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구 유럽에 의해 '타자(Others)'화 작업과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
오늘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되어 있는 다원주의 사회로 변모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를 만들어왔던 주제에 대한 인식 또한 변하고 있다. 즉, 남성 중심으로 그리고 엘리트 중심으로 역사가 발전되어 왔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도전받으면서 ‘타자(他者 ; Others)’로 분류되어 왔던 여성, 노동자, 소수인종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무시되어 왔던 ‘타자’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한 사회나 국가, 나아가 문명이 어떻게 ‘타자화’되었는지 그리고 타자화된 주체의 시각에서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여 왔는가를 학제간 연구를 통해 고찰해 봄으로서 ‘정체성(identity)’을 찾는 역사학의 방법론은 역사학의 새로운 연구방향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는 철저히 '타자화'되고 '주변부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밖의 모든 것을 타자화시킨 계기는 18세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였다. 계몽주의에 고취된 모더니즘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는 합리적, 합목적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사고를 하는 자아를 만물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18세기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이었다. 그들은 ‘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거기에서부터 자아, 주체는 타자, 객체로부터 자동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자아/주체의 편에 의식과 진리와 실재를 두고 타자/객체의 편에 무의식과 허구와 비실재를 위치시킴으로서 서양의 분석적 사고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이분법을 가동시켰다.
위와 같은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개인은 개인대로, 민족은 민족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역할을 할 타자가 없을 때는 타자를 만들어 내는 일도 불사하였다. ‘근대적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필요로 했던 유럽인들은 非유럽 세계를 자신들의 타자로 상정하였다. 유럽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확인하였으며 어떤 면에서 유럽은 非유럽인들에게 부과한 인식론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유럽문명의 토대가 되는 백인과 非백인, 문명과 야만, 진보와 정체 등의 개념이 정립되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유럽 지식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만들어졌다.
자아와 타자의 뚜렷한 이분법적 사고 및 타자보다 우월한 자아라는 인식은 유럽철학은 또한 역사의 범주를 유럽문명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일원론적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이 인식은 세계의 역사를 사실상 유럽의 역사와 동일시하며 비유럽 세계를 유럽이라는 기호 밑에서 침묵 당하고 길들여지는 타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유럽 역사는 모든 것을 총체화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말없는 지시체’로서 유럽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적 이해의 기본이 되었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근대를 보편적 근대로 상정하고 공간적․시간적 동질화를 추구하는 역사 인식을 낳았으며, ‘유럽의 현재’를 ‘非유럽인의 미래’로 투영함으로서 역사적 진보를 정의하였다. 유럽이 ‘근대’라면 非유럽은 ‘전근대’ 또는 ‘非근대’여야만 했다. 서양인들이 非서구세계에 대해 행한 차별하기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서양에 대조되게 非서구세계를 정체한 혹은 퇴락한 사회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유럽이 자유, 진보, 문명, 역동성을 의미한다면 非유럽세계는 예속, 정체, 야만, 무기력을 의미하였다.
아프리카에 역사와 문명이 존재했었는가에 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인종차별주의와 문명 우월주의자들의 중요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는 백인이 도래한 이후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설사 그 이전에 어떠한 원주민의 사회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하자 토인비(Anold Toynbee)로 인한 바 크다. 그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이집트, 안데스, 중국문명 등 세계의 문명을 21개의 문명으로 분류하여 상호비교연구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문명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또 21개의 문명의 주체를 인종에 따라 분류할때에도 “어느 문명에도 적극적으로 공헌하지 않는 것은 흑색인종뿐이다”라고 흑인의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독일의 역사학자 헤겔은 『역사철학강의(Philosophie der Geschichte』서문에서 흑인들은 야만성과 분방함에 있어 자연적인 인간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품위, 인륜, 그리고 감정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나아가 아프리카는 역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며 ‘운동과 발전’이 결여되어 있는 대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무지를 가져오게 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아프리카의 타자화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머피(E. Jefferson Murphy)교수의 말처럼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고 백인들의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경멸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화를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화론적 사고와 함께 백인의 우월주의적 시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디오피아의 게즈(Geez)어를 사용하는 부족, 서아프리카의 만데(Mande)어족에 속하는 바이(Vai)족, 멘데(Mende)족, 로마(Loma)족, 크펠레(Kpelle)족, 바사(Basa)족 등 몇몇 부족들처럼 고유의 문자를 사용한 부족도 있었지만 다른 대륙과 비교하여볼 때 미미한 수준으로 중요도가 떨어진다. 또한 사하라 사막주변의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문화권에서 아랍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도 하였지만 성직자나 학자등 일부 계층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특정집단의 문화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집단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전승된 모든 행위유형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유럽의 식민통치체제와 맞물린 경제, 환경, 정치,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통치 이전 수천년에 걸쳐 쌓인 아프리카 역사의 일정한 양식과 정체성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고 식민지 이후의 아프리카를 형성하는 데에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대륙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이 역사적 도전에 처했을 때마다 반응했던 고도의 적응성과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고 또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되어 있는 다원주의 사회로 변모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를 만들어왔던 주제에 대한 인식 또한 변하고 있다. 즉, 남성 중심으로 그리고 엘리트 중심으로 역사가 발전되어 왔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도전받으면서 ‘타자(他者 ; Others)’로 분류되어 왔던 여성, 노동자, 소수인종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무시되어 왔던 ‘타자’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한 사회나 국가, 나아가 문명이 어떻게 ‘타자화’되었는지 그리고 타자화된 주체의 시각에서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여 왔는가를 학제간 연구를 통해 고찰해 봄으로서 ‘정체성(identity)’을 찾는 역사학의 방법론은 역사학의 새로운 연구방향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는 철저히 '타자화'되고 '주변부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밖의 모든 것을 타자화시킨 계기는 18세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였다. 계몽주의에 고취된 모더니즘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는 합리적, 합목적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사고를 하는 자아를 만물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18세기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이었다. 그들은 ‘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거기에서부터 자아, 주체는 타자, 객체로부터 자동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자아/주체의 편에 의식과 진리와 실재를 두고 타자/객체의 편에 무의식과 허구와 비실재를 위치시킴으로서 서양의 분석적 사고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이분법을 가동시켰다.
위와 같은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개인은 개인대로, 민족은 민족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역할을 할 타자가 없을 때는 타자를 만들어 내는 일도 불사하였다. ‘근대적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필요로 했던 유럽인들은 非유럽 세계를 자신들의 타자로 상정하였다. 유럽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확인하였으며 어떤 면에서 유럽은 非유럽인들에게 부과한 인식론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유럽문명의 토대가 되는 백인과 非백인, 문명과 야만, 진보와 정체 등의 개념이 정립되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유럽 지식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만들어졌다.
자아와 타자의 뚜렷한 이분법적 사고 및 타자보다 우월한 자아라는 인식은 유럽철학은 또한 역사의 범주를 유럽문명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일원론적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이 인식은 세계의 역사를 사실상 유럽의 역사와 동일시하며 비유럽 세계를 유럽이라는 기호 밑에서 침묵 당하고 길들여지는 타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유럽 역사는 모든 것을 총체화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말없는 지시체’로서 유럽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적 이해의 기본이 되었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근대를 보편적 근대로 상정하고 공간적․시간적 동질화를 추구하는 역사 인식을 낳았으며, ‘유럽의 현재’를 ‘非유럽인의 미래’로 투영함으로서 역사적 진보를 정의하였다. 유럽이 ‘근대’라면 非유럽은 ‘전근대’ 또는 ‘非근대’여야만 했다. 서양인들이 非서구세계에 대해 행한 차별하기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서양에 대조되게 非서구세계를 정체한 혹은 퇴락한 사회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유럽이 자유, 진보, 문명, 역동성을 의미한다면 非유럽세계는 예속, 정체, 야만, 무기력을 의미하였다.
아프리카에 역사와 문명이 존재했었는가에 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인종차별주의와 문명 우월주의자들의 중요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는 백인이 도래한 이후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설사 그 이전에 어떠한 원주민의 사회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하자 토인비(Anold Toynbee)로 인한 바 크다. 그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이집트, 안데스, 중국문명 등 세계의 문명을 21개의 문명으로 분류하여 상호비교연구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문명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또 21개의 문명의 주체를 인종에 따라 분류할때에도 “어느 문명에도 적극적으로 공헌하지 않는 것은 흑색인종뿐이다”라고 흑인의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독일의 역사학자 헤겔은 『역사철학강의(Philosophie der Geschichte』서문에서 흑인들은 야만성과 분방함에 있어 자연적인 인간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품위, 인륜, 그리고 감정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나아가 아프리카는 역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며 ‘운동과 발전’이 결여되어 있는 대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무지를 가져오게 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아프리카의 타자화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머피(E. Jefferson Murphy)교수의 말처럼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고 백인들의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경멸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화를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화론적 사고와 함께 백인의 우월주의적 시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디오피아의 게즈(Geez)어를 사용하는 부족, 서아프리카의 만데(Mande)어족에 속하는 바이(Vai)족, 멘데(Mende)족, 로마(Loma)족, 크펠레(Kpelle)족, 바사(Basa)족 등 몇몇 부족들처럼 고유의 문자를 사용한 부족도 있었지만 다른 대륙과 비교하여볼 때 미미한 수준으로 중요도가 떨어진다. 또한 사하라 사막주변의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문화권에서 아랍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도 하였지만 성직자나 학자등 일부 계층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특정집단의 문화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집단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전승된 모든 행위유형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유럽의 식민통치체제와 맞물린 경제, 환경, 정치,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통치 이전 수천년에 걸쳐 쌓인 아프리카 역사의 일정한 양식과 정체성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고 식민지 이후의 아프리카를 형성하는 데에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대륙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이 역사적 도전에 처했을 때마다 반응했던 고도의 적응성과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고 또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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