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보의 자자, 1870-87
자자 (혹은 주보 주보가:Jubo Jubogha)는 이보(Iboland)지역의 중심지인 아마이보(Amaigbo)에서 1821년에 태어났다. 12살의 나이에 그는 보니(Bonny)족의 이가니퓨구마 알리슨(Iganiphughuma Allison)추장의 노예로써 팔려갔으나 곧 안나 페플(Anna Pepple)의 마두(Madu) 족장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1869년 자자는 고대 보니왕국의 18명의 의원(Houses)중 14명을 이끌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면서 오포보왕국을 건설하였다.
자자는 발전에 관한 서구적인 개념의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의 근대적인 경향들은 매우 선택적이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자자는 그의 나라안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사의 교육이 그의 권위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선교사 활동의 파괴적인 측면은 보니왕국의 경우에서 가장 잘 드러났는데, 선교사의 입국을 환영한 죠지 페플(Gorge Pepple) I세는 기독교에 대해 덜 비판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추천한 정책을 보니왕국에 도입하려던 그의 열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보니왕국은 지속적인 불안정과 내전에 휘말리면서 전통 추장들과 기독교도인 왕으로 분리되었다. 페플은 선교사들과 영국영사의 수중에서 점차 꼭둑각시가 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자가 피하기로 결심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자자는 선교사들, 무역업자 그리고 영사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선교활동을 위한 입국을 제지하는 자자의 호전적 태도때문에 선교사들은 그들이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예전부터 자자를 지원했던 많은 무역업자들도 그가 그의 강들을 따라 형성된 무역의 독점권을 쥐고 있고, 내륙시장으로부터 그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자는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가 나의 것이고 백인무역업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단언하였다. 영국 영사는 이 아프리카 왕이 그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거만함을 몹시 싫어했다.
영국은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첫째, 카메룬에서의 프랑스 개입과 독일의 관심에 선수를 취하는 것이며, 둘째, 자자의 중간 상인적 지위와 정치적 거만함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자자는 1884년에 그의 호전적 자세를 완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5년 6월 8일 니제르 해안(Niger Coast) 보호령이 탄생했다. 그러나 영국은 자자의 영토안으로 진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이는 부 영사관이 말한 것 처럼 "우리가 다른 유럽국가들이 진출하는 것을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가 성급히 들어갈 필요가 없다" 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그같은 활동은 오포보의 왕으로 하여금 외국인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다시 바꾸게 만들었다. 그는 큐아 에보에(Qua Eboe)강에 있는 밀러 브라더스(Miller Brothers)사의 공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영국은 자자와의 평화시기가 끝났음을 결정하였다. 존슨(Jonson)은 자자를 속여 그를 아크라로 추방하였다. 결국 그는 서인도로 추방되어 1891년 사망하였다. 한편, 오포보는 존슨에 의해 효율적으로 점령되었다.
자자는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위대한 지위에 올랐으며, 그후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인물의 한 예이다. 그는 오포보를 근대화시키고 상업적 제국으로 확장하려 하였으며, 동시에 잠재된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 오포보가 멸망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그는 1884년에 런던에 대사를 파견했었다. 또한 그는 헤웻(Hewett)과의 조약중 4조에 대해 반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나라에서 자유무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력도 결국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1874년 아산테(Asante)와 싸우는 가넷 울슬리(Garnet Wolseley)경에게 그의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의 동료 저항군들에 대한 불충성의 약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자자 (혹은 주보 주보가:Jubo Jubogha)는 이보(Iboland)지역의 중심지인 아마이보(Amaigbo)에서 1821년에 태어났다. 12살의 나이에 그는 보니(Bonny)족의 이가니퓨구마 알리슨(Iganiphughuma Allison)추장의 노예로써 팔려갔으나 곧 안나 페플(Anna Pepple)의 마두(Madu) 족장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1869년 자자는 고대 보니왕국의 18명의 의원(Houses)중 14명을 이끌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면서 오포보왕국을 건설하였다.
자자는 발전에 관한 서구적인 개념의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의 근대적인 경향들은 매우 선택적이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자자는 그의 나라안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사의 교육이 그의 권위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선교사 활동의 파괴적인 측면은 보니왕국의 경우에서 가장 잘 드러났는데, 선교사의 입국을 환영한 죠지 페플(Gorge Pepple) I세는 기독교에 대해 덜 비판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추천한 정책을 보니왕국에 도입하려던 그의 열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보니왕국은 지속적인 불안정과 내전에 휘말리면서 전통 추장들과 기독교도인 왕으로 분리되었다. 페플은 선교사들과 영국영사의 수중에서 점차 꼭둑각시가 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자가 피하기로 결심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자자는 선교사들, 무역업자 그리고 영사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선교활동을 위한 입국을 제지하는 자자의 호전적 태도때문에 선교사들은 그들이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예전부터 자자를 지원했던 많은 무역업자들도 그가 그의 강들을 따라 형성된 무역의 독점권을 쥐고 있고, 내륙시장으로부터 그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자는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가 나의 것이고 백인무역업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단언하였다. 영국 영사는 이 아프리카 왕이 그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거만함을 몹시 싫어했다.
영국은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첫째, 카메룬에서의 프랑스 개입과 독일의 관심에 선수를 취하는 것이며, 둘째, 자자의 중간 상인적 지위와 정치적 거만함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자자는 1884년에 그의 호전적 자세를 완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5년 6월 8일 니제르 해안(Niger Coast) 보호령이 탄생했다. 그러나 영국은 자자의 영토안으로 진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이는 부 영사관이 말한 것 처럼 "우리가 다른 유럽국가들이 진출하는 것을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가 성급히 들어갈 필요가 없다" 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그같은 활동은 오포보의 왕으로 하여금 외국인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다시 바꾸게 만들었다. 그는 큐아 에보에(Qua Eboe)강에 있는 밀러 브라더스(Miller Brothers)사의 공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영국은 자자와의 평화시기가 끝났음을 결정하였다. 존슨(Jonson)은 자자를 속여 그를 아크라로 추방하였다. 결국 그는 서인도로 추방되어 1891년 사망하였다. 한편, 오포보는 존슨에 의해 효율적으로 점령되었다.
자자는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위대한 지위에 올랐으며, 그후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인물의 한 예이다. 그는 오포보를 근대화시키고 상업적 제국으로 확장하려 하였으며, 동시에 잠재된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 오포보가 멸망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그는 1884년에 런던에 대사를 파견했었다. 또한 그는 헤웻(Hewett)과의 조약중 4조에 대해 반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나라에서 자유무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력도 결국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1874년 아산테(Asante)와 싸우는 가넷 울슬리(Garnet Wolseley)경에게 그의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의 동료 저항군들에 대한 불충성의 약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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