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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전시품]남아공 여인 고국으로 돌아오다

africa club 2002. 5. 7. 10:47
160여년간 유럽인들의 ‘노리갯감’이 됐던 아프리카 남부 코이코이족 여성. 지난 3일 그의 유해(遺骸)가 고향에 돌아왔다. 조각난 채 왔다. 다만 ‘사람’으로서 존엄성은 되찾았다.

이름은 사르지에 바트만(Baartman). 17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1810년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영국인 의사의 꾐에 빠져 런던으로 건너갔다. 서커스단과 박물관 입장에서 바트만은 희귀한 ‘동물’이었다.

그는 코이코이족이었다. 이 종족은 튀어나온 엉덩이와 커다란 생식기가 특징이었다. 유럽인들은 여기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녀는 술집을 돌았고, 우리 안에 갇혀 벗은 채 춤을 췄다. 슬픈 야수처럼 괴성도 질렀다. 심지어 동물 조련사에게 팔렸다. 그때부터 바트만은 ‘호텐토트(코이코이의 네덜란드어)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유럽에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구경꾼이 뜸해지자 그는 사창가에 넘겨졌고, 1806년 숨졌다.

그러나 죽어서도 자유가 없었다. 프랑스 의사들은 바트만의 시체를 석고모형으로 떴고, 시체를 해부했다. 바트만의 뼈와 성기·뇌를 방부처리해 얼마 전인 1974년까지 파리 인류박물관에 전시했다.

그 어떤 여성도 원치 않는 포즈를 그녀는 취해야 했다. 가슴을 드러내고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채 박물관에 진열된 바트만의 석고상. 이것이 식민지 남아프리카 역사의 치욕을 상징했다. 19세기 아프리카인을 무차별 ‘사냥’해 유럽에 끌고간 네덜란드와 영국의 과거를 보여줬다.

1994년. 남아공 대통령 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됐다. 코이코이인들은 ‘고통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녀를 고향으로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선진국 프랑스는 ‘정부 재산’이라며 동의하지 않았다. 다행히 지난 2월 프랑스 의회는 바트만 유해 송환을 결정했다.

3일 바트만의 고향 남아공에서는 그의 ‘귀향’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유해가 담긴 목관(木棺)에는 남아공 국기가 덮였다. 코이코이족 출신 추장 안드리스 르플러(Lefleur)는 이렇게 말했다. “유해는 화해의 정신 속에 묻힐 것이다.” 남아공 정부는 기념관을 세운다고 한다.

* (이 자료는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사로 백인들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큼찍했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신문을 보지 못한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조선일보 5월 5일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