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2백만년 전에는 거대한 얼음덮개가 북유럽과 캐나다를 덮었다. 빙하기 동안 남유럽과 미대륙의 기후는 춥고 건조했다. 아프리카는 지금보다 춥지도 더 덥지도 않았다. 사하라 사막은 거의 동물들이 지나다니기에는 불가능한 장벽의 땅인 반면 동아프리카는 초원으로 빠르게 가속을 붙여서 변해갔다. 동아프리카 동물군에서 진화의 압력은 거의 동일하게 증가하였다. 이 동물군은 변화에서 매우 많이 닮은 두 개의 영장류의 그룹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는 비비류인데, 이것은 모든 원숭이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들의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또 하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는데 그 지역의 독특한 원시 인류 계보로 성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찰스다윈(Charles Darwin)이 진화이론을 내세운 19세기말에 유인원으로 가정되었다: 그들은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전은 전혀 반대였다: 사실 원숭이의 뇌와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말은 너무 심한 오도였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도 이것은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초원환경인 사바나의 하나의 도전은 이동을 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개코원숭이는 네발로 움직였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 발로 움직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찾게 남은 지역은 지도에서 반대에서 보여진다. 그들 중 어떤 곳은 지도의 연대보다 더 오래된 곳으로 남아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3백 7십 5만년으로부터 1백만년 까지로 얘기되는 긴 시간동안 그들은 새로운 형태로 진화되었고 독창적으로 변했고, 약간의 종으로 만들어졌고 단단한 식물을 씹을 수 있는 진보적인 무거운 타입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최초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분파의 진화는 현재 인류의 시작의 시점으로 고려되는 더 큰 몸과 뇌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호모 해빌리스로 불리는 원숭이 인간으로 발전되었고 이 지도의 연대에 의하면 화석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나란히 살았고 다른 점이 보이지는 않았으며 인류의 성질과 도구제작으로 항상 생각되어진 활동을 통해서 우월성이 설명되지도 않았다. 그는 모난 조각돌의 가장자리를 깍아서 그것을 이용해 그가 잡은 동물을 도살하거나 혹은 아마 동물의 썩은 고기를 찾아 다녔을 것이다. 그것은 직립보행과 열관리가 더 나음을 의논하게 하는 상징적 이름이라고 말하여져 왔다: 두발 보행 동물은 네발 보행 동물보다 낮시간 햇빛을 덜 받게 되고 낮잠도 덜 필요하게 외었다. 그러나 호모 해빌리스 에 대한 결정적인 사실은 더 즐거운 작업을 위해서 그의 손이 자유로워 졌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떨어진 조약돌 조각은 이 새로운 능력의 첫 번째 신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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