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자이르

africa club 2003. 2. 3. 10:15
1. 국가 개요
Geography
수도 :  킨샤사(kinshasa). -4,241,000명
위치 : 중앙아프리카. 적도선상. 0.00N, 25
면적 : 2,345,410km   (해안의 길이: 37km)
지형 : 거대한 중앙분지가 낮은 대지. 동쪽에 산악지대 (스탠리산의 봉우리 5,110m)
환경문제 : 밀렵, 수질오염, 삼림벌채, 토양침식
기후 :열대성기후. 적도 강 유역은 덥고 습함. 남부고원지대는 보다 시원하고 건조한 기후.  동부고원지대는 보다 시원하고 물기가 있다. 남부에 잦은 가뭄이 있다.

People
Population  세계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의 하나이다.  연평균 증가율은  약 2.99 %이며 인구의 약 반수가  15세 이하이다. 수도 킨샤사의  인구는 약 4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 도시 집중화  현상이 현저해져 10년 정도  사이에 킨샤사와 루붐바시 등의 도심부에 사는 인구가 25%에서 40%로 증가하였다.
인구는 매우 드물게 분포하고 있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자바주와 그 외의 주요도시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산림지대의 인구밀도는 1km당 3인에도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보통 자녀가 많을수록 다복하다고 생각하여 한 가정에 5~10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조로 현상과 의료시설의 낙후, 질병과 영양실조로 인해 대체로 단명하고 있다.

총인구 : 49,000,500
연간 인구성장률 : 2.99%
시골과 도시인구비율 : 71/29
언어 : 프랑스어(공용어), 링가라어, 킹과나어(키스와힐리와 스와힐리의 방언) 등 700여 종류의 언어와 방언.
인종 : 바투족이 주종족. 그 외 200여 종족이 넘는 다양한 인종
종교 : 70%가 크리스트교, 토속신앙 20%, 이슬람교 10%...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1974년 이후 종교집회 결사의 자유가 교회에서의 주간예배의식  외에는 금지되고 있어서 정치적  영향력은 없지만 교육부문의 공헌은 매우 크다.
Health  수명 : 남 47세, 여 51세       유아 사망률 : 101.6/1,000
         의료(의사) 이용 가능 : 1/15,584
Education  성인교육율 : 77.3%      의무교육 : 6∼12세

Communication
전화 : 1,219명중 1명    신문(일간지)구독 : 1,000명중 3명    텔레비전 : 667명중 1명

Transportation
고속도로 : 90,830mile (146,500km)       기차(열도) : 3,206mile (5,138km)
이용 가능한 비행장 : 234여 곳         이용중인 오토바이 :480,000대
  
Government
정부형태 : 독재정치 (현재, 대의정치로의 과도기중...)
독립일 : 1960. 6. 30 (벨기에로부터)
대통령 : Laurent Kabila
정당 : 콩고자이레자유민주연합, 민주사회기독당 등 여러 정당이 있으나
        정당활동은 정부에 의해 압박(구속)당함.
        투표권(참정권)은 18세 이상 일반적으로 의무화.
국기 : 독립이후 국기를 세 번 바꾸었다. 현재의 국기는 녹색, 황색, 적색의 아프리카 색을  
        사용해 자이레가  아프리카 협조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중앙의 황색의 둥근    
        원 속에는 횃불을 든 팔이 그려져 있어 인민혁명운동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Economy
통화(화폐) : $1 = 3,275 new Zaires
1인당수입/GDP : $125/$18.8billion
노동력(노동인구) : 14,510,000
자원 : 코발트, 구리, 카드늄, 석유, 다이아몬드...수력발전잠재력, 목재 등의 자원
농업생산 : 커피, 팜유, 고무, 차, 카사바, 바나나, 구근류, 옥수수, 과일, 사탕수수 등등
산업 : 광업, 소비재산업, 시멘트, 다이아몬드산업
수출 : $ 1.9 billion (주로 벨기에, 미국, 프랑스)
수입 : $ 1.1 billion (주로 벨기에, 남아공, 미국)


2.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Congo-Kinshasa)(Zaire)

1998년 8월   CAD(Congolese Assembly  for Democracy:   콩고민주연합)의 반란세력은 Ernest Wamba dia Wamba의 지휘아래 르완다, 우간다의 조력으로, 동쪽에서부터 콩고민주공화국을 향해 급소도로 진격하여  수도 킨샤사의 변두리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Laurent Kabila의 6달된 정권을 무너뜨리고 재빨리 승리를 얻으려던 그들의 희망은 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남부아프리카공동체)의 가입국인 앙골라, 남미비아, 짐바브웨군 세력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이미 수단의 정부와 반란세력이 개입한 가운데, 콩고킨샤사에서의 새로운 시민전쟁은 12개 국가 이상이 참가해 범 지역적인(범국가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여 30여년 동안 독재와 부패로  물들었던 Mobutu정권이 1997년 막을 내림과  동시에 생겨났던 낙관주의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르완다, 우간다,  짐바브웨 등의   전폭적인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반란운동인 ADFLC (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의 지도자 Kabila의 세력은 더욱 커져갔다. 1996년 후반부에 Kabila는 자이레 동부에 대한 통제력을 거머쥐었으며, 1997년 5월에 그의 세력은 수도 킨샤사에까지 이르렀다. Kabila는 1971년 Mobutu가 지었던 자이레(Zaire)라는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으로 바꿨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됬던 부패와 잘못된 정치의 시대가 끝나고, 민권이 보장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이라는 새 정부에 대한 희망은 곧 잘못된 바램이 되었다.

이미 부패한 사회나 경제기반은 계속 붕괴되어 갔다. 1인당 국내총생산량(GDP)이 1990년 $220에서 1995년에는 $125로  감소하였다. 또한,  자원이 풍부한 Katanga(현재의  shaba)와 Kasai지방에서 분리론자들이 다시 대두되었고, 자이레의 서부와  동부에는 르완다와 부룬디의 학살로부터 도망쳐온 2백여만명의  피난자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자이레의 운명은 자국민들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들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리적으로 자이레는 아프리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중앙의 자이레강은 세계 수력 발전의 13%에 해당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이레는 9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이들 인접국에 대한 우회 진출기지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의 1/4의 크기에 해당하는 자이레는 다양한 지형들로 둘러 싸여 있다. 좋은 농업력을 가진 곳도 있으며 막대한 천연자원이 널리 분포된 지역도 있다. 그리하여 몇몇  지역은 몇십년동안 집중적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자이레는 아프리카의 동과 서를 잇는다. 자이레의 좁은  해안선은 대서양과 맞닿아 있어서 자이레 동부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연안에 진출한 여러 세력들의 영향을 받아왔다. 19세기 중반에 탄자니아 등지에서 온 Swahili, Arab, Nyamwazi의 무역인들은 자이레의  남동부 대부분지역의 노예와 상아를 약탈하며 그들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들 노예무역이 씁쓸한 기억을 남긴 반면, 스와힐리어가 자이레 동부의 공통어가 되어 퍼지기도 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49백만 인구는 200여 종족에 이르며, 거의 700여 종류의 언어와 방언을 사용하고,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가진다.  19세기  후반에 확립된  국경선  부근은 Azanda, Konga, chokwe, Songye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들과의 접촉(관계)을 유지하고 있다.

콩고강 어귀에 위치한 콩고제국은 포르투갈과 중요한 외교통상관계를 확립하면서,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크게 번성하였다. 이 콩고제국의  정교한 정치체제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Leopold's Genocide

자이레가 스와힐리나 아랍같은 동방 세력으로 받은 영향처럼 유럽의 진출 역시  자이레에 몹시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콩고분지는 벨기에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에 개인기업에 의해 탐사되고 개척되었다. 벨기에의 레오폴드왕은 개인  자격으로 콩고분지를 탐사하려는 스탠리(H.M.Stanley)의 탐험을 후원하였다.  1879년 레오폴드는 스탠리와의  조약을 이용하여 전지역에 걸쳐 자신의 콩고자유국을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규정하고, 실제적으로 개인 소유의 식민지를 세웠다. 스탠리는 많은 아프리카의 수장과 조약을  맺고 그 주권은 콩고지역을 착취하기 위한 국제 무역 회사인 '콩고국제협회(AIC)'가 장악하였다.  1885년 2월에 성립된 베를린 조약에서는 열강들이 동시에 콩고에 관한 자유무역을 체결하였고 이어  레오폴드는 자신을 신국가의 주권자로 하는 대책을 강구하였다. 1885년 4월에 벨기에 의회는 새로운 나라와 벨기에와의 관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국왕이 신국가의 원수로서 행동할 것을 인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이레의 국민들과 자원들을 그의 사적재산으로 인수하였다. 그는 대리상들과 그에게 양여권을 부여받은 기업들을 통해 상아나 천연고무 등을 착취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들을 강제 노동시켰다. 또한 할당된 고무를 모으도록 보내진 무장한 의용군들은 마을전체를 파괴함은 물런이거니와 주민들에게 수많은  잔학행위를 하였다.

레오폴드의 콩고자유국에서 레오폴드 대리상의 잔인무도한 행위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사살되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20여년동안 이 지역의 인구가 약 천만명 정도가 줄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동 등으로 굶어 죽었으며 더 고무를 생산하기 위한 생존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량학살되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지배자의 명령대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인질창고 같은 곳에서 질식사되었다.  

콩고정권은 우행은 몇년동안 해외로 새지 않게 조심하였지만, 결국 선교사나 다른 이들의 진술로 전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E.D.Morel의  'red rubber'나  Mark Twain의   신랄한 'King Leopold의 독백'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며,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한 Joseph Conrad의 'The Heart of Darkness'는 인기작품이 되었다. 결국 유럽제국주의자들 조차 그들의 인종적 오만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더 이상 '영혼만으로도 천만명을 죽인 왕'이라고 까지 불리던  레오폴드 왕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콩고에 있어서 벨기에의 가혹한 수탈과 폭정에 따라 국제적 비난이 높아지자 1908년 국왕이 콩고를 정부에 양도하여 벨기에 국령으로 이관됨으로써 직할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라고 불리고 벨기에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방식의 특징은 고도의 중앙집권화와 온정적 간섭정치(Parternalism: 경제적으로는 온정정책, 정치적으로는 탄압정책)으로 1960년 콩고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콩고에  대한 가혹한 수탈은 계속 되었고, 무력에 저항하는 주민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선교사를 통한 침투를 꾀했다.  교육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도 발전하였다. 강력한 초등학교 교육은 식민지 프로그램의 일부였지만 주요 중등학교를 결코 만들지 않아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없었다. 독립할 때까지 16명의 콩고인들만이  대학학력을 얻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벨기에가 아닌 다른 기관을 통해서였다.

1950년대에, 콩고인들-특히 도시인들-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1956년에는 카사부부가 콩고족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는 콩고 최초의 정당인 ABACO당을 창립하였다. 또  1958년에는 루뭄바(Lumumba)가 콩고국민운동(MNC)을 결성하였는데 이들 정당은 독립을 요구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1959년에는 ABAKO 시위의 심각한 충돌로 약  50여명이 죽었다. 불안에 직면해있던 이들은 콩고공화국의 급작스런 독립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결국 벨기에는 독립을 향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패배를 인정하였고, 1960년 1∼2월 브뤼셀에서 벨기에 정부와 아프리카인 지도자들의 원탁회의가 개최되고 독립일을 1960년 6월 30일로 하는  결의를 성립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안들에게는 광범위한 정치적 변화에 대비한 진정한 준비가 마련되지 않았다.  


4. The Congo Crisis

6월 24일 루뭄바를  수상으로 최초 중앙정부가  조직되고 루뭄바가 이끄는  콩고민족운동(MNC)이 1당이 되었고,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6월 30일에  콩고민주공화국은 독립하였다. 그러나 일주일동안 넓게 퍼진 혼란(무질서)으로  인해 군사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콩고의 지독한 식민지 상처가 보여주는 일이었다.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국가들과는 다르게 백인에 대한 증오가 콩고에서는 폭력으로 나타났고 거대 유럽 공동체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급하게 도망갔다. 인종적, 지역적 유혈사태는 아프리카 국민들 사이에 대단히 많은  사상자를 냈다.  자원이 풍부한 Katanga(현재의 shaba)에서 분리독립선언이 발표되고 공업용 타이어의 생산지인 Kasai주에서는 South Kasai 지방이 들고일어나 콩고동란이 발발하였다.   결국 루뭄바는 UN에 도움을 요청했고, UN의  많은 국가에서 군대가 지원되었다. 그러나 UN의 개입은 상당히 제한되어 성과가 없자, 다시 소련에 원조를  요구하여 원조를 받게 되어 콩고는 냉전 전쟁장소가 되었다. 모부투(Mobutu)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 1961년 모부투군에게 붙잡힌 루뭄바는 카탕가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서방의 관심,  특히 CIA는 이상주의자인 루뭄바의 실각과 그의 냉소적인 후계자  모부투의 부상을 방관했다. 루뭄바의 살해 소식이 국외에 전해지자,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콩고의 비극에 외면했던 UN과 루뭄바의 살해에 손을 쓴 벨기에와  미국에 대한 항의 데모가 일어나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민족주의자였던 루뭄바는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존중받고 있다.


5. Mobutuism

모부투는 군사쿠데타로 카사부부를 몰아내고 1965년 11월에  정권을 잡았다. 그는 그에게 상대되는 정치적 요소들을 제거했으며, 지역적 반란들을 진압했다. 결국 1971년에  모부투는 하나의 정당(Mobutu's Popular Revolutionary Movement: MPR: 혁명인민운동)만이 존재하는 국가를 설립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인 모부투와 MPR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몇몇의 종교기관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으로 모든 사회기관들이 MPR의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MPR 공화국의  공공사상은 점점 모부투화 되어갔다.  모든 시민들은 사회집회(모임)나, 학교, 일터 등지에서 매일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찬송가와 기도문에서도, 모부투의 이름은  종종 Jesus  대신 불리워지기도  했다. Mobutuism의  중요 슬로건은 "Authenticity"(확실성/신빙성/진정)로 이는 유럽적 가치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가치를 위한 의미라는 모부투만의 정의에 입각하여 해석된 것이었다.

그는 “All powerful”이란 뜻의 Sese Seko를 자신의 이름에 덧붙였다. 그는 또한 민족의상을 규격화 했다.  넥타이는 불법이고, 남자들은  소매없는 긴옷을 입도록  했고, 여자들은 paigne나 실내복(몸에 두르는)을 입도록 의무화했다. (전세계에서 넥타이  매는 것을 정치적 반항의 상징이라고 간주하는 나라는 자이레밖에 없을 것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강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자이레를 국가명으로 개칭하였으며, 국기도 변경하였다. 또 국민의식 고양 캠페인의 일부로서, 개인의 이름과 각  도시의 이름을 크리스트교에 관련된 이름(예를들면 세례명), 혹은 외국의 이름으로부터 아프리카적인 이름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Authenticity는 국유화프로그림에 수반되어 일어났다. Miniere연합과 다른  법인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1973년과 1974년에, 농장·상업기관·기업들 역시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모든 일은 자이레인들의 변혁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전개되었다. 그러나  몇몇 개인들(모부투와 그의 측근들, 소수엘리트들)만이 엄청난 부를 얻고 반면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매년 더욱더 빈곤해져 갔다.

그의 임기(집권)의 마지막 해가 될 때까지 모부투에 반대하는 세력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투옥, 고문, 사형에 처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와 Kimbanguist교회만이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파업이나 쟁의 등도 허락되지 않았다. 1977년과 1978년에 Shaba지방에 새로운 반란이 일었으나 U.S. backed Moroccan, 프랑스벨기에의 군개입으로 진압되었다. 결국 1997년 Laurent Kabila 지휘하의 반란세력은 모부투를 추방하고 국가명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다시 바꾸었다.


6. Economic Disaster

자이레의 경제적 잠재력은 벨기에의 이익을 위해  벨기에에 의해 계발되었지만, 1960년에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영토들에 비해 가장 발전이 많이  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기의 혼란은 발전을 정지시켰고  모부투 정권의 집권  동안에는 오히려 퇴보하였다. 그리고 구리와 코발트가격이 저하되던 세계경제상황은 자이레의 어려운 상황을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 진보에 있어서의 가장 주된 장애물은 모부투  정권에 의해 만연한 부패였다. 자이레의 정부조직은 '도둑정치'와 같았다. 부패에 물든 조직체계는 평민들의 재산을 공무원이나 소수 엘리트들에게 옮겨주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체제가 사회에 확립되어있었다. (예를들면, 시민들이 의학치료를 받기위해서는 간호사에게, 교도소밖에서 살기 위해서는 경찰들에게,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교장에게... 뇌물을 줘야했다.)  경제문제 갈수록 심각해졌다. 1990년 자이레의 도시 노동자들의 실제 임금은 1960년 임금의 2%밖에 되지 않았다. 시골민들의 수입 또한  줄어들었다. 예를 들면, 1990년 커피농부에게 돌아가는 수입은 벨기에의 개발하에 있던 1954년에 얻었던 수입의 1/15밖에 되지않았다.나빠지는 상황으로 결국은 초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자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커피나 다른 농작물들을 계속 밀수입을 하고,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그래서 자이레의 농작물들이 상당한 경제적 가능성(잠재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계속 침체되는 것이었다. 광활한 토지와 풍부한 강우량에도 불구하고 식품필요량의 약 60%를 수입했다. 시골민들은 도시로 이동하였지만 일자리가 부족하여 다시 시골로 돌아가고, 생존을 위해서 환금작물보다는 자급자족의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노후된  길이나 다리도 모든 무역을 감소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1983년 정부는 결국 IMF를 도입했다. 그렇지만 IMF는 공적지출에만  관여되었고, 풍토병처럼 퍼져있던 부패경제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일도 없었다). 모부투  정권 당시,  자이레  예산의 30%이상이  부채해결에 쓰였다.  1997년  6월 Kabila는 우선적으로 일자리 창출, 길·병원 재건축, 연료공급관로 설치 등등의 해결이 시급하다고 발표했지만, 이러한 계획들을 이행하기 위한 예산이 여전히 불투명해 해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7. U.S. Support for Mobutu

모부투 정권은 재정적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국 같은 외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U.S. 정보보고서는 벨기에가 벨기에령 콩고에서 멀어지던 1950년 중반에 준비되었었고 다시금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살아나게 되었다. U.S.  정책을 진행시키기 위해 미국은 모부투를 영속케 하기 위해 모부투를 지원했고 모부투 역시 그 임무(?)에 충실했다.  모부투는 앙골라 내전에서 미국을 도와  MPLA(Marxist-oriented 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 앙골라해방민중운동)을  저지하는  데에 뛰어들어  FNLA(The 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 앙골라 해방국민전선)등을 지원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냉전동맹에서의 중요한 입지를 세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역적 목표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MPLA의 반대세력인 CIA에  의해 FNLA는 모부투와 Holden Robert의 법적 지휘하에 있게 되었다. 모부투는 또한 석유가 풍부한 앙골라의 Cabinda지역을 탐냈으며 그곳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CIA와 남아공군을 보내도록 했다. 최근 몇년동안 몇백만 달러가 shaba주의 Kamina지방의 활주로-MPLA정권에 반대하며, 앙골라의  전체 독립을 위한 UNITA(The National Union for the Total Indipendence of Angola)의 게릴라전에 지원하기 위해 CIA가 사용- 를 개선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1989년에 모부투는 자신을 정부와 UNITA반란군 사이의 중재자로 세우려 했지만 그에 대한 신뢰는 떨어져만 갔다.

연합국측은 모부투의  인권침해와 그의  정권시에 집중된  억압과 부패를  알고 있었다. 1987년부터 모부투는 미국의 입법자들에게 로비활동을 목적으로 막대한 재정활동을 하였다. 모부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계속되었지만 실제적으로 무너진 그의 권력은 워싱턴에  있었다.

모부투는 또한 아프리카나 중동의 다른 유지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모로코 군대는 1977년과 1978년에 샤바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에 그를 지원했다. 그는 또한  남아공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오늘날 자이레가 수입하는 식량의 1/2이 남아공으로부터..). 1982년에  그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전쟁 이후 깨졌던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부활하였다. 이스라엘은 그후 계속해서 프랑스, 벨기에와 함께 자이레군에  지원을 했다. 1990년 수도 킨샤사에서  있었던 폭동에 다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군대가 개입하여 진압하였다.    모부투의 독재를 지지해줄 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모부투에 대한  반대세력은 증가해갔다. 1990년 그는 국내와 제3의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려고 약속된 해외 둘 모두에서의 그에 대한 비판을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억압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1996년 10월, 모부투가 유럽에서  암수술의 회복을 위해 머무르는  동안 Kabila 지휘하의 반란군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고지인 Uvira를 점령하였다. 1997년  4월 모부투가 다시 돌아왔을 때 Kabila의 지원군들은 모부투를 박탈하기 위한 선동의 수단으로  킨샤사 가까이에  진격하였다. 결국 남아공의 만델라(Mandela)와의 협상에 따라 모부투는 킨샤사를 떠났고 망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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