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프랑의 점령과 반발 - 만딩카(Mandinka)에서의 사모리 토우레의 반발, 1882-98

africa club 2001. 11. 21. 14:02
만딩카(Mandinka)에서의 사모리 토우레의 반발, 1882-98
사모리는 프랑스 점령지 중 최대의 저항세력이었다.  그는 1만명에서 1만2천명의 정예군과 9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필요한 경우에 대비한 게릴라부대을 준비하고 있었다.  1882년에 들어서자 군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가 서부수단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하였고, 사모리의 제국은 그들이 반드시 제거해야만 할 주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충돌이 있은 후, 사모리는 프랑스가 그의 제국의 안보와 서부로의 팽창에 대해 도전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1883년에 그는 철도변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철수의 명령도 거부하였으며,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데스보데스(Desbordes)휘하에 있던 프랑스 군대에 패배하였다.  동년 그의 군대는 키타(Kita)와 바마코사이의 전신선을 절단하였다.  그런후 그는 나파디(Nafadi)요새로 부터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 내었다.
프랑스는 평화를 요구하였고, 사모리는 이 단계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비산두구(Bissandugu)조약에 이어 그는 신의의 표시로 그의 아들을 프랑스에 보냈다.  그는 또한 시귀리(Siguiri)에 프랑스군 주둔지 설치와 니제르강 좌측제방의 점령에 동의하였다.
항구적인 평화의 토대로서 비산두구조약은 여러 관점에서 부적절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영토의 경계는 모호했지만 사모리의 서부로의 팽창은 제한되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동쪽의 대왕국인 시카소(Sikasso)로 방향을 전환하게끔 만들었는데, 그는 시카소의 왕이 프랑스와의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16개월 동안 시카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1884-85년의 베를린회의에서는 사모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1891년 프랑스는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비산두구조약을 어겼다.  사모리는 게릴라전을 전개함으로써 그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그의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전투를 하고, 다른 한 부대는 프랑스가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해서 철수하는 동부의 새로운 땅을 정복하였다.  프랑스가 점령한 땅은 초토화되었다.
전쟁은 사모리의 뛰어난 용병술, 즉 대부대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기동성때문에 오래 지속되었다.  몇년 동안 프랑스 군대는 종종 그들의 기밀이 미리 누설되는 등 사모리의 고도로 발달된 정보체계로 인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전체 제국이 항상 움직이고 있으며 나무랄데 없이 조직화된 게릴라 군대 때문에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사모리는 그의 제국을 확고하게 통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