 서술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우회로를 제공한다. 경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것은 아프리카의 근대의 경험, 경험으로서의 근대의 특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2.2 경험의 특성

유럽의 팽창사 속에 편입되면서 아프리카에 밀어닥친 변화의 물결은 아프리카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환경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과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했다. 이 상실은 단순히 변화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성격이 그 변화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아프리카인의 삶의 경험을 특징 지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변화가 갖는 성격과 그 변화를 겪는 이들의 경험의 내용을 동시에 밝힘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아프리카에 전래해 온 고유한 (그리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새롭게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 갖는 이질성이다. 상이한 양식과의 만남과 그러한 양식으로의 변화는 아프리카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닥친 상황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 파악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상황에서 더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한 것은 서로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였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아들의 친구를 살해했는데 그것은 그 친구가 성년식 동기가 의무적으로 갖는 형제의 역할을 하지 않은 데 대한 응분의 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식민법정은 사형을 구형하고 집행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가족간 분쟁을 악화시켰고 법정에 대한 불신을 형성하게 했다. 아프리카인에게 혼란을 부른 다른 요소는 그 변화가 아무런 준비없이 급작스럽게 밀어닥쳤다고 하는 점과 여러 형태의 식민주의가 혼재함으로써 그 성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는 점도 있었다.

둘째, 새롭게 자리하는 사회구조에서 대개의 아프리카인들은 주변적인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식민시기 동안에 이뤄진 억압과 착취의 구조는 인종적 편견과 결합하여 심각한 양상을 낳았다. 식민지 구조가 발생시킨 토착적인 것에 대한 또는 그것과의 혼혈에 대한 거부의 논리는 독립 이후의 아프리카에서도 변형된 채로 지속되었다. 기본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가진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분리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의 배제라고 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 배제의 공간적 실체를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소웨토(흑인불법거류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질서 속에 던져졌으면서도 그 질서의 통제 메카니즘으로부터는 철저히 소외됨으로써 아프리카인들은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아프리카인의 경험의 조건을 이루면서 동시에 그 경험의 특성을 형성하는 세 번째 요소는 이 변화가 아프리카인들의 동의나 승인 없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제에는 필수적인 요소로 폭력이 수반되었다. 식민 초기 당국에 의해 이뤄진 빈번한 초토화 정책은 몇몇 부족을 멸족의 위기에 빠뜨렸고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경영은 아프리카인들을 값싼 자원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이 변화를 견디게 힘들게 한 것은 변화가 삶을 꿰뚫고 있음에도 그것을 피해 볼 도리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곧 파악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음에도 불가피하게 직면해야하는 사황들과의 조우는 아프리카인들에게 혼란과 절망과 압박을 느끼게 했다. 결국 이것은 서구문화와의 만남이라는 역사적 계기가 가져 온 특별한 형태의 '고통'의 경험으로 귀결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모잠비크 쵸피(Chopi)족에서 채록된 노동요의 한 구절이다.


괴로워, 정말, 오위-이야-에-에-
괴로워 정말 / 괴로움에 내 심장은 피를 흘리네
무슨 일이 있었지? / 괴로움에 내 심장은 피를 흘리네
(그 다음은 아내의 농장노동과 가난, 남편의 강제노역과 감옥살이가 노래된다.


변화가 결과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가족)공동체의 해체이다. 공동체의 해체는 도시로의 이주노동으로 인한 생활 공간의 분리와 변화의 급격함이 부른 세대 간 단절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시켜 온 가치체계의 와해를 동시에 포함했다. 공동체적 삶의 파괴가 수반한 것은 '영혼의 상실'로 표현된 정체감의 위기이다.


"나는 나의 영혼을 잃어버렸다. ... 나는 어딘가에 내팽겨쳐졌다. 나는 공허하다."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아프리카인이 경험한 변화의 특성에서 볼 때 이러한 위기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변화한 것이 쉽사리 수용되지 않는 마당에 기존의 토대가 허물어지자 아프리카인들은 '존재론적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근심은 정치체제의 변화, 지배이데올로기의 변화, 생활수준의 저하 등을 통해서보다는 가장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오랜 기간 친숙해져 온 생활 습관에서 갑작스럽게 주어진 작은 것들의 균열을 통해 그들은 맞서 싸우려는 염을 내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크기의 두려움을 맛보게 된다.


2.3 경험조건의 변화

아프리카에 새롭게 도입된 것들에 가장 중요하게 자리한 원리 중의 하나는 개별화또는 개인주의의 강화였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혼돈을 문명으로 질서 지운다'고 하는 이념 속에 새겨진 원리이기도 했다. 유럽인이 가져 온 것들은 대가가 개인의 생성과 관련이 있었다. 공동체라는 집단성으로부터 개인을 구분해 내고 그리고 그 개인을 변화시켜 내는 일은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행한 교육과 전도활동 속에 새겨진 변함없는 문법이었다.


2.3.1 공간

공간구성과 그 인식의 변화는 표면적으로는 먹고 자는 공간의 위치 변화이지만 그 저변에 있어서는 생활을 둘러싼 주변 모든 것들과의 관계의 변화이며 좁게는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의 변화이지만 넓게는 문화전승체제의 변화를 뜻한다.

전통적인 공간개념은 크게는 마을(settlement)과 덤불(the wild)로 구분된다. 이들의 공간구성체계는 몇 가지의 구분원리를 갖는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 남자와 여자, 왼편과 오른편의 구분으로 이들 원리는 서로 연합되어 있다. 남부 반투인의 경우, 그들의 주거공간은 주변부의 생활공간과 중심의 사회적 공간으로 구분된다. ∩ 형태의 부락 한 가운데 소 우리가 있고 농가의 중심에 가장의 오두막이 놓여진다.

이 두 곳, 소 우리와 가장의 오두막은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면서 종교제의가 치러지는 곳이기도 하다. 오두막은 대개 원형으로 지어지는데, 오두막에서 중심을 형성하는 곳은 화덕이다. 이 화덕의 바로 뒷 공간에 정령이 머문다. 이 공간은 또한 신생아의 목욕장소이기도 하고 귀중품의 보관소이기도 하다.
공간구성의 변화에서 일어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공간의 중심을 나타내는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가옥구조에서 화덕이 치워지고 중심을 떠받치는 기둥이 사라지는 등의 변화의 기조는 기능중심의 분화였다. 요리하는 공간과 잠자는 공간의 분리,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분리, 세속적 공간과 종교적 공간의 분리 등은 사각형의 가옥 모양과 함께 공간인식에 있어 새로운 공간에 필요한 물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원형에서 선적인 것으로의 공간구도의 변화는 철도의 건설과 식민정부에 의해 추진된 산업화로 인해 덤불에 둘러싸여 공간인식의 중심을 이루던 마을을 확장된 공간 속에 던져 놓았다. 무엇보다 도시의 발달은 변화하는 마을과 함께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이원적 공간감각을 창출했다. 그들에게 도시는 백인의 나라, 악의 소굴, 통제 불가한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그 대체물로 '고향'이 형성되었다. 특별히, 도시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고향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떠나온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곳, 이전 공동체적 삶의 은유적 공간이기도 했다.


2.3.2 교환체계

공간구성체계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교환체계 역시 경제학적인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축을 매개로 한 전통교환체계에는 교환의 원리 속에 구현되는 사회적 차원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존재론적인 차원이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사회에서 가축 특히 소는 교환의 중요한 매개였다. 가축이 갖는 경제적인 가치는 작은 것이 아니지만 교환의 매개로서 가축이 갖는 상징성은 실용성을 넘어, 개인을 사회에, 조상을 후손에, 자연을 인간에 묶는 고리였다.

가축만이 안정된 형식으로 가치를 응집시켜 저장하고 불려나갈 수 있게 하며 가축만이 개인의 정체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축은 지위와 풍요와 지속에 대한 신뢰로서 역할 했다.

가축의 자리를 화폐가 대신하면서 이러한 교환체계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생활공간의 변화가 창출한 상품의 수요와 식민정부에 의한 과세에의 압력은 화폐 경제와 상품노동의 틀 속에 아프리카인들을 집어넣었다. 또한 쟁기의 사용은 가축과 함께 남자를 농경에 끌어들이는 한편 여자들의 활동공간을 제한시킴으로써 새로운 노동분업의 조건을 형성하였다. 쟁기의 사용으로 초과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빈부의 차가 생겨났다. 이로써 경제적 계급의 형성조건이 마련되었고 가축을 화폐로 바꾸어버린 빈농은 도시의 임금노동시장에 흡수되었다.

임금노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일이 갖는 전통적인 의미와 대조되었다. 전통의 일은 추상적 특성을 갖는 것이나 교환 가능한 것이 아니며 노동력이라는 양도 가능한 상품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일은 인간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창조적 과정이며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자아와 타자를 만들면서 표현된다. 그러나 노동(mmetreko : work for money)은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으로 측정되며 시간으로 계산되고 돈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노동력은 양도가능한 인간의 부분이며 노동관에서는 근면하고 양순하고 감내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사장경제 하에서는 일을 한 결과 자아는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피폐해진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돈은 다리 없는 가축'이라 부르고 "돈이 가축을 잡아먹었다"고 말한다.


2.3.3 의미체계

문자의 도입은 계층적 차별과 이에 따른 하층의 소외를 유발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토착인들은 말을 대상화하지 않고 지시체의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언어를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존재의 통합적 특성이 발화의 힘 속에 체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말은 단지 학습된 형식의 효과적인 정교화가 아니라 개인이 가진 발성되는 힘이었다. 그리하여 발화는 개인의 지위에 따라 상대적 무게를 가진다. 말의 힘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되어 저주, 주문, 기도와 같은 '위대한 말들'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사회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제한되어 있는 여자들은 공적인 논쟁, 시의 음송, 제의적 주문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이들의 문화에서 말하고 명명하는 것은 경험을 창조하는 것,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체계는 구체에서 추상의, 사물에서 말의 명쾌한 분리에 실증적 지식이 있다고 보았던 19세기 유럽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인들의 생각은 물활론적인 것으로 보였고 그리하여 선교사들을 필두로 토착어를 개념적이고 문법적으로 조직화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들의 언어학적 성과를 통하여 새로운 정통 토착언어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문명의 산물로 교회와 학교를 통해 가르쳐졌다. 여기에서 토착인의 의미체계는 말의 변형과 글의 도입이라는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말의 변형에서 일어난 변형과 굴절은 글의 도입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어휘와 문법의 전제는 화폐에서 결정적으로 보이는 교환의 법칙과 동일한 것으로, 말하는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분리와 불평등을 야기했다. 문자문화가 발생시킨 '문맹'은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