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blue>[ 아프리카 역사 I ] - 아프리카인의 이주와 반투족의 이동</font>

africa club 2003. 9. 25. 19:24
2. 인류의 기원지로서 아프리카

인류가 속한 영장류의 진화는 7,000-8,000만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유인원과 구세계 원숭이는 2,3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나타났고, 그 후에 유라시아로 퍼졌다. 일부 유인원은 살아 남아 환경에 계속적응하면서 우연히 인류 조상의 고유한 특징인 직립 보행이나 두 발 보행을 보여주는 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호미니드(Hominid)"라 불리거나, 인류와 400만~800만 년 전에 다른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진 이후 공통의 진화 경로를 공유하는 인류의 화석 조상을 포함하는 사람과(호미니드 ; Hominidae)의 생물학적 과(科)의 구성원이라 불렸다

호미니드 과(科)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종은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뿐이다. 그러나 지난 400만 년 동안 화석 기록은 수많은 다른 호미니드 종류, 특히 호미니드 진화의 최초 300만 년 동안 호미니드와 이들과 공존했던 몇몇 종을 밝혀주었다. 그렇게 먼 과거에 발견된 가장 초기의 직립 보행 호미니드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아파르(Afar)의 남부 원인(猿人)"을 의미) 종에 해당한다.

그들은 동아프리카지구대의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역과 탄자니아 라에톨리(Laetoli)에서 약 300~400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 비록 두개골은 여러 면에서 원숭이를 닮았지만, 엉덩이, 다리, 발, 척추 등 뼈의 여러 특징은 직립 보행을 가리키는 깊은 변화를 보여준다. 게다가 라에톨리 발굴지에서 수백 개의 다른 동물의 흔적과 함께 발견된 화석화된 진기한 발자국들은, 분명 함께 걸었던 세 개체의 호모니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은 동부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었다.

200~300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아프리카의 남부 원인(猿人)"을 의미)라 불리는 작은 두뇌를 가진 새로운 종의 호모니드가 남부 아프리카의 석회암 동굴의 화석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동부 아프리카에서도 작은 두뇌(400~550cm3로 현대인의 평균 1,350cm3와 비교할 때 작다)를 가진 매우 다른 호모니드 종이 나타나는데, 큰 턱과 이빨이 특징적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에티오피쿠스(Australopithecus aethiopicus)라 불리는 이 종은 매우 거칠고 품질이 낮은 식량을 먹는 데 적응한 것으로 간주되는 호모니드 종이다. 작은 두뇌와 큰 턱을 가진 이 호모니드는 100만~200만 년 전에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후기의 대표적인 종들과 함께 "튼튼한 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ine)"으로 알려진 주요 호모니드 그룹 중에서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종이다.

이 건강한 오스트랄로피테신은 적어도 100만 년 전에 우리 인류의 속(屬)인 호모(Homo)에 해당하는 큰 두뇌의 호모니드 혈통과 공존했다. 두뇌 크기가 600~750cm3(현생 인류의 절반 크기)인 새로운 종 호모 하빌리스(Hpmp habilis)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는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적어도 200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진화 초기에 호모 혈통이 하나 이상의 종으로 갈렸다고 믿고 있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170만 년 전에는 큰 신체와 호모 하빌리스보다 큰 두뇌를 가진 새로운 호모니드 종이 출현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 불리는 이 새로운 종은 850~1,100cm3(현생 인류의 2/3~3/4 크기)의 두뇌 크기를 가졌고, 큰 눈두덩이와 두꺼운 두개골, 경사진 이마 그리고 튀어나온 턱을 가졌다.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는 북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나갔다.


2. 아프리카인의 이주와 반투족의 이동

대략 18,000년 전 쯤부터 나일 계곡(Nile Valley)에 살던 인류의 무리들은 많은 양의 덩이줄기 식물(tuber)을 채집하였으며 15,000년 경부터는 야생하는 곡식을 다량 채집하였다. 1만년 전 쯤에는 지중해 남부 연안과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의 사바나 지역에서 아주 약간 다른 적응형태이지만 독특한 두 개의 채집수렵 문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열대우림 환경에 적응하려는 세 번째 문화가 중앙아프리카 열대우림 지역의 동부와 남부 가장자리 지역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주요한 세 개의 언어집단이 위의 12,000년 전 쯤 발현한 세 개의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중해 문화는 아프리카-아시아 어족(Afro-Asiatic language family)과 연관되어 있고, 동부와 남부의 사바나 문화는 코이산('찰칵'[click]이라는 의미) 어족(Khoisan language family)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열대우림 문화는 니제르-콩고 어족(Niger-Congo family)과 연결되어 있다. 네 번째 주요 언어집단인 나일-사하라 어족(Nilo-Saharan)은 아마도 사하라 사막에 지금보다 강우량이 훨씬 많았을 무렵인 4,000년에서 7,500년 전, 사하라 사막의 중부, 중남부, 그리고 남동부에서 번성했던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은 또 다른 문화와 연관될 수 있다.

20세기 초, 학자들은 현재 카메룬에서 케냐까지 광활하고 넓은 동부 지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쪽까지 걸쳐 살고있던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부족들의 언어에는 모두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은투(ntu)라는 접미어, 또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언어에서 바(ba)라는 접두어는 복수를 지칭했으므로 '반투(ba-ntu)'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뜻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농사법, 그리고 가축재배법의 근원과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는지가 20세기 중반의 중요한 의문이었다.

언어학과 인류학, 그리고 식물의 기원 연구에 근거한 한 가지 그럴듯한 이론이 추론적이긴 하지만 답이 되었다. 이 설명에 의하면, 3천여년 전 서부아프리카 사바나의 베누에(Benue)강 연안에 같은 혈통의 연장자들에 의해 지배를 받던 상당히 대규모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통나무 커누와 그물, 낚시바늘, 덫, 작살 등의 도구를 갖고 어업을 발전시켰다. 얌(yam)과 기름야자를 재배하고 염소를 기르며 반투어를 사용한 이 부족은 당시 중앙아프리카의 열대우림 지역 남쪽에 살던 소규모의 경작민들보다 가뭄이나 다른 재해가 발생했을 때 월등히 생존이 유리한 사람들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습득한 토기 굽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이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을 녹여 창, 화살, 괭이, 삽, 도끼 등을 2,500여년 전에 만들었다. 점진적인 사막화로 인해 사하라 사막의 농부들이 남하하여 기원전 2세기경부터 초기 반투어 공동체들은 현재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이 된 베누에-크로스(Benue-Cross)강의 발상지로부터 중앙아프리카 서부의 거대한 적도 산림 지대로 서서히 밀고 들어갔다. 다음세기가 되자  반투 개척자들은 숲 가장자리까지 도달했고 그 너머에 있는 광활한 사바나 초원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베누에(Benue)강 유역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자 이 반투어족 어민들은 남동쪽으로 이주해갔다. 콩고(Congo)강 연안에 도착한 후 이들은 잠베지(Zambezi)강을 따라 중앙아프리카로 퍼졌고, 서기 5세기경에는 초기 철기 시대의 반투어 사용 촌락들이 아프리카의 숨은 땅이었던 남쪽으로 퍼졌다. 기원전 6세기에는 "우레웨(Urewe) 도기"로 불리는 도기 유형과 관련 있는 철기 제작자들이 동부 아프리카의 대호수지역(동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호수 주변 지역으로 들어왔다.  

반투어 사용자들은 그들이 만난 코이산 언어 사용자들과 결혼하거나 정복하거나 쫓아내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점차 이주했고, 그러면서 아시아 얌과 바나나 재배법을 배웠다. 이러한 식물의 재배법은 약 1,800년 전 마다가스카르 섬을 지배한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o-Polynesian)족 선원들로부터 동아프리카로 전파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반투어 사용자들은 이주하여 대규모로 소를 기르기도 했다. 1,000년 전 쯤에는 대부분의 중앙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의 주민은 철기를 사용했고, 반투어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수렵과 채집으로만 삶을 영위하던 가난한 원주민들을 실제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반투 확장은 일반적으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언어는 물론 다양한 사회 경제적 제도의 보급과 동화를 포함하여 보다 미묘한 문화적 침입과 통합이었다. 이러한 반투 "이민"의 주요한 두 가지 특징을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동은 매우 느리고 매우 짧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확실히 큰 무리의 유목민들이 하나의 이동 흐름 속에서 함께 이동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소규모 친족 집단이나 동료 무리가 특정한 이동을 하곤 한다.

강조해야 할 두 번째 특징은 반투어 사용자와 아대륙에 거주하는 다른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 상당한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대부분은 아마 평화로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몰살보다는 동화가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은 양 방향으로 흘렀다. 반투어 사용자들이 일반적으로 우세했지만, 산(San)어 사용 사냥꾼의 독특한 클릭 소리가 반투어에 여럿 포함된 남부 아프리카에서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반투어 사용자들이 새로운 정치 경제 및 기술 관념을 어느 정도 비 반투어 사용자들에게 소개하였지만, 그 반대 현상도 발생했다.

같은 방식으로 많은 반투어 사용 사회들은 다양한 이웃의 부계 혈족제도를 받아들였고, 동부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쿠시트(Cushitic)어와 나일제어 사용자들의 연령 계급 제도에 기반을 둔 정치 조직을 받아들였다. 이주하는 동안 반투어 사용자들은 새로운 지역, 새로운 관념, 새로운 상황에 부드럽게 적응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뛰어난 적응성은 현재 발견되는 반투 아프리카의 여러 사회에서 삼림 경작자로부터 곡물 생산 제국 창립자까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탈중심화한 목축업자까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