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재미있는 Africa 이야기 I

[ 아프리카인의 철학과 사고체계 ] - 철학과 사고

africa club 2003. 9. 25. 19:49
1. 아프리카인의 철학과 사고

1.1 악(惡)의 기원과 본성

악의 기원에 관해서는 몇 가지 견해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는 범주론적인 입장에서, 신은 이른바 악한 것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신이 자기들에게 어떤 악을 행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 일라(Ila)족 : 신은 언제나 올바르기 때문에 "그는 무례한 대접을 받을 수도 없고, 비난을 받을 수도 없으며, 그에게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다. ..... 그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선을 행한다."라고 주장한다.

☞ 아샨티(Ashanti)족 : 한 사제는 "신은 이 세상에 있는 악의 가능성을 창조하였다. .... 신은 모든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아프리카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신화속에서 신이 최초의 인간을 창조했을 때 신과 인간과의 관계는 조화와 가족적인 친밀감을 이루고 있었고, 그래서 최초의 인간들은 다만 선한 것만은 향유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몇몇 사회에서는 악을 신이 아닌 다른 영적인 존재로부터, 혹은 그러한 존재와의 결합으로부터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악의 개념을 이루고 있는 부분적인 모습은 악 자체를 인격화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구수(Vugusu)족은 악신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악신을 본래 신이 선하게 창조하였지만 후에 신에게 반역을 하고 악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악신은 악령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모든 악은 이 악령의 무리들로부터 온다고 본다. 그래서 이 세상의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간에는 일종의 결투 상태가 존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 전염병, 메뚜기떼의 침해, 기타 재난들을 그것 자체로 신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신에 의하여 야기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거의 모든 아프리카 사회는 영혼을 악의 근원이거나 아니면 악의 대행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자(living-dead)인 영을 충동해서 "악"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역시 사람들이다.

신비스러운 힘은 그것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개인에 의하여 그것이 악하게 사용되면 그것은 악으로 경험된다. 이러한 견해는 악을 독립된, 그리고 외적인 객체이게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이나 영적인 대행자에 의하여 채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공동체나 사회의 도덕적인 규범과 윤리를 정립하기 위한 많은 법과 관습, 행동의 규범, 규칙, 준수해야 할 사항, 금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 중의 어떤 것을 사람들은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신이나 민족 지도자에 의해서 창안되어 제도화된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본래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선조가 있는 쟈마니(zamani)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공동체의 관습이나 규례는 신성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행동의 규범을 깨뜨리는 것은 어떠한 것이거나간에 악한 것, 잘못된 것, 못된 짓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이미 받아들여진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손상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동은 살아 있는 자와 이미 죽은 자들 양자의 협동적인 공동체에 의하여 징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신도 또한 이를 책벌하고 정의를 실현하다.

인간 관계에서는 연령과 신분상의 위치에 따라 위계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위계 개념은 신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사다리를 이루듯 형성되어 있다.

신은 창조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어버이이며,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호소와 청탁의 마지막 극점이 되고 있다. 그 신 밑에 여러 신적인 존재와 영이 있다. 이들은 인간보다 더 강한 자들이며, 여러 사회의 창시자나 선조이기도 하다.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사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년식, 결혼, 자녀의 양육 등을 통하여 완성된 완전한 인간이다. 인간들의 계층은 위로부터 왕, 통치자, 우사, 사제, 점술사, 주의, 각 가정의 가장, 연로한 어른, 부모, 손위형과 누나, 그리고 끝으로 공동체의 가장 어린 구성원으로 위계가 이루어진다.  

어떤 사회는 개인은 물론 민족 전체가, 혹은 그 민족이 왕이나 추장을 통하여 신에게 범죄를 할 수 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바룬디(Barundi)족은 신이 간음죄를 범한 사람에게 크게 진노한다고 믿고 있고, 바츠와(Bachwa)족은 신이 도둑질을 한 사람, 연로한 부모를 공양치 않는 사람, 살인자. 간음한 자 등을 벌하다고 믿고 있으며, 바벤다(Bavenda)족은 만약 추장이 신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신은 종족에게 메뚜기의 패해, 홍수, 재앙 등으로 징벌한다고들 말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신을 법률과 질서,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의 마지막 수호자로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질서의 파괴는 개인에 의하여 범해졌든 집단에 의하여 범해졌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사회협동체에 의한 범죄로 인정한다.    


☞ 기쿠유(Gikuyu)족 : 비가오게 해달라고 지내는 희생제의나 기도를 하기 전에 점술사나 예언자를 찾아가, 어째서 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가뭄이 들게 했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때 바치는 희생제물은 - 동물로서 한가지 색을 가진 동물이어야만 한다. - 반드시 살인, 절도, 강간 등의 범죄를 하지 않았고, 독물(마법에 의한)이나 독물을 행사한 일과는 무관한 정직하고 신용 있는 사람의 소유물로부터 선택되어진다.


위의 경우로부터 살인, 절도 등이 신에 대한 범죄인 것을 알 수 있으며 한사람의 범죄는 가축이나 재산을 포함한 그의 전체 집안과 모두 관련된다.


☞ 뉘르(Nuer)족 : 사람이 자기의 가축이나 자녀가 많다고 해서 자랑을 하면 그것도 신에 대한 범죄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자랑은 신으로 하여금 가축이나 자녀를 빼앗아가게 한다. 따라서 누에르 족의 경우 "신에 대한 가장 못된 범죄는 아기를 칭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이야기할 때 "이 나쁜 것"이라고 호칭한다.


아기를 찬양하면 그 아기는 죽을 수도 있다. 범죄자는 그 아기가 아니라 신 앞에서 그 아기를 자랑한 사람이다.

우연적으로나 고의적으로나 간에 어떤 규정을 어기면, 그 범죄로 인하여 범법자는 물론 그 범죄에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운이 닥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악이란 행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 행위를 징벌하는 사실 안에 있다.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도 신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정황에 몰아넣고 만다. 이처럼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행위도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악한 까닭은 그것이 징벌을 받기 때문이다. 악하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신에게는 범죄를 할 수도 없다고 느끼는 사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앙코레(Ankore)족은 신을 최종적인 질서의 원리라고 인정은 하지만 인간 개개인은 신에 대하여 범죄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하여는 죄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 아잔데(Azande)족, 아칸(Akan)족, 스와지(Swazi)족, 바냐르완다(Banyarwanda)족 등은 이를 달리 표현하여 신은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공동체가 친족 관계와 다른 사회적 구조가 뒤엉킨 협동적 특성을 지나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도덕적인 악이든 자연적인 악이든 간에 개인이 당하는 악의 형태는 거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구성원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범하는 도덕적인 범죄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 전체에 대한 범죄이다. 이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계 질서의 원리를 참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체로 낮은 계층, 낮은 신분,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보다 높은 계층이나 연령의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른다. 또 동일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높은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은 낮은 신분의 사람에 대하여 범죄를 구성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 악이라든가 범죄라고 생각되는 것은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에로 기능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만약 어떤 마법사가 작은 어린이에게 마법을 걸면 이 행위는 그녀를 어린이보다 낮은 위치에 두게 한다.

이것은 관계 상황 속에서 무엇이 악을 구성하는가 하는 데 대한 철학적 이해이다. 어떤 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내재적 본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어떤 신분의 수준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느냐 하는 데 따라서 악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불운이나 재난이 신으로부터 도래한 것이라고 느껴지면, 사람들은 이를 신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징벌이라고 해석한다.

범법 행위가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영역은 제의행위에서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아프리카 사회는 의식이나 의례의 집전에 대한 규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 규정을 어기면 때로는 제의적인 정화의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2 배상과 처벌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신이 그를 처벌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은 인류의 도덕적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률을 귀하게 유지하고 떠받든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행한 잘못을 내세에서 징벌 받는다고 하는 신앙은 거의 없다. 처벌이 내린다면 그 처벌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운은 그 불운을 당한 사람이 신이나 영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의 장로나 다른 구성원에게 어떤 도덕적인 혹은 제의 적인 행위 규정을 범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 바냐르완다(Banyarwanda)족과 바룬디(Barundi)족은 신이 징벌하는 행위를 "신은 침묵 속에서 복수를 행한다"라고 하는 잠언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 뉘르(Nuer)족 : 질병을 환자가 그 질병을 앓기 전에 범한 과오와 연결시키고 신의 처벌이 그 환자에게 내리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친다. 결국 이들은 질병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행위에 강조를 두고, 그러한 행위를 하면 어떠한 질병이 예상될 수 있다고 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질병 자체에 강조를 두어 그 질병을 야기하게 한 과오를 과거의 행위 속에서 되찾는 행위이다.


각개 공동체의 사회는 도덕적인 혹은 법률적인 범법 행위에 대한 제나름대로의 배상과 처벌 형식을 가지고 있다. 사술이나 마법을 행사하다든가, 살인이나 간음을 범했다든가 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연하게 동료를 다치게 했다든지, 이웃 사람의 밭에 자기네 양이 들어가 감자넝쿨을 먹어 버렸다든지 하면 소나 양이나 혹은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하는데 이르기까지 보상과 처벌의 정도는 극히 다양하다. 관습이나 제의의 규범을 손상하거나 깨뜨리는 여러 형태의 위반을 통하여 야기되는 논쟁이나 위약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연장자들이 취급한다. 물론 전통적인 추장이나 통치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그 지방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그 법을 집행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부의 재판소가 있어 이를 맡고 있다. 그 중에 어떤 재판소들은 장로들의 협조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관습법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재판을 할 때 저주를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유죄라고 하는 것이 판명되면 그를 저주함으로써 그 저주의 말에 의하여 악이 그에게 떨어질 거라고 하는 신념이다. 주로 가족내에서 이루어지며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효과적으로 낮은 위계의 사람들을 저주할 수 있지, 그 역은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가장 두려워하는 저주는 부모나 아저씨, 아주머니 혹은 가까운 친척들이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또 가장 고약한 저주는 임종시에 하는 저주이다. 일단 그 저주자가 죽으면 이를 취소할 방도가 실제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범한 사람이 참회를 하고 저주를 거두어주기를 원하면, 그 저주를 한 사람은 그 저주를 스스로 취소할 수도 있고, 또 그 저주가 심각한 것이었으면 제의를 통하여 취소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부어진 저주가 이루어졌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만약 그 저주를 받은 사람이 죄가 없으면 저주는 기능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사회는 공식적인 저주를 매우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마치 마법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특별히 가족권 안에 있는 좋지 않은 관계를 저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좋은 인간 관계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공식적인 서약이 이용되고 있다. 신비스럽게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서약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확한 서술은 아니지만, "피로써 맺어진 형제(blood brother and sister)"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피를 조금 바꾸어 마시거나, 그 피를 상대방의 몸에 바르는 의례를 통하여 서약을 하는 것이다. 이 의례를 지내고 나면 그들은 정말 "혈연"의 형제나 자매와 같이 살아간다. 그들 양편의 가족들도 모두 이 "형제가 되는"서약에 참여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들의 자녀는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이 서약은 서약 당사자들에게 커다란 도덕적인, 그리고 신비스러운 의무감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이 계약을 깨뜨리면 불행이 닥치리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이른바 "비의사회"에 가입할 때, 즉 통과의례를 거쳐 성년이 되는 집단 혹은 점술사와 같은 어떤 직업 사회에 들어갈 때 행하는 서약들도 있고, 비밀한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어떤 지식이나 비밀을 지키려고 할 때 행하는 서약도 있다. 부모가 임종 전에 자녀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특별한 지시나 요청을 지키고 준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서약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서약은 그 진지성에 있어서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어떤 서약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이런 저런 형태의 고통이나 불행을 야기할 수도 있다. 서약의 배후에 있는 신앙은 신이나 혹은 개인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힘이, 서약이나 계약의 요청을 깨뜨리는 사람을 벌할 것이라고 하는 신념이다. 저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서약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많은 서약들은 비용을 많이 들이면서 제의적으로 행해진다.

요루바족의 도덕적인 가치는 신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신을 "순수한 왕", "완전한 왕", 흰 옷을 입고 위에서 사는 분", "본질적으로 흰 대상, 양태가 없는(완전히 흰) 흰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요루바족의 원리의 본질은 품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바로 이 품성에 달려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드러운 품성은 생명의 줄을 사람의 손에서 끓어지지 않게 한다"라든가,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은 좋은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훌륭한 품성이란 결혼 전의 순결, 결혼 기간 동안의 신실성, 정중한 예절, 이기심과 반대되는 너그러움, 친절, 정의로움, 진실, 본질적인 덕으로서의 방정함, 도둑질하지 않는 일, 약속을 지키고 어리석음을 피하는 일,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특별히 여자를 보호하는 일, 노인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일, 위선적이지 않는 것 등이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이 자기 동류인 인간에게 행한 것과 연결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훌륭한 품성의 덕을 계발하고 드러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들이다.

결국 도덕적인 "선"이나 "악"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개인 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계의 본성이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은밀한 죄"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간이거나간에 그가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에 의하여 그것, 혹은 그는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마법, 악한 주술, 사술 등을 행하는 사람은 도덕적인 악의 화신이다. 그들은 본래부터 인간 관계를 파괴하고, 사회의 도덕적 완전성을 붕괴시키며, 관습이 요청하는 행위를 거역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또한 자연적인 악의 도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이 적어도 그 자연적인 악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고라든가, 질병이라든가, 불행 등이 닥치면 사람들은 즉각 자기들에게 그러한 악 주술을 행한 악의 대행자나 마법사나 사술사나 이웃이나 친척이 과연 누구인가를 찾는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신을 도덕적 질서의 궁극적인 수호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이 그 도덕적 질서의 수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도덕성을 매일 지켜주고 감시하는 것은 족장이나 살아 있는-사자나 장로, 사제, 혹은 신적인 존재나 영들이다. 도덕적인 본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규제이다. 그런데 이 규제는 개인과 개인간의 직접적인 접촉, 인간과 살아 있는-사자와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영들과의 관계 등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항목은 너무 많고 세밀한 것이어서, 인간은 결국 일생 동안 한없는 도덕적인 요청과 끝없이 부닥친다. 특히 개인이 스스로를,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자의식을 가지는 환경 속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더 심각하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친족 관계가 개인을 완전히 "노출"시켜버리는 아프리카적인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여러 도덕적인 요청들이 누구나에 의해서 거의 불편할 정도로 자세히 살펴지기 때문에, 이를 준행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주목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도덕성의 본질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다. 그것은 "존재"의 도덕이라기보다는 "행위"의 도덕이다. 이는 "정태적인 윤리"라기보다는 "역동적인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윤리는 그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그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을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바로 그러그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행하는 바 때문에 그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가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행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친절은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한 도덕적인 덕목일 수가 없다. 살인도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까지는 악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하기 전에는 "선도 "나쁜 것"(악)도 아니다. 이 점이 아프리카의 도덕과 윤리 개념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마법, 주술, 사술 등에 대한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가 "자연적인 악"이라고 구분 지은 악의 두 번째 형태와 연결이 된다. "자연적인 악"이란 인간의 삶에서 부닥치는 고통, 불행, 질병, 재난, 사고, 갖은 형태의 아픔 등에 대한 경험을 지칭한다. 이들 대부분의 현상은 자연적인 "원인"을 통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사고"나 "우연"으로 인해서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대리자(인간이나 영이나 간에)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러한 악을 "일으킨" 대행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가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신이나 영이 그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 사람 자신이 사실상 자기 고통의 원인이다. 즉 그는 먼저 자기의 고통의 원인을 외면화했다가 다시 그 다음에 이를 내면화하는 것(안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마법사, 사술사, 악한 주술을 행하는 사람 등, 인간인 행위자들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사회적으로 악의 화신이다. 이런 부도덕한 행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1. 3 아프리카인들의 의식과 사고체계

서구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념이나 믿음은 지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수준에서 보면 모든 문화들이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구인들은 기술적 지식이 세계를 통제하고 이끌어 갈 수 있으며 모든 사회는 그것들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자세는 '현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의 사고체계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시대에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언어, 사회조직, 역사, 그리고 아프리카의 환경들이 우리 자신의 것들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더욱더 복잡한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차이점들은 널리 퍼져 있는 다른 문화들에 대한 삐뚤어지고 잘못된 자세 때문에 강화되어져 왔다.

언급했다시피 아프리카의 믿음과 사고체계에 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세계에서 보이고 있는 가장 높은 이혼율과 가장 낮은 이혼율이 아프리카에서 함께 나타나고 있다. 수렵채집 집단에서 보여주는 지도력의 비공식적인 양식과 성스러운 왕과 행정국가에 이르기까지 정치조직과 기구가 다양하다. 탄자니아만 해도 80여개의 다른 언어들이 존재한다. 아프리카 인들의 삶의 방식은 수렵, 채집으로부터 관계농업을 하는 복잡한 농업체계, 또는 아주 고도화된 공예산업을 가지고 있는 부족들도 있다. 만약 그러한 다양성이 언어, 정치, 사회조직, 삶의 방식들이 객관적인 환경에서 발견되어지고 관찰되어 질 수 있다면 아프리카 인들이 그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서구사회의 사고와 생각들이 최근의 서구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지적특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떻게 어떤 것들이 움직이는가에 관한 지식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능력을 넘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힘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사고체계와 서구의 사고체계를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문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통제하기 어려운 때, 불행이 기대와 희망을 흔들어 놓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할 점은 비록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서구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문화의 차이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이 언제나 나오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각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과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인의 사고체계는 과학적이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수단 아잔데(Azande)족의 주술과 주술사를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우리가 사실을 수집하는 것은 사실 아잔데족들에서 볼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과 같다는 것이다.

아잔데족 사람들이 어떤 불운의 원인을 찾아내는 프로세스는 과학 연구실에서 원인을 발견하는 서구적인 프로세스와 일맥상통한다. 1926년에서 1930년 사이 아잔데족을 연구한 인류학자, 에반스-프리차드(E. E. Evans-Pritchard)는 아잔데족 사람들이 질병과 병에서부터 공예 작업 중에 생기는 재난에 이르는 불운의 원인에 대한 가설들을 시험하는 데 있어 매우 예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잔데족 사람들은 신탁(信託)을 통해 불운의 원인에 대한 가설을 검증했는데, 신탁은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사건들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는 독물 신탁으로, 닭에게 독물을 먹이고 이를 테면 우리 아이가 계속해서 아픈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개가 아이에게 마법을 걸고 있기 때문인가?와 같은 질문을 붙인다. 닭이 죽으면 답은 그렇다가 되는 것이고, 닭이 살면 답은 아니다가 되는 것이다. 질문을 하기 전에 오늘 내가 하늘을 날게 될까? 같은 엉터리 질문을 독물 신탁에 물었다. 아잔데족 사람들은 사람은 스스로 하늘을 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답이 그렇다가 되면 그 독물이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고등 과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여기서 가설 검증을 떠올릴 것이다. 아잔데족 사람들이 독물에 대해 한 것이 바로 가설 검증이었다. 우리가 화학 약품이나 의약품이 오래되거나 오염되어 더 이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아잔데족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해 독물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잔데족 사람들이나 과학자나 마찬가지로 보통 오염된 물질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 아프리카인들의 사고 체계에 대한 에반스-프리차드의 선구적 연구의 결론은, 아잔데족과 서구인들 사이의 차이는 논리나 사고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잔데족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의 판단력은 다른 곳의 사람들과 같다. 그들도 의심하고 믿으며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고, 그들 사회의 전문가들, 의사들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의존적인 믿음과 갈등을 똑같이 갖고 있다.

서구의 사고체계와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는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차이점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서구의 전문가들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그 동안 해왔던 비교들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고 최근에야 모든 체제가 비교되기 시작했다. 둘째로, 마법사, 주술사, 영적 소유 같은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는 전과정으로서 또는 어떻게 사람들이 느꼈고 그들의 불행에 대처했는지를 연구하지 않았다.

셋째로 서구사고체계를 아프리카의 것과 같이 동일하고 정밀한 음미와 검사를 거치지 않았다. 즉 서구체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검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사고는 서구의 관찰자들에게 특별하고 이상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서구사회에서, 많은 사상자를 가져온 질병 같은 인간의 재난에 대한 숨겨진 이유를 알기 위해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은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구의 의사들은 환자에게 치료를 해주고 편안하게 하며 또한 필요한 경우 설명을 할 뿐이며, 아프리카의 의사와 비교해볼 때 역할이 한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강조의 문제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불행의 문제는 종종, 또는 언제나 개인적인 환경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회'나 "우연"같은 비개인적인 요소는 적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인들이 초기의 방문자들과 관찰자들에 의해 평가되어 왔던 것처럼 자연적 원인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아잔데인들의 좋은 예를 살펴보자. 에반스-프리차드는 아잔데족 사람들이 훌륭한 도공들로, 정교한 도자기를 만들기로 유명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잔데의 도공이 자신의 가마에서 굽는 동안 도자기들이 깨진 것을 발견하면, 기술적인 프로세스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예를 들어 점토에 돌이 섞였을 수도 있다. 아무런 자연적인 원인도 쉽게 밝혀지지 않을 경우에만 그 도공은 마법의 작용 같은 초자연적인고 개인적인 원인을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적인 원인이 없는 불운을 '우연'이나 '운이 나빴다'는 등의 비개인적인 원인으로 돌리지만 아잔데족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부터(악의를 가진 인간, 악마에 사로잡힌 인간)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아잔데족 사람들은, 이들 악의를 지닌 사람들은 탐욕에 의해서 동기가 유발되고 망구(mangu)라는 마법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망구로 인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잔데인들에게 있어 모든 죽음은 마법사나 주술사의 행동에 의한 것이다. 아잔데인들은 이들 악마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여 존재하고 있는 치료법을 발견하기 위하여 신탁을 행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모든 사회가 마법에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에 대한 다른 개인적 원인들은 다른 시대에 다른 아프리카인의 문화 속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또한 마녀와 주술사, 영혼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조상과 자연의 영같은 아프리카문화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한 부분인 초자연적인 현상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다른 사람과 관련되어져 있고 또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해석하고 있는지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동부아프리카의 유목민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커다란 도시에 살면서 신성한 왕을 가진 복잡한 형태의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서부 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요루바족에게 똑같이 적용시킬 수는 없다.  

또 다른 중요한 반대는 서구의 사고체계는 기술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역사에서, 강력한 기술력에 대한 믿음은 서구의 낙관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진보에 대한 사고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는 환경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통제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세계를 사고함에 있어 아프리카인들은 개인적 자질을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이것은 "삶에 있어서 실제적인 관심이었지 이러한 믿음들을 나오게 한 학술적인 관심(형이상학)은 아니었다."라고 아프리카인들을 평가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기술적 변화를 통한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그들의 삶의 조건을 바꾸기를 기대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환경이 야기할 수 있는 효과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의 의식과 믿음은 자연의 힘에 대한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들의 신성한 왕들은 자연적 과정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 수단의 실루크(Shilluk)족은 만약 그가 부적절하거나 고령이라면 그들의 왕이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실루크족은 그들의 왕을 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있는 사람이 없지만, 그들은 왕의 잘못된 건강이 가장 불행한 방법으로 자연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기술에 대한 태도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아프리카의 사고체계에 대한 두가지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첫째는 사람에 대한 환경의 효과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에서 영아 사망률은 약 50%에 이르고 있다. 케냐의 이테소(Iteso)족은 유아가 사망한 이후에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작명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어린아이들은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데 그들은 생활을 방해하는 동물과 이테소족들의 집을 침략하고 그들의 작물과 가축들을 파괴하는 숲과 평원의 식물들 뒤에 이름을 짓는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은 "에티앙(etyang ; 동물)", "에모토(emoto ;  하이에나)" 또는 "에모도(emodo ; 뿌리채 뽑히지도 않고 곡식을 망치는 잡초. 이 잡초는 제거하기에 불가능하며 경작지를 파괴한다.)"라고 이름이 지어진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을 죽게 만들고 자신들의 삶과 생명을 위협하는 그 파괴적인 힘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태소나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자연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별한 생명들에 대한 환경의  영향이 악마, 주술사, 그리고 마법사들 같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의하여 조건 지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들은 통제에 대한 실패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생각한다. 그런 통제는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처분을 알아내기 위한 시도와 관련되어 있다.

둘째,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은 운명에 대한 질문이며, '(하필이면) 왜 나인가?(Why me?)'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사고체계는 어떻게 그들의 세계에서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경험들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또 통제하려고 했는가를 살펴봄으로서 가능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아프리카인의 사고체계는 이론적이기도 하고 실제적이기도 하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식과 사고체계는 매일의 일상생활과 유리된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인의 지식은 상식으로서 매도할 수준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는 사색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행동에 대한 방법을 제공하고 또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생활단위를 벗어난 삶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의 대학과, 교회, 도시, 그리고 시골의 의식을 행하는 단체들은 아프리카인들은 현재 그들의 위치와 미래의 상태를 결정짓고 있다. 물론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고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또 서구인들이 전해준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 구전 전통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 사회의 연장자 같은 개인은 언제나 지식의 보고이며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새로운 이물들, 소설가, 학자, 그리고 정치지도자들도 이러한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자각의식을 가진 집단으로서 아프리카의 사고체계를 만들어가고 또 변화시키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 사고체계의 중요한 변화는 아프리카인들과 서구인들이 계속해서 교류와 대화를 어느 정도까지 해나가느냐에 그 폭이 결정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1. 4 우주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생각

삶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생각과 사고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개인에 의해 발전된 어떤 생각들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가 용인하고 있는 방법(예를 들어 대화, 예술적인 표현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세상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아프리카인들에게서도 보여지고 있다. 그러한 모든 생각들은 여기서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은 신화, 전설, 속담, 의식, 상징, 신념과 믿음, 그리고 격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에 대한 공식화되고 체계화된 견해들은 없지만 이러한 다양한 생각들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의 그림처럼 나타나고 있다.


1.4.1 창조된 우주

일반적으로 모든 아프리카인들은 우주는 창조되어졌다고 믿고 있으며 우주의 창조자는 신이라고 믿고 있다. 우주의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일치하지 않는다. 신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설명' 그 자체이다. 예로 많은 아프리카 언어에서 신의 이름은 창조자(creator)를 의미한다.

신에 대한 믿음은 아프리카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사람들이 우주를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설명할 때, 그들은 자연적으로 종교적인 대상으로서 우주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주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시각은 심오하게 종교적이다.

아프리리카인들의 의식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된 우주의 중심에 있다. 모든 창조된 것들 중에서 인간은 가장 중요하고 또 특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아프리카인들은 신이 처음에 하늘을 창조하고 그 위에 자신이 살면서 땅을 창조했다고 한다. 또 어떤 아프리카인들은 단 한번의 행동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한다. 또한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생각은 신은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주의 창조는 결코 끝나지 않는 진행형으로 생각하고 있다.


1.4.2 우주의 본성

많은 아프리카 사회에서 우주는 분할되는 두 개의 세계로 생각하고 있다. 즉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과 땅의 개념이다. 어떤 사회는 세 개의 세계로 분할하기도 한다. 하늘, 땅, 그리고 지하의 세계이다.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이들 세계들이 따로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고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늘은 별, 태양, 달, 운석, 하늘,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폭풍, 일식과 월식이 있는 곳이다. 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신은 '하늘에서(in the sky, in heaven)', '저 구름너머에(beyond the clouds)'에 살고 있으며 인간처럼 땅에서 살지 않는다. 인간은 신과 같이 살수 없다. 신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신을 보좌하고 도와주는 존재일수도 있고 또 신의 아이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프리카인들은 신은 완전히 혼자이며 그 자신이 모든 것이라고 믿기도 하는데 신이 모든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땅은 창조된 것들로 가득차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떤 아프리카인들은 땅을 살아있는 존재로서 간주하며 땅을 '어머니와 같은 땅(Mother Earth)', '여신의 땅(the goddess earth)' 또는 '땅의 신(the divinity of the earth)'라고 부른다. 상징적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보고 있는데 반해 땅을 우주의 어머니로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잠비아에서는 비가 내릴 때 며칠동안은 경작하는 것을 금지한다.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지진과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희생제물들이 땅의 신들에게 바쳐질 수도 있다. 땅에 존재하는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것들이 종교적 이유로서 존중되어진다. 예를 들어 산, 폭포, 바위, 숲과 나무, 새, 동물과 곤충들이 그렇다.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다. 그는 또한 창조자인 신과 우주를 연결하는 우주의 사제이다. 그는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우주와 조화를 꾀할 수도 있다. 인간은 신성한 대상으로서 우주의 한 부분이며 희생물과 헌납을 위해 다른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우주는 시간상으로 공간상으로 끝이 없다(The world will never end). 아프리카인들의 시간에 대한 개념은 주로 현재와 과거에 집중되어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끝이 없다. 사건은 크고 작은 리듬을 형성하여 오고 간다. 작은 리듬(minor rhythm)은 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종족을 보전하고 그리고 사망으로 이르는 땅에 살아있는 삶 속에서 발견되어 진다. 이러한 리듬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삶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중요한 리듬(major rhythm)은 낮과 밤, 건기와 우기, 큰 주기를 가지고 오고가는 자연적인 사건들(어떤 나무의 꽃이 피고, 어떤 새와 곤충들의 이동, 기근 하늘의 현상)이 해당된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리듬들은 우주가 변화는 할지언정 결코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많은 장소에서 원은 우주의 영원과 계속성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원은 의식, 예술, 암벽화, 또는 도구의 장식으로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 어떤 다른 곳에서는 끝이 없음을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거나 그림으로 그려져 나타나기도 한다(탄자니아의 마콘데 조각, 우자마 조각). 같은 개념들이 삶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을 나타내는 의식에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소규모의 변화보다는 대규모의 계속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또한 모든 우주는 갑자기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우주는 영원하고, 궁극적이고, 끝이 없다.

아프리카인의 눈으로 본다면 우주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질수 있으며 끝이 없는 무한한 것이다. 신에 의해 창조된 우주는 결국 계속성이 그에게 달려 있다. 신은 지속자이고 지킴이이며 우주의 지배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1.4.3 우주의 힘과 질서

우주는 질서 있게 움직이며 여러 단계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로, 자연의 법과 질서가 있다. 이러한 기능은 모든 지역에서 우주의 확실성과 안전성을 부여한다. 만약 예측할 수 없고 무작위로 변화한다면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할 것이며 삶과 우주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둘째로, 사람들 사이에는 도덕질서가 있다. 신은 사람들에게 도덕률을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도덕률을 통하여 개인의 삶과 그가 속한 공동체를 보호하는 관습과 제도들이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도덕률은 사람들에게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한지, 잘되고 잘못되었는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리고 아름답고 추한지,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각각의 사회는 우주의 도덕률 때문에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들 가치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 사람과 신, 그리고 영들과의 관계, 자연세계와 사람들의 관계를 다룬다.

셋째로, 우주에는 종교적인 질서가 있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삶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해석한다. 자연의 법칙은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또는 전달자(예를 들어 '하인' 또는 영들)을 통해 통제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회의 도덕과 제도들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그에 의해 궁극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도덕들의 파괴는 신에게 반대하는 것이며, 가족의 사자(돌아가신 조상들)를 공격하는 것이므로 강력한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도덕과 종교적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강력한 금기가 있다. 삶의 모습, 말, 음식, 옷, 사람들의 관계, 결혼, 장례, 사회적 추방, 불행과 죽음에 관한 것들이다. 만약 사람들이 범법자를 처벌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그를 처벌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에는 종교적 질서가 있다는 생각과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넷째로, 우주를 통치하는 신비한 질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에 대한 믿음은 전통약재, 주술, 주술사, 그리고 마법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힘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숨겨져 있는 신비한 것이다. 이러한 힘은 특별한 사람이나 영을 통해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러한 것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때는 죽은 사람을 볼 때, 환상, 육체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대화할 때, 다가오는 사건에 대한 예감, 그것들이 일어나기 전 어떤 것들에 대한 예언,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대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일등을 할 수 있다. 병자의 치료, 비를 오게 하는 것, 문제나 불행의 원인에 대한 추적, 도둑을 가려내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일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4.4 우주의 중심은 인간

아프리카인들의 창조신화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서 그 자신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망하며(한 발 떨어진 모습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즉 모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인들은 우주를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세상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이용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주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자세는 아프리카 인들에게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로 구분하고 있다. 식물들도 먹을 수 있는 것과 치료에 사용되는 것, 건물을 짓는 것과 땔감용으로 분류한다. 즉 어떤 것들은 물질적으로 자연의 것을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종교적 이유(의식, 상징 등으로)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주술적 목적이나 치료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우주를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살려고 노력한다. 우주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물질적, 주술적, 종교적 수단을 통하여 인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우주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단지 우주의 중심이며 친구이며 사용자일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연의 법에 복종하고 도덕과 신비한 질서에 적응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다면 가장 피해를 크게 받는 대상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프리카 인들은 관찰, 사고, 그리고 오랜 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1. 5 아프리카인의 종교에 대한 개념

아프리카의 종교관에 대한 초기 연구들은 종교적 진화론이라는 설명으로 특징 지워졌다. 이 안에서 전통적인 아프리카인들은 종교적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생활을 영위해 가는 단순화된 집단으로 분석이 되고 있다.

초기에 쓰여진 아프리카 종교관에 대한 연구서 들은 복음전파 보다는 문명화(civilizations)라는 사명을 품고 식민지 개척 세력들과의 긴밀한 유대속에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세다르 센고르(Leopold Seder Senghor)는 그의 학설에서 서구인들의 사고 방식과 경험이 체계화된 합리적 분석에 의해 환경에 반응하는 반면, 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경험은 단지 모든 것을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측면에 "종합적(synthetic)"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어떤 사물을 눈여겨볼 때, 그 사물에 대해 그들이 그것을 추상화 시켜서 이론화하는 것을 꺼려한다. 즉 사물과 인식의 주체인 자신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보통 자신 앞에 놓인 사물을 만져보고 느껴봄으로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분이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그것에 대해 어떤 명확한 진술을 하곤 한다. 예를 들면 바나나가 맛이 좋다는 것을 그들이 인식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레시드 템풀(Placide Tempels)은 자이레의 발루바(Baluba)족의 여러 가지 전통적인 생활상들을 관찰하고 나서, 자신의 관찰한 내용을 분석하여 기술하였는데, 그 후 그는 자신의 저술을 마무리지으면서 반투어를 말하는 모든 이들의 관념에는 "생명력(Vital- force)"을 가지고 있다는 더욱 확장되고 일반화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

John. S. Mbiti는 아프리카인들의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적, 철학적인 토대 밑에 항상 깔려 있는 근본적인 관념은 아프리카인의 '시간관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은 단지 과거와 현재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J. Jahn은 "존재(Being)"에 대한 4가지의 중요한 범주를 채택했다. 첫째로 "Muntu"의 범주는 신을 포함한 지성을 지닌 모든 존재들 예를 들어 영혼들과 친구, 이웃, 친척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사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Kintu"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는 없으나 Muntu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식물, 동물, 광물과 같은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범주이다. 세 번째, "Hantu"는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범주이며, 넷째, "Kantu/Kuntu"의 범주는 미, 희비와 같은 양식의 존재를 포함한다.
힘과 존재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이해와 경험에 관한 템플의 관점을 정리하면 존재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전제되어 졌으며 인식되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은 아프리카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한 아프리카인들은 우주에서의 신의 위력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그러한 인식은 그들의 종교적 믿음과 기대의 성취와 같은 행동들을 유발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의 종교적 철학 세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존재에 관해 철학적인 의문을 표시한다. 첫째,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을 믿는다는 점, 둘째, 그 경험으로부터의 복잡한 문제들이 그들로 하여금 선하게 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는 점, 셋째, 그들이 환경에서 경험한 힘과 건전하거나 원활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의 신관은 존재나 생명을 주관하는 힘, 우주적인 작용 또는 시간의 개념보다는 이러한 관심사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 관계는 정말이지 생각과 표현, 아프리카인들의 종교, 철학 그리고 사회조직에 관한 근본적인 관심사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