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어린아이부터'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Jo o는 Boa Esperan a(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몸바사(Mombasa)와 말린디(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Pedro Cabral은 부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칼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소속의 범선 하를렘(Haarlem)호가 테이블 만에서 난파되어 선원들이 약 6개월 동안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생존하다가 1649년 본국에 귀환한 후 이곳이 기항소의 설치 및 유럽인들의 정착에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동인도회사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은 지중해성 기후로 아주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고 특히 폭풍우가 심하다. 케이프 타운을 끼고 있는 케이프 반도의 해안가의 나무들은 항상 겨울 폭풍우로 아름드리 나무들도 항상 비스듬히 누워있다. 겨울에 폭풍우가 칠 때는 사람도 실려나갈 정도이다. 항상 두얼굴의 모습이고나 할까.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다룬 영화에서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태우는 모습과 선상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태우고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선원이나 종사자들이 그들의 운명을 당연한 것처럼 태연히 받아들이는 모습들은 남아공의 희망봉에서부터 유래되었다.
1852년 2월 26일 남아프리카의 해안에서 침몰한 버컨헤드(Birkenhead)라는 전함으로부터 이 역사적인 사실은 전해오고 있다. 1900톤의 이 전함은 나무가 아닌 철로 만들어진 최초의 전함이었으며 중기터빈으로 움직이며 또한 프리깃함형태의 범선처럼 돛으로 항해할 수도 있었다.
1852년 1월 7일 이 배는 군병력을 수송할 목적으로 남아공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남아공의 시몬즈타운(Simonstown)에서 석탄과 식량을 공급받고 638명의 승객을 태운 후 2월 25일에 항해를 다시 시작했다. 그들 중 476명의 영국 군인들은 동부 케이프의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날씨는 아주 좋았고 암석이 많기로 악명 높은 해안도 아주 선명하여 항해하는 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항해장비의 잘못된 조작과 해류로 인해 다음날 아침 이 배는 케이프 아귤하스(Cape Agulhas)와 케이프 헹클립(Cape Hangklip)사이의 위험지역(Danger Point)근처의 암초에 걸려서 침몰해가고 있었다. 이미 하갑판에서 잠자고 있던 약 100명의 군인들은 침대에서 익사하였고 모두 8척의 구명보트중 모두 부서지거나 제기능을 할 수 없어 단지 3척의 구명보트만 바다에 내릴 수 있었다.
선장은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타게하고 모든 승선인원들에게 배를 버리고 탈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알렉산더 쌔톤 중령(Lieutenant-Colonel Alexander Seton)은 군인들에게 갑판에 정렬하게 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는 구명보트에 메달리지 말도록 명령하면서 그는 칼을 뽑아 명령이 이행되도록 하기 위해 겁에 질려 구명보트로 달려가려고 열을 이탈하는 한 병사의 목을 치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나 쌔톤 중령은 빼어든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곧 그 군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곧이어 배는 두 조각으로 동강이가 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굴뚝과 돛대가 갑판에 무너지면서 물결에 잠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갑판에 서서 단 한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만약 한사람이라도 그 상황을 이탈한다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있는 구명정에 군인들이 몰려들어 침몰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638명의 항해자중 단지 193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선장과 쌔톤중령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버컨헤드 훈련(Birkenhead Drill)'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어린이부터(Women and children first)"라는 구호가 유래되는 계기가 되었다. 배를 침몰로 몰고 갔던 암초는 버컨헤드 암초(Brikenhead Rock)로 명명되어 회자되고 있다.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Jo o는 Boa Esperan a(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몸바사(Mombasa)와 말린디(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Pedro Cabral은 부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칼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소속의 범선 하를렘(Haarlem)호가 테이블 만에서 난파되어 선원들이 약 6개월 동안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생존하다가 1649년 본국에 귀환한 후 이곳이 기항소의 설치 및 유럽인들의 정착에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동인도회사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은 지중해성 기후로 아주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고 특히 폭풍우가 심하다. 케이프 타운을 끼고 있는 케이프 반도의 해안가의 나무들은 항상 겨울 폭풍우로 아름드리 나무들도 항상 비스듬히 누워있다. 겨울에 폭풍우가 칠 때는 사람도 실려나갈 정도이다. 항상 두얼굴의 모습이고나 할까.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다룬 영화에서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태우는 모습과 선상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태우고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선원이나 종사자들이 그들의 운명을 당연한 것처럼 태연히 받아들이는 모습들은 남아공의 희망봉에서부터 유래되었다.
1852년 2월 26일 남아프리카의 해안에서 침몰한 버컨헤드(Birkenhead)라는 전함으로부터 이 역사적인 사실은 전해오고 있다. 1900톤의 이 전함은 나무가 아닌 철로 만들어진 최초의 전함이었으며 중기터빈으로 움직이며 또한 프리깃함형태의 범선처럼 돛으로 항해할 수도 있었다.
1852년 1월 7일 이 배는 군병력을 수송할 목적으로 남아공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남아공의 시몬즈타운(Simonstown)에서 석탄과 식량을 공급받고 638명의 승객을 태운 후 2월 25일에 항해를 다시 시작했다. 그들 중 476명의 영국 군인들은 동부 케이프의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날씨는 아주 좋았고 암석이 많기로 악명 높은 해안도 아주 선명하여 항해하는 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항해장비의 잘못된 조작과 해류로 인해 다음날 아침 이 배는 케이프 아귤하스(Cape Agulhas)와 케이프 헹클립(Cape Hangklip)사이의 위험지역(Danger Point)근처의 암초에 걸려서 침몰해가고 있었다. 이미 하갑판에서 잠자고 있던 약 100명의 군인들은 침대에서 익사하였고 모두 8척의 구명보트중 모두 부서지거나 제기능을 할 수 없어 단지 3척의 구명보트만 바다에 내릴 수 있었다.
선장은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명정에 타게하고 모든 승선인원들에게 배를 버리고 탈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알렉산더 쌔톤 중령(Lieutenant-Colonel Alexander Seton)은 군인들에게 갑판에 정렬하게 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는 구명보트에 메달리지 말도록 명령하면서 그는 칼을 뽑아 명령이 이행되도록 하기 위해 겁에 질려 구명보트로 달려가려고 열을 이탈하는 한 병사의 목을 치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나 쌔톤 중령은 빼어든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곧 그 군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곧이어 배는 두 조각으로 동강이가 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굴뚝과 돛대가 갑판에 무너지면서 물결에 잠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갑판에 서서 단 한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만약 한사람이라도 그 상황을 이탈한다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있는 구명정에 군인들이 몰려들어 침몰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638명의 항해자중 단지 193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선장과 쌔톤중령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버컨헤드 훈련(Birkenhead Drill)'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어린이부터(Women and children first)"라는 구호가 유래되는 계기가 되었다. 배를 침몰로 몰고 갔던 암초는 버컨헤드 암초(Brikenhead Rock)로 명명되어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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