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에 대해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 동부는 케냐, 서부는 자이르, 남부는 루안다와 탄자니아, 북부는 수단과 국경을 접한다. 면적 23만 6,036㎢(그 중 水面면적이 3만5,431㎢). 인국 1,322만(1979). 인구밀도는 56인/㎢. 수도는 캄팔라이다.
면적 : 23만6,036㎢ 인구 : 1,322만(1979) 인구밀도 : 56인/㎢ 수도 : 캄팔라 통화 : 우간뉴실링(USh) 환률 : 1달러 1,135USh(1997)
국민소득 : 국민총생산 37억 1,200만 달러 수출 3억 7,610만 달러 수입 3억 800만 달러
자연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의 중앙에 위치하며, 케냐와의 국경에 있는 엘곤산, 자이르와의 국경에 있는 루웬조리산, 루안다와의 국경에 있는 무하보라산이 동서로 치솟아 있다. 이 나라의 남동부에 긴 호안선을 이루는 빅토리아호, 남서 국경지역의 에드워드호, 그 북방에 빅토리아 나일강으로 빅토리아호와 연결되는 앨버트호 등이 있어 영토의 북서부가 점차 고도가 낮아지는 고원이 되며 그 중 가장 낮은 지역을 앨버트 나일강이 흘러 수단에 들어가서 백(百)나일이 된다. 영토의 중앙부는 쿄가호를 중심으로 광대한 소택(沼澤)지대를 이루고 있다. 영토의 대부분은 표고 1,000m이상으로 적도 직하(赤道直下)이나 기온은 연교차가 거의 없으며 수도 캄팔라의 연평균 기온은 21.9℃이다. 우기는 3∼5월, 9∼1월 등 2회로 나타나며 빅토리아 호반의 연 평균 강수량은 1,800mm에 이른다. 우간다는 사바나 기후로, 소림지역이 많으며 머치슨폴즈, 르웬조리 등의 2대 국립공원이 있으며 몇 개의 광대한 동물보호지구가 있다.
주민
아프리카인이 99.1%, 인도인을 주로 하는 아시아인이 0.8%, 백인이 0.1%이다. 지방자치제는 부족을 단위로 하고 있다.
역사
예로부터 여러 민족의 왕래가 잦았으나 이디오피아 방면에서 남하한 인종이 분뇨로, 부간다 등의 왕국을 세운 것이 16세기 중엽이었고, 처음에는 분뇨로 왕국이 가장 강력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부간다왕국이 득세하였다. 1844년경부터 인도양 연안에서 진출해온 아랍 노예상인이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도 넘나들었고 또한 수단 방면에서 온 노예 사냥군을 선도하여 이집트의 세력도 침투해와서 1870년대에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탐험가 J. H. 스피크와 J. A.그란트가 부간다 왕국을 방문한 것이 1862년, 영국이 이 지역에 세력을 확립한 것이 89년인데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그 통치, 개발을 담당하였다. 90년에 독일령(領) 동 아프리카와의 경계가 획정되었고, 러가드 대위가 통치를 맡았다. 94년 부간다 왕국이, 96년에는 다른 우간다 지역들이 영국과 보호령협정을 맺었다. 1901년 동(東)케냐 빅토리아 호안에 있는 키수무 항(港)과 인도양 연안의 몸바사 항을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재배방법을 지도하여 생산된 목화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도 부설되었다. 한편 10년경부터 백인 농장에서 시작한 코피 재배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도 널리 번져나갔다. 케냐와는 같은 영령 동아프리카로서 밀접한 경제관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 때부터 영국 위임통치령이 된 탕가니카(탄자니아)를 더하여 세 나라가 공통의 통화, 관세, 교통, 통신 등을 통하여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운동은 52년에 결성된 우간다 민족회의(UNC)의 활동이 최초였고, 이는 다른 아프리카 여러 나라보다 상당히 뒤늦게 시작된 셈이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연방'구상에 반대했던 부간다 국왕은 53년 11월 이후 한때 퇴위를 당하였으나 62년 10월에 독립되면서 헌법개정에 의해 특이하고 복잡한 연방체의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외교
1967년 10월 9일 독립 5주년 기념일에 신헌법이 실시되면서 우간다는 종래의 정치체제에서 탈피하여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대통령은 원수, 정부수반,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겸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의회는 단원제로 82의석인데 그 중 27의석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은 우간다 왕국의 무테사 2세였으나 66년 오보테 수상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좌경화(左傾化)하였다. 71년 1월 오보테가 영국연방수뇌회의 참석차 외유중(外遊中), 이번에는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하였다. 아민은 72년 8월 우간다의 경제를 주름잡던 재주(在住) 인도인에게 강제 퇴거령을 내렸으며, 그 후 반대파로 인정되는 국민의 대량 학살을 감행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폭정하에서 정치가, 실업가, 지식인의 대부분은 숙청되거나 망명하거나 하였다. 72년 이스라엘과 단교, 리비아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인접국가인 탄자니아, 케냐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도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다. 78년 10월 탄자니아와 군사충돌을 일으킨 아민은 79년 4월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반(反)아민파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여러번 대통령이 바뀌면서 80년 말 총선거의 결과 오보테가 대통령에 복귀하였다. 아민이 축출되자 미국은 79년 5월 우간다에 대한 금수(禁輸) 조치를 해제한 바있다.
경제, 산업
우간다는 농업국으로 수출품의 90%가 농산물인데 1976년의 경우, 수출총액 3억5,150만 달러 가운데 코피가 82.7%를 차지하며 목화가 6.1%, 차가 2.9%, 구리가 2.2%를 차지한다. 우간다의 경제는 1920년대부터 케냐, 탄자니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으며, 3개국이 각각 독립한 이후 66년 8월에 공통통화는 폐지된 대신 67년 7월에 3개국간에 동아프리카 공동체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아민 정권의 출현 이후 서서히 마찰이 증대하여 마침내 77년 9월에 동아프리카 공동체는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우간다의 산업 경제는 오랫동안 아시아인(인도인, 파키스탄인)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고 72년에 아민이 이들 아시아인의 강제 퇴거를 명령하였을 때 옛 종주국인 영국은 강경하게 그것에 반대하였으나 우간다의 일반 민중은 당시 이 조치를 환경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대부분이 떠나게 되자 산업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일부 아시아인을 재입국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은 물자의 부족을 야기시켜 소비자 물가지수(75년에 100)가 72년의 40%서 73년 49.3%, 74년 83.1%, 76년에는 154.8%로 급상승하였으며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간다에는 케냐 국경에서부터 자이르국경 근처까지 동서로 달리는 간선철도와 목화재배지대를 거치 앨버트 나일강연안으로 뻗은 간선 및 지선철도가 있고, 빅토리아호, 쿄가호, 빅토리아 나일강 등의 내륙수운과 약 1,800km의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빅토리아호반의 엔테베에 국제공항이 있고, 빅토리아호의 빅토리아 나일강 유출부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1954) 15만 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사회, 문화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이며, 또 계절적인 농업 노동자가 대량으로 인접국가들로부터 드나들고 있다.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각기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부족종교도 무시할 수 없다. 언어는 전통적인 부족왕국이 최근까지 존속하였고 또 반투계 이외의 다양한 주민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아프리카 여러나라처럼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하고 있지않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분간 존속될 것 같다. 성인문맹율은 75%에 달하나 교육은 인접국가들보다 보급되어 있는 편이고 공립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는 국민학교의 학생수가 약 80만, 그밖에 중학교, 직업학교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계통의 사립학교도 많다.
우리 나라와의 관계
우간다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 남북한 동시 수교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1962년 10월 우간다를 정식 승인하고 63년 4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80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對) 우간다 수출실적은 111만 달러, 수입은 640만 달러인데, 현저한 입초(立超)을 나타내는 수입 품목의 대종은 코피이다.
우간다 소개
면적: 241,139평방미터 (남북한 합친 것과 비슷)
인구: 약 2천만. 아디아민 독재와 그 후유증으로 통계에 따라 80만 내지 2백만명까지의 사람이 죽었다. 55개 종족에 43개의 언어 사용. 내전으로 80만의 고아가 생겼고 인구의 3분의 1이 HIV양성 내지 AIDS환자라는 통계가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낮을 것 같다).
전략적 위치: 수단 남부, 자이레 동부, 루안다 등의 나라는 우간다를 통과해서 물자를 공급받는다. (실제로 모든민족신학교에는 이들 나라 출신의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우간다는 케냐, 수단, 탄자니아, 자이레, 루안다에 둘려싸여 있다.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 동부는 케냐, 서부는 자이르, 남부는 루안다와 탄자니아, 북부는 수단과 국경을 접한다. 면적 23만 6,036㎢(그 중 水面면적이 3만5,431㎢). 인국 1,322만(1979). 인구밀도는 56인/㎢. 수도는 캄팔라이다.
면적 : 23만6,036㎢ 인구 : 1,322만(1979) 인구밀도 : 56인/㎢ 수도 : 캄팔라 통화 : 우간뉴실링(USh) 환률 : 1달러 1,135USh(1997)
국민소득 : 국민총생산 37억 1,200만 달러 수출 3억 7,610만 달러 수입 3억 800만 달러
자연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의 중앙에 위치하며, 케냐와의 국경에 있는 엘곤산, 자이르와의 국경에 있는 루웬조리산, 루안다와의 국경에 있는 무하보라산이 동서로 치솟아 있다. 이 나라의 남동부에 긴 호안선을 이루는 빅토리아호, 남서 국경지역의 에드워드호, 그 북방에 빅토리아 나일강으로 빅토리아호와 연결되는 앨버트호 등이 있어 영토의 북서부가 점차 고도가 낮아지는 고원이 되며 그 중 가장 낮은 지역을 앨버트 나일강이 흘러 수단에 들어가서 백(百)나일이 된다. 영토의 중앙부는 쿄가호를 중심으로 광대한 소택(沼澤)지대를 이루고 있다. 영토의 대부분은 표고 1,000m이상으로 적도 직하(赤道直下)이나 기온은 연교차가 거의 없으며 수도 캄팔라의 연평균 기온은 21.9℃이다. 우기는 3∼5월, 9∼1월 등 2회로 나타나며 빅토리아 호반의 연 평균 강수량은 1,800mm에 이른다. 우간다는 사바나 기후로, 소림지역이 많으며 머치슨폴즈, 르웬조리 등의 2대 국립공원이 있으며 몇 개의 광대한 동물보호지구가 있다.
주민
아프리카인이 99.1%, 인도인을 주로 하는 아시아인이 0.8%, 백인이 0.1%이다. 지방자치제는 부족을 단위로 하고 있다.
역사
예로부터 여러 민족의 왕래가 잦았으나 이디오피아 방면에서 남하한 인종이 분뇨로, 부간다 등의 왕국을 세운 것이 16세기 중엽이었고, 처음에는 분뇨로 왕국이 가장 강력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부간다왕국이 득세하였다. 1844년경부터 인도양 연안에서 진출해온 아랍 노예상인이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도 넘나들었고 또한 수단 방면에서 온 노예 사냥군을 선도하여 이집트의 세력도 침투해와서 1870년대에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탐험가 J. H. 스피크와 J. A.그란트가 부간다 왕국을 방문한 것이 1862년, 영국이 이 지역에 세력을 확립한 것이 89년인데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그 통치, 개발을 담당하였다. 90년에 독일령(領) 동 아프리카와의 경계가 획정되었고, 러가드 대위가 통치를 맡았다. 94년 부간다 왕국이, 96년에는 다른 우간다 지역들이 영국과 보호령협정을 맺었다. 1901년 동(東)케냐 빅토리아 호안에 있는 키수무 항(港)과 인도양 연안의 몸바사 항을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재배방법을 지도하여 생산된 목화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도 부설되었다. 한편 10년경부터 백인 농장에서 시작한 코피 재배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도 널리 번져나갔다. 케냐와는 같은 영령 동아프리카로서 밀접한 경제관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 때부터 영국 위임통치령이 된 탕가니카(탄자니아)를 더하여 세 나라가 공통의 통화, 관세, 교통, 통신 등을 통하여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운동은 52년에 결성된 우간다 민족회의(UNC)의 활동이 최초였고, 이는 다른 아프리카 여러 나라보다 상당히 뒤늦게 시작된 셈이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연방'구상에 반대했던 부간다 국왕은 53년 11월 이후 한때 퇴위를 당하였으나 62년 10월에 독립되면서 헌법개정에 의해 특이하고 복잡한 연방체의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외교
1967년 10월 9일 독립 5주년 기념일에 신헌법이 실시되면서 우간다는 종래의 정치체제에서 탈피하여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대통령은 원수, 정부수반,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겸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의회는 단원제로 82의석인데 그 중 27의석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은 우간다 왕국의 무테사 2세였으나 66년 오보테 수상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좌경화(左傾化)하였다. 71년 1월 오보테가 영국연방수뇌회의 참석차 외유중(外遊中), 이번에는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하였다. 아민은 72년 8월 우간다의 경제를 주름잡던 재주(在住) 인도인에게 강제 퇴거령을 내렸으며, 그 후 반대파로 인정되는 국민의 대량 학살을 감행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폭정하에서 정치가, 실업가, 지식인의 대부분은 숙청되거나 망명하거나 하였다. 72년 이스라엘과 단교, 리비아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인접국가인 탄자니아, 케냐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도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다. 78년 10월 탄자니아와 군사충돌을 일으킨 아민은 79년 4월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반(反)아민파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여러번 대통령이 바뀌면서 80년 말 총선거의 결과 오보테가 대통령에 복귀하였다. 아민이 축출되자 미국은 79년 5월 우간다에 대한 금수(禁輸) 조치를 해제한 바있다.
경제, 산업
우간다는 농업국으로 수출품의 90%가 농산물인데 1976년의 경우, 수출총액 3억5,150만 달러 가운데 코피가 82.7%를 차지하며 목화가 6.1%, 차가 2.9%, 구리가 2.2%를 차지한다. 우간다의 경제는 1920년대부터 케냐, 탄자니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으며, 3개국이 각각 독립한 이후 66년 8월에 공통통화는 폐지된 대신 67년 7월에 3개국간에 동아프리카 공동체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아민 정권의 출현 이후 서서히 마찰이 증대하여 마침내 77년 9월에 동아프리카 공동체는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우간다의 산업 경제는 오랫동안 아시아인(인도인, 파키스탄인)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고 72년에 아민이 이들 아시아인의 강제 퇴거를 명령하였을 때 옛 종주국인 영국은 강경하게 그것에 반대하였으나 우간다의 일반 민중은 당시 이 조치를 환경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대부분이 떠나게 되자 산업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일부 아시아인을 재입국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은 물자의 부족을 야기시켜 소비자 물가지수(75년에 100)가 72년의 40%서 73년 49.3%, 74년 83.1%, 76년에는 154.8%로 급상승하였으며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간다에는 케냐 국경에서부터 자이르국경 근처까지 동서로 달리는 간선철도와 목화재배지대를 거치 앨버트 나일강연안으로 뻗은 간선 및 지선철도가 있고, 빅토리아호, 쿄가호, 빅토리아 나일강 등의 내륙수운과 약 1,800km의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빅토리아호반의 엔테베에 국제공항이 있고, 빅토리아호의 빅토리아 나일강 유출부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1954) 15만 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사회, 문화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이며, 또 계절적인 농업 노동자가 대량으로 인접국가들로부터 드나들고 있다.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각기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부족종교도 무시할 수 없다. 언어는 전통적인 부족왕국이 최근까지 존속하였고 또 반투계 이외의 다양한 주민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아프리카 여러나라처럼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하고 있지않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분간 존속될 것 같다. 성인문맹율은 75%에 달하나 교육은 인접국가들보다 보급되어 있는 편이고 공립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는 국민학교의 학생수가 약 80만, 그밖에 중학교, 직업학교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계통의 사립학교도 많다.
우리 나라와의 관계
우간다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 남북한 동시 수교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1962년 10월 우간다를 정식 승인하고 63년 4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80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對) 우간다 수출실적은 111만 달러, 수입은 640만 달러인데, 현저한 입초(立超)을 나타내는 수입 품목의 대종은 코피이다.
우간다 소개
면적: 241,139평방미터 (남북한 합친 것과 비슷)
인구: 약 2천만. 아디아민 독재와 그 후유증으로 통계에 따라 80만 내지 2백만명까지의 사람이 죽었다. 55개 종족에 43개의 언어 사용. 내전으로 80만의 고아가 생겼고 인구의 3분의 1이 HIV양성 내지 AIDS환자라는 통계가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낮을 것 같다).
전략적 위치: 수단 남부, 자이레 동부, 루안다 등의 나라는 우간다를 통과해서 물자를 공급받는다. (실제로 모든민족신학교에는 이들 나라 출신의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우간다는 케냐, 수단, 탄자니아, 자이레, 루안다에 둘려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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