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프랑의 점령과 반발 - 알 하즈 우마르와 프랑스

africa club 2001. 11. 21. 13:57
알 하즈 우마르와 프랑스
우마르는 풀라니(Fulani)의 지배적인 부족민중 한 사람이었다.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그는 1820년 메카를 순례하였다.  그는 푸타(Futa)지역의 이슬람 족장들과의 충돌로 딩귀리(Dinguiry)로 망명했으며, 수단 국민에 대한 지하드(jihad)를 선언하였다.
프랑스의 상업적 야심을 눈치챈 그는 세네갈 내륙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막으려  하였다.  그의 적인 페이드허브도 우마르의 서부로의 팽창을 막으려 하였으며, 우마르의 영토와 프랑스 영토 사이의 경계선에 대해 협상하였다.  한편 그는 우마르의 적들에게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우마르 영토내에서의 폭동을 비밀리에 조장하였다. 우마르는  페이드허브의 이중게임(double-game)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세인트 루이스의 이슬람 거주민들에게 경고하였다.
'금후 나는 무력을 사용할 것이며 당신의 군주가 평화를 요구할 때까지 중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그의 측에 가담하였으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1857년 우마르의 군대는 메디나(Medina)요새에 대한 공격에서 패배하였다.  좌절을 겪고난 후 그는 강으로 되돌아갔고, 세네갈과 프랑스의 무역은 중단되었다.
프랑스 제국주의와 우마르의 충돌은 두가지 면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이러한 상황하에서 부동적인 국가의 창설에 만족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책은 팽창주의적인 식민지정책이 되어야만 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세네갈 내륙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들이 저항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비록 프랑스를 몰아낼 수는 없었지만, 우마르는 1860년에 그 지역이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경계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Hargrieves는 '페이드허브가  그 같은 조건에서 기꺼이 협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알 하즈 우마르의 승리에 대한 찬사'라고 지적하였다.
그후 15년동안 프랑스가 우마르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다는 점과 침범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마르의 후계자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점도 지적해야만 한다.  이 후자의 저항은 프랑스가 세네갈로부터 니제르까지의 철도건설을 결정하자 발생하였다.  이 계획을 주도한 인물은, 팀벅투(Timbuctu)를 경유하는 알제리-세네갈 철도건설을 계획하여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폴 솔리렛(Paul Soleillet)이었다.
솔리렛은 1876년에 세네갈의 총독인 Briera de L'Isle로부터 Algiers에서 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철도공사 허가를 받았다. 세네갈 내륙은 미래의 정복을 위한 토대로써 확보되어야만 했다.  철도공사가 1882년에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저항이 곧바로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