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보리카] 한자리에 모인 외교관들. 아프리카광역

2015. 3. 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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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모인 외교관들

 

 

인접 국가들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외무부 보좌관인 Mohammad Badr Al-Din Zayed

지난 목요일 수단과 리비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대사들을 만났다.

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 세 국가의 대사들은 최근 시나이(Sinai)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장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대한 각국의 비판을 드러냈다.

이 회담은 테러를 직면하고 있는 이집트의 대처상황을 명확히 하고,

더 많은 외교적 노력을 펼치고자 이집트 외무부 장관 Sameh Soukry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아랍권 세 국가들의 외교 인사들은 테러리즘을 막기 위한 각 국가들의 전쟁에서 이집트를 크게 지원하고 있음을 언급하며,

테러리즘이 해당 지역의 안보에 위기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대사는 팔레스타인의 보안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에 의해 실행된 모든 사태들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집트 외교관은 이집트에 대한 수단과 리비아, 팔레스타인 등 3국의 지원에 감사하다는 뜻을 밝혔으며,

이집트가 자체의 보안 및 아랍 지역의 안보를 위해 그 역할을 다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유경 역

Egypt's Diplomat Meets With Ambassadors of Sudan, Libya, Palestine

 

 

Assistant Foreign Minister for Neighboring Countries' affairs Ambassador Mohammad Badr Al-Din Zayed received on Thursday the ambassadors of Sudan, Libya, and Palestine.

 

During the meeting, the three ambassadors expressed their countries' condemnation of the recent terrorist attack in Sinai.

 

The meeting comes in response of Foreign Minister Sameh Soukry's directives for more diplomatic efforts to clarify Egypt's steps to face terrorism.

 

The three Arab diplomats agreed that terrorism poses a challenge to the region stability and security, noting that their countries are fully supporting Egypt in its war against terror.

 

For his part, the Palestinian ambassador asserted that Palestine backs all steps taken by Egypt to protect its security.

 

The Egyptian diplomat appreciated the supportive stances adopted by the three countries towards Egypt, adding that Egypt would keep assuming its role in protecting its security and Arab region security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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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보리카] 세계은행그룹, 에볼라 퇴치를 위한 기금을 40억 달러로 올리다. 아프리카광역

2015. 3. 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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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그룹, 에볼라 퇴치를 위한 기금을 40억 달러로 올리다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의 위험성이 계속되자 세계은행그룹(World Bank Group)2014925일 목요일에

 그들이 지원한 금액의 거의 2배인 40억 달러를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에볼라의 피해를 많이 받은 국가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더 체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세계은행그룹의 지원으로 17억 달러의 새로운 자금이 생긴다. 925일 발표에 따라 세계은행그룹은

23억 달러를 긴급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자금으로 지원하고, 17억 달러는 중·장기 프로젝트 운영을 위해 지원할 것이다.

발표에 따르면, 세계은행그룹 이사회는 다음 주중으로

에볼라의 영향을 받은 모든 국가에 치료진과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자금 지원은 또한 보건 시스템을 향상 시킨다. 에볼라 피해 지역의 사회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간부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커뮤니티는 전례에 없었던 에볼라의 피해 규모와 긴급한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세계은행그룹 총재 김용씨가 말했다.

그는 현재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먼저 도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까지 보살피고 치료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더 강력한 의료 서비스 체계를 만들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금 지원으로 지역 사회 보건 노동자들의 교육을 확대시키고 필요한 물품과 장비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세계은행그룹은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을 포함하여 에볼라 피해가 가장 큰 지역에 23억 달러를 지원하고

비상시를 대비해 117천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말했다.

세계그룹은행, 세계보건기구(WTO), 국제 연합(UN), 미국, 세계 여러 국가의 파트너들의 지원은

병을 고치고 경제적인 문제와 의료 체계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추가 계획된 지원은 이전에 장기적인 도움과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할당해왔던 113천만 달러를 더 지원할 것이다.

새로운 지원은 의료 체계에 중·장기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17억 달러가 할당될 것이다.

에볼라는 1976년 발견되어 이전에도 발생했었지만 2014년 발생한 에볼라가 이전까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주예은 역

West Africa: World Bank Group to Increase Ebola Money to U.S.$400 Million

Following alarming evidence of the spread of the Ebola epidemic in West Africa, the World Bank Group on Thursday, September 25, 2014 announced that it will nearly double it's financing to $400 million to help the worst-affected countries address the emergency and build stronger health systems for the years to come.

This represents $170 million in new funding. With the September 25th announcement, the Bank will put $230 million toward the emergency response and $170 million for medium- and long-term projects.

According to a release, the new resources which the World Bank's Board of Executive Directors will consider in the coming weeks will be targeted at quickly increasing the health care workforce and purchasing needed supplies in order to bring care and treatment to every part of the affected countries.

The funding also is meant to build a more vigorous health care system because it will aim to train cadres of health workers to bolster care at a community level throughout the affected region.

"The global community is now responding with the urgency and the scale needed to begin to turn back this unprecedented Ebola crisis," said World Bank Group President Jim Yong Kim, who also spoke September 25, 2014 at a special session on the Ebola crisis at the United Nations.

He stated that the real challenge now is to bring care and treatment to the most remote areas as well as the cities and then to build a stronger health care system.

This funding, according to him, will help the countries start a massive scale up of training of community health workers and bring needed supplies and equipment.

Meanwhile, the World Bank Group previously announced that it was mobilizing $230 million for the three countries hardest hit by the crisis, including Guinea, Liberia, and Sierra Leone and a $117 million emergency response.

This support coordinated closely with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the United Nations (UN), the United States (US) and other international and country partners have assisted countries in treating the sick, cope with the economic impact and improve their public health systems. The additional planned support will make $113 million that had been earmarked in the previous package for long-term help immediately available for the emergency response. The new package will have $170 million allocated in medium- to longer-term assistance for the countries' health systems.

Thousands of lives have been claimed in the 2014 Ebola epidemic in West Africa than in all previous Ebola outbreaks joined since the discovery of the disease in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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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2013. 9. 14. 22:18


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이세정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 자체였던……

나일 강의 범람에서부터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까지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인간생활과 자연의 일체는 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이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생활 전반에 녹아 내린 것으로 그들에게는 삶이요, 그리고 곧 죽음이었다. 이집트 종교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겹친 복합 신들이 많이 등장하고 이집트인의 종교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많은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나라가 기본적으로 조그만 농업사회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신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통합되며 여러 신화가 만들어졌고 강한 세력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신들도 정리되었다. 크게 보아 헤르모폴리스, 멤피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 중에서 현재 카이로 동남쪽 교외 지역인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혹은 라)이 슈(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대지의 남신)와 누트(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 아홉 신이 9주신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를 낳게 된다. 호루스는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호루스의 부인인 하토르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그리스인들은 하토르 여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오 나의 태양이시여 – 호루스와 에드푸의 신전

 

이른 아침 우리는 에드푸에 정박했다. 크루즈에서 내려 처음 바라 본 에드푸의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보듯 평범하고 고요하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길거리에 널려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유적들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고 조용하지만 작은 언덕 위에 나일 강을 바라보는 에드푸에서 여유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드푸라고도 하는 이 도시는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 나일 강의 서쪽지역 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지금은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아폴로노스폴리스메갈레 (Apollonospolis megale)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의 행정수도가 위치했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설탕과 도자기의 도시이며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굉장히 친절하다. 크루즈 선에서 내려 선착장에 줄지어 서있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뜨거운 햇살 속이지만 바람은 청량해 기분이 상쾌하다. 앞에 마차 위에 매달려 가는 아이는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얼굴은 천진난만이다. 번잡하지만 알록달록한 색들로 가득 찬 시내를 지나니 드디어 호루스 신전의 입구이다.

 


(꼭지)

호루스 (Horus, Hr, Hru, Ώρος, Hōros)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서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이다. 고분 벽화에서는 호루스가 매의 머리를 쓰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 다양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매의 머리를 한 남성으로 표현되나, 호루미오스라고 불릴때에는 사자의 외관을 취하며, 하르마키스라고 불릴때에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후대에는 유아신(幼児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하며, 토트의 도움을 빌려 호루스를 몰래 출산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이시스의 무릎 위에 놓인 아기(하포크라테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병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성 게오르기우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호루스는 대기와 불을 상징하며, 그 색은 일반적으로 흑, 적, 백을 의미한다. 부친 오시리스의 복수를 완료한 호루스는 현세의 통치자가 된다. 따라서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역대의 왕들도 그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호루스는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라-호라크티를 시작으로, 여러 신들과 융합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를 상징하는 모양으로서 유명한 우제트의 눈이란 바로 호루스의 눈을 뜻하기도 한다. 이집트 항공의 항공기의 수직꼬리에는, 비행의 안전을 바라는 의미로 호루스의 심볼이 그려져 있다.

 

 

 

 


 

이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미 3세때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0여년 동안 여러명의 파라오들에 의하여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집트 관광청이 펴낸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이 신전은 2004년초에 보수공사와 관광객 편의시설을 갖추고 2.300년만에 다시 오픈한 것이라고 써있다.  에드푸 신전은 이집트에 남아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푸 사원에도 탑문이 있고 열주(列柱)가 있고 그 중심축에 본실을 두었으며 많은 조상(彫像)과 부조로 장식한 점은 신왕국시대의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시대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둥근기둥들이 채용된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에드푸 신전은 전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그래서 신전 곳곳에 호루스 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입구 양쪽에도 있고 제1열주실의 전면에도 두 개의 호루스 신의 석상이 서 있다. 매는 호루스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이집트인들은 하토르 여신이 새해 첫날에 남편이 있는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으로 외출한다고 믿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 신은 태생이 두 가지였다.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은 호루스신을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난 아들로 여겼지만, 멤피스 신화에서는 오시리스와 형제였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신을 ‘연하의 호루스’, 오시리스와 형제인 호루스신을 ‘연상의 호루스’라고 불렀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은 연상의 호루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연하의 호루스를 나타내는 상징들도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전 앞에 세워진 독수리 모습의 신인데, 이것은 숙부인 세트에게 복수한 연하의 호루스 신을 의미한다.

 

 

호루스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형태를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단일 신전으로서 신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추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의 신전에 가까운 신전이다. 신전 입구에서는 멀리 거대한 탑문이 보이며 그 옆 언덕에는 마을이 보인다. 발굴되기 전 호루스 신전은 흙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는 아직 흙으로 덮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신전 부속 건물들로 발굴 후에는 이 호루스 신전이 더욱 거대한 위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신전의 탑문은 이집트의 많은 신전들 중에서 탑문의 원형이 가장 깨끗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탑문의 벽화는 후대의 신전의 특징인 신화적인 내용이 담겨있으며, 이 신전의 주인인 호루스 신과 파라오를 묘사한 벽화로 한 많은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전 입구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신의 석상이 감시자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는 모습이 수 천년의 역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탑문을 들어서면 삼면이 원기둥 회랑으로 된 큰 안뜰을 만나게 되는데 원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원기둥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많은 건물들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프로레마이오스 왕조시대 신전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큰 안뜰을 지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위압적인 모습의 호루스신의 석상이 서있고 양쪽으로 ‘아침의 집’과 ‘책들의 집’이 있다. 탄생의 빛을 향한 첫 경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침이고 책들의 집에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파피루스로 만든 책은 없지만 이곳에서 저술들의 제목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원기둥에 적혀 있다고 한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면 정면으로 하늘로 가는 나룻배가 보관된 방인 ‘성자 중의 성자’ 를 볼 수 있고 그 주위로 여러 방들과 신비의 복도를 볼 수 있다. ‘성자 중의 성자’에는 성스러운 배가 중앙에 있는데,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을 사는 나라답게 나일강을 오가는 배를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벽화 또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호루스 신의 탄생에서부터 그가 어둠의 힘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에 이르기 까지 호루스 신화의 일화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저마다 고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방들이 이 ‘성자중의 성자’를 둘러싸고 있다.

 

 

수 천년의 세월 동안 나일 강을 바라보며 – 코옴보 신전

 

점심 식사 후 나일 강의 정취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 새 배는 나일 강의 서쪽 강안에 이르렀다. 코 옴보에 도착한 것이다. 꽤 큰 도시로 알려져있지만 그 풍경은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지역은 나일강 주변에서 농경지가 아주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코옴보 신전은 나일 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코옴보 신전에 올라 나일 강가를 바라보니 햇살에 비치는 강물의 반짝임과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신전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투트모트3세 때 건설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인 BC332~395년에 완전히 새롭게 개축된 것이다.

 

코옴보 신전은 지진과 나일 강의 홍수에 의한 피해로 많이 망가졌었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이후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우상숭배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기독교도(콥트 교도)들에 의한 파괴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상숭배 금지령 이후 이 신전은 폐쇄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1893년에 발굴이 시작되어 신전의 지붕을 덮고 있던 모래를 걷어내면서 신전의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오늘 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베크(Sebek), 또는 소베크(Sobek)는 악어가 신격화된 이집트 신으로, 나일 강에 의존하던 이집트에서 악어를 매우 두려워하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나일 강에서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이집트인들은 악어의 신 세베크에게 기도하여, 악어에게 공격 받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소망하였다. 세베크는 악어, 또는 악어의 머리를 한 남자로 묘사되었으며, 강력한 공포의 신이었다. 일부 이집트 창조 신화에서는 세베크가 세상을 창조하는 혼돈의 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고 묘사한다. 때때로 창조신의 모습으로 태양신 레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스 계통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콤 옴보 신전에 이 지역 토착신인 소베크 신과 함께 호루스의 변신인 하로에리스 신을 모시고 경배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군에 의해 건국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급은 이집트인들과 융화하는 정책을 펴서 자신들이 이집트에 완전히 동화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는데 세트를 처치하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 호루스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경배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라오가 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코 옴보 신전에 하로에리스 신과 소베크 신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은 틀림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 신전을 크게 개축한 이후일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콤 옴보 신전은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의 두 신에게 바쳐진 이중적인 성격의 신전이다. 소베크 신은 이집트의 토착 신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고 하로에리스로 변신한 호루스 신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는 신이라고 볼 때에 두 신간에 어느 신이 우월하거나 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코 옴보 신전은 철저하게 대칭구조를 유지하고 양쪽에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을 대등하게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의 기둥모양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흔히 그레코로만 왕조라고 하는데 이 기둥들에서는 코 옴보사원을 증축하고 개축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들의 건축에도 그리스 양식을 많이 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악어가 많아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 소벡(Sobek)과 매의 머리를 가진 신 호루스(Horus)를 같이 모셨다는 이 신전은 BC 2세기경의 벽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홍수로 많이 깎이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닳음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해 난 이곳이 좀 더 살갑게 느껴졌다. 한산한 관광객들도 그러하고. 소박하다고 해야 하나. 나일 강가의 고지대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위치한 장엄한 프톨레미 신전은 해질녘에 특히 경외심을 자아낸다. 훌륭한 의사였던 하로에리스 신과 악어의 신 소벡을 합배한 이 신전은 이중으로 된 입구, 홀, 지성소 등으로 유명하다. 부조가 새겨진 벽에는 고대의 수술 기구, 골 절단기 및 치과용 도구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근처에서 발견된 세 마리의 악어 미라는 현재 하토르 예배당에서 보관 중이다.

 

나일강의 멀리서부터 거대한 탑문과 원기둥들이 보이는데 마치 나일강 뱃길을 감시하는 망루를 보는 듯하다. 탑문은 세베크를 위한 입구 하나와 호루스를 위한 입구 하나가 있는 거대한 문을 구성하고 있다. 호루스 신전의 탑문과 벽화들은 오랜 시간 흙에 묻혀 있었으며 그 훼손 정도가 다른 신전들에 비해 심하다. 신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큰 우물이다.

 

이 우물은 악어로 상징되는 세베크 신이 들어오는 통로로 성장의 물이 나타나 에너지의 바다에서 직접 유입되는 세례용 액체를 제공했다고 한다. 코옴보 신전의 본 건물에 들어오면 바로 원기둥이 늘어선 홀이 보인다. 이 홀에는 정면에 문이 두개있고 호루스 앞에서 파라오가 호루스와 토트로부터 이중세례를 받는 것이 특징이다. 원기둥의 상태나 양식을 보면 그리스 건축풍이 많이 가미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열주실의 원기둥들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벽화가 곳곳에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인 그리고 이집트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여걸. 그러나 그러한 고정된 몇몇 이미지들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대부분의 이집트 파라오들이 마케도니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계로 그리스어만 했던 전통을 벗어나 직접 이집트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이집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첫 번째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다. 프 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도 흐려지는 벽화처럼 조금씩 역사 속으로 침식되는 듯해 난 또 다른 이집트의 여걸 핫셉수트와 함께 세월의 무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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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이집트

2013. 9. 14. 22:06

 

카이로, 이집트

 

-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잃어버린 역사 – 제데프레 왕의 재조명

 

 

카이로 하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과 거의 연관이 없으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사실 카이로 지역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나일강 삼각주에 속하는 습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약 15세기 전인 642년에 이집트를 점령한 아무르 이븐 알 아스가 군대의 주둔지 푸스탓(Fustat)을 건설한 것이 카이로의 출발점이다. 카이로는 카타이 시대와 파티마 왕조, 살라딘의 아이윱 왕조 등을 거쳐 마믈룩 왕조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1517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속주가 되면서 영광의 빛이 바래게 된다. 잠시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던 카이로는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카이로는 19세기 무하마드 알리 왕조 아래에서 근대 도시 카이로가 정비되면서 오늘날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비록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기자 평원은 고대 이집트의 중심이였고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피라미드들이 바로 이 피라미드들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기원전 25세기에 150여 년 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집트 제 4왕조의 유물이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 인해 대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카프레 왕, 손자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들이 이에 속한다.

 

대피라미드는 높이가 148m, 밑변 길이가 233m에 달하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조금 작다.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라미드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으며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 다소 급하게 건설된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까?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피라미드가 파라오들의 무덤이며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력과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건축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안에서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된 바가 없고, 조세르 왕의 경우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기의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라면 굳이 하나 이상을 지을 이유가 없다).

 

 

피라미드 건설의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은 바로 나일강의 범람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로부터 비롯된 나일강의 범람은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이집트의 번영을 가능케 했지만, 범람했던 계절에는 농토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농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수많은 농민들의 일터와 생계수단을 앗아갔다. 따라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한 피라미드의 건설을 통해 실직 상태인 농민들에게 일터와 임금을 제공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피라미드의 건설에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일단 이 엄청난 건축물들이 45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특히 쿠푸 왕의 대 피라미드에는 2톤 이상의 돌들이 무려 230만 개 이상 사용되었는데 이 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까지도 어떻게 당대의 기술로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피라미드의 각 꼭짓점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돌들이 아주 정교하게 쌓여져 있어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각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면의 모든 돌들이 약간 중앙을 향해 기울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만약에 피라미드가 붕괴되더라도 안으로 붕괴되도록 설계하여 견고함을 높이기 위한 건축기술이었다.

 

피라미드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로, 영화나 책에서 보여지는 피라미드의 건설 현장에서는 노예들이 착취를 당하며 노동을 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던 기원전 25세기의 고대 이집트에는 노예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꾼들은 매일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쌓아야 했기 때문에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좋은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석공과 건축가, 기술자들 밑에서 일을 했고, 피라미드 주변에는 일꾼들의 마을이 존재했다. 일꾼들의 마을이 있던 터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로 기록된 석판에서 일꾼들의 업무일지가 발견되었는데 일을 나오지 못한 이유 중에 과음과 숙취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꾼들이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역사 - 네 번째 피라미드와 제데프레 왕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네 번째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자의 피라미드는 모두 제 4왕조의 파라오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당시는 피라미드 건설의 전성기였고, 모든 파라오들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자신의 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제 4왕조에서 왕위에 올랐던 파라오는 쿠푸 왕과 그의 아들 제데프레 왕, 카프레 왕, 그리고 쿠푸 왕의 손자 멘카우레 왕으로 총 4명인데, 이 중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만이 기자 평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데프레 왕은 왜 유일하게 기자에 피라미드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집트 제 4왕조 계보 자료)

 

제데프레 왕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그는 악질적인 파라오로 묘사되어왔다. 에밀 샤시냐 등 초기 이집트 학자들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은 왕위 계승자이자 형인 카와브 왕을 죽이고 그 직후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형수와 결혼하는 등 8년 동안 파렴치한 통치를 하다가 이복동생인 카프레에게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에서 나왔다.

 

아부라와슈의 폐허에서 제데프레 왕의 조각상들은 모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조각상에 영혼이 깃들어 산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조각상을 부순다는 것은 내세에서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며, 이는 극악한 범죄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에 초기 이집트 학자들은 제데프레 왕이 그가 저지른 극악한 범죄들로 인해 살해되고 그의 조각상들마저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이 기자 평원이 아닌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것 또한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했다. 위와 같은 근거들을 토대로 제데프레 왕은 역사에서 악독한 왕으로 기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와 새로운 증거들은 이 주장의 정당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붕괴되어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기자 평원으로부터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 아부라와슈에 있었다. 아부라와슈는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은 허가되지 않지만 소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4번째 피라미드의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 제데프레 왕이 자신의 피라미드의 위치를 아부라와슈로 정한 것을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현대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했는데 재임 기간 내에 완성을 해야 했기 때문에 크기로 승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데프레 왕은 짧은 시간 내에 높은 피라피드를 짓기 위해 이미 120m 높이의 아부라와슈 언덕의 꼭대기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재까지 가상으로 복원된 자료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68m 높이에 120m의 언덕 높이를 더해 아버지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았으며, 12m의 아스완 화강암을 토대로 매끈한 석회암과 호박금을 씌운 정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쿠푸 왕이 석회암보다 훨씬 단단한 화강암을 피라미드 내의 내실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제데프레 왕은 최초로 화강암으로 피라미드의 외벽을 건설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과 달리 화강암은 나일강 하류 아스완으로부터 960km 뱃길을 따라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화강암의 사용은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이러한 화강암을 건물 외벽에 사용했다는 것은 제데프레 왕의 강력한 힘과 통치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최근 기자 평원에서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 또한 제데프레 왕의 삶을 재조명한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서있는 스핑크스는 원래 카프레 왕의 조각이라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모든 조각상에는 턱수염이 달려있고 머리 장식에 주름이 없는데 반해 스핑크스에는 턱수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장식에 주름이 존재한다. 즉,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조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선이 스핑크스를 우회하는 것을 보면,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누구의 조각상일까?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스핑크스의 얼굴은 쿠푸 왕의 작은 조각상과 가장 닮아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만, 쿠푸 왕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쿠푸 왕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어서 대피라미드의 건설에만 집착한 폭군으로서, 다른 공사에 자원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고, 스핑크스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 스핑크스는 쿠푸 왕이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카프레 왕 이전에 이미 완공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은 단 한 명,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아부라와슈에서 출토된 스핑크스의 얼굴과 사자의 몸통부분 조각상이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 쿠푸 왕의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옆 구덩이에서 발견된 신성한 배에서도 제데프레 왕에 대한 새로운 진실이 밝혀졌다. 신성한 배의 용도는 사카라의 상형문자에 설명되어있는데, 이 배의 용도는 파라오의 내세로의 편안한 여행을 위함이다. 쿠푸 왕에게 이 신성한 배를 선물한 사람의 이름은 아직도 구덩이에 쓰여있다.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추가적으로, 제데프레 왕이 형인 카와브 왕을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왕위 계승자였지만 계승을 하지 않은 카와브 왕의 딸인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제데프레 왕의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만약 제데프레 왕이 카와브 왕을 죽였다면, 카와브 왕의 딸이자, 다음 계승자였던 메레산크가 아버지를 죽인 자의 이름을 자신의 무덤에 기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인 쿠푸 왕을 조각한 스핑크스를 건설하고 아버지의 평안한 사후세계를 위해 신성한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발견된 증거를 고려한다면, 제데프레 왕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불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념한 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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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C%9D%B4%EB%A1%9C

2) History Channel, “The Lost Pyra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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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프롤로그

2013. 9. 14. 21:58

 

이집트 프롤로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찬란한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이집트는 그 화려한 문명과 수많은 유적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방대한 이집트의 역사를 몇 페이지 안에서 전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이집트를 풀어내기에 앞서 간략히 이집트의 역사 흐름을 살펴보자.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고왕국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 나르메르(혹은 메네스)가 상·하 이집트로 나누어져 있던 이집트를 통일하고 수도를 멤피스로 정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라미드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고왕국시대 제 3왕조 2대1)군주인 조세르가 사카라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한 때이다. 이후 제 4왕조 때에는 본격적으로 피라미드 건설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인 기자의 세 피라미드가 이 시대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영원히 강한 나라는 없다2)는 말이 있듯이 6왕조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집트 고왕국시대도 기울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인간이자 신인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약화되고 중앙집권 체제가 흔들리면서 이후 7~10왕조는 혼돈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혼란은 11왕조의 멘투호텝 2세가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이집트가 재통일된 시기를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 사이의 중왕국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힉소스족의 침략으로 인해 16왕조와 17왕조의 이집트에는 다시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다.

 

 

신왕국시대는 아모시스 파라오가 힉소스족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수도는 테베(지금의 룩소)로 거대한 신전들과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아메노피스 1세(기원전1526~1505)때 중앙권력이 회복되었고 이집트의 영향력이 유프라테스강까지 확대되었다.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자 피라미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왕가의 계곡에 무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자 파라오로 유명한 하셉수트 여왕도 신왕국시대의 파라오였는데 하셉수트 여왕의 그늘에 가려졌던 아들 투트모스 3세가 하셉수트 여왕에 대한 복수로 그녀와 관련된 유적들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로 죽고 나서 궁중 감독관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장군 호렘헵이 장교 출신의 대신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이 사람이 람세스 1세가 되었고 19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람세스 2세가 등장했다.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람세스 9세로 이어지는 신왕조의 역사는 민란으로 인해 다시 혼란에 빠지면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를 후기왕국시대라고도 한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수많은 왕조와 파라오로 이어지던 이집트의 역사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고 이집트가 로마에 병합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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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2013. 9. 14. 21:47

 

아스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상류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집트의 남쪽 끝 도시, 아스완이 보인다. 이집트의 큰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스완도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나일강의 동쪽 강가에 큰 도시가 들어서 있고, 서쪽해안으로는 사막이 보인다. 나일강이 얼마나 넓은지 그 위에 몇 개의 큼지막한 섬들이 있다. 섬들에는 문화유적은 물론이고, 수목원, 박물관, 독특한 누비아인 마을까지 볼거리도 각양각색이다. 나일강 위에는 낮잠을 즐기는 듯 물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전통배 펠루카들이 둥둥 떠다닌다. 수도와 먼 이집트의 끝부분이어서인지, 아스완은 북적북적대던 관광객들이 많이 줄어들어 한가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수도와 멀고 한적해 보이는 이 도시는 얼핏 변두리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렇게 밋밋한 도시는 아니다. 아스완은 그 역사가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도시이다. 이집트의 국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고왕국 시절부터 군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아스완은 남쪽의 이웃나라 누비아1)와 바로 인접하여 때로는 지배하고, 때로는 지배당하기도 하며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쪽 나라에서 온 상인들에게 아스완은 이집트로 들어가는 입구도시였다. 그래서 아스완에는 예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각종 물품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발달했다. 아스완에서 상업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는 그 이름에 확실히 나타난다. 과거에 이집트에서는 아스완을 고대 이집트어로 ‘무역’이라는 의미의 스웨넷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아랍어로 ‘시장’을 뜻하는 아수안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아스완이라고 불린다. 또한 아스완은 좋은 돌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와 다양한 조각품들에 쓰이는 화강암을 공급하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다.

 

아스완의 도심은 지금 대부분 나일강 동쪽 변에 위치하지만, 옛날 아스완에서 가장 발달했던 곳은 강변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옛날 아스완의 중심지는 나일강 위 가장 큰 섬인 엘레판티네섬이었다고 한다. 이 섬은 고대도시 ‘아부‘가 있었던 곳인데, 아부는 고대 이집트어로 코끼리와 상아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섬 이름이 상아라니! 섬에서 상아시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마치 제주도를 ’감귤‘이나 ’한라봉‘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집트의 끝이면서 입구이기도 했던 아스완에 있던 섬 도시 아부. 그 역사는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나르메르가 지중해에서부터 아스완까지 아우르는 통일 이집트를 건설했던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기원후 300년까지 약 3300년의 긴 세월동안 아부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아부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할 때 밀려오는 물의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부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인 크눔을 숭배하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크눔신은 초기 이집트 신들 중에 하나로,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이다. 처음에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이었으나 나중에는 생명을 창조하는 신으로 섬겨졌는데, 그 이유는 나일강의 물이 매년 범람하여 주위의 땅에 비옥한 흙을 실어다 주고, 건조한 땅을 적셔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크눔은 물레에서 진흙으로 아이들의 몸을 빚어 어머니의 자궁에 넣어놓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이들을 점지해주시는 삼신할머니와 비슷한 일을 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부의 여인들도 크눔신에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까. 크눔신을 믿는 종교의 세력은 아부의 역사와 함께하며 성장했고, 아직도 엘레판티네 섬에는 크눔신의 신전과 크눔신으로 여겨졌던 신성한 양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이집트에도 전파되면서, 고대 이집트 신들은 점점 버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크눔신을 섬기던 도시 아부도 쇠퇴하여 아스완의 중심은 동쪽 강변으로 옮겨가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엘레판티네 섬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볼거리도 많다. 옛날 아부의 원형을 간직한 유적들과 멋진 아스완 박물관, 다채로운 누비안 마을은 아스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들이다. 먼저, 아스완 박물관은 엘레판티네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가니 방 하나에 따로 전시되어 있는 양의 미라와 돌로 만든 관이 보인다. 이 양은 앞서 말한 크눔신과 관련된 신성한 양이라고 한다. 박물관의 중심부로 가면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에서 발굴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옛날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품, 무기, 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물들은 유리진열장 안에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설명까지 친절하게 되어있다.(비록 영어이지만.) 이제 박물관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슬쩍 빠져나와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신기하게도 정원은 고대 아부 유적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에 tm위스와 독일에서 아부 유적들을 발굴하기위해 팀을 파견했고, 발굴팀은 기원전 3000년에서부터 기원후 14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아스완의 도시 중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스완 댐이 있다. 이 댐은 외관이 썩 멋지지 않아 댐 애호가들에게서도 별로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나일강을 통제하고 싶다는 이집트인들의 강한 바람이 담긴 의미심장한 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농경지에 농사를 지어 살아왔는데,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댐이 지어지기 전에 이집트인들은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은 일정치 않아서 범람이 잘 된 해는 풍작이었지만 반대로 범람이 적었던 해는 손 쓸 도리없이 흉작이었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어 세월이 지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의 부족현상이 심해졌다. 건축기술이 발전하여 댐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이집트는 대규모의 댐건설에 착수했다. 1898년에 영국의 건축가 윌콕스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902년에 완성된 것이 아스완 로우 댐이다. 그 후 한 차례의 증설 공사에도 불구하고 아스완 로우댐이 꽉 차자, 이집트에서는 7km 상류에 댐을 하나 더 짓기로 한다.

 

이리하여 지어진 것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기존의 로우댐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규모의 공사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자금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지만, 소련에게 무기를 조달받은 것을 계기로 지원이 끊긴다. 결국 이집트는 소련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하이댐 공사에 착수했고, 10여년의 공사 끝에 1970년 아스완 하이댐이 완공된다.  아스완 댐이 지어진 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의 이름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호가 되었다.

 


아스완 댐의 건설 후 나일강을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농업용수 공급과 농경지 확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수력발전도 가능케 하여 주변 도시의 전기공급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댐 건설 후에는 나일강에서 자연적으로 공급되던 풍부한 미네랄이 댐안에 쌓여있을 뿐 밖으로 나가지 않아 비옥하던 농경지가 점점 불모지로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 바다에서는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나세르호에 의해 원래 그 지역에 있던 문화 유적들은 이제 영영 가라앉아 버렸다.

 

아스완 댐의 건설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침수지역에 살고 있던 누비안인이었다. 그들의 마을이 호수 속에 잠겨버리자 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아스완, 콤옴보 등지에 새로 마을을 지었다. 앞서 말한 엘레파티네 섬에 있는 누비안 마을도 그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침수지역에 있던 문화유적들 중 아부심벨 같은 중요한 유적들은 유네스코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구해낼 수 있었던 다른 유물들은 아스완의 누비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아스완에서 누비안 마을을 구경하고, 누비안 인들이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아스완 댐 건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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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비아(Nubia)는 이집트 남부의 나일강 유역과 수단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누비아 지역 대부분은 수단 영토에 있으며, 1/4 정도만 이집트에 속한다. 고대에 누비아는 독립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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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응고롱고로 + 시미엔 프롤로그

2013. 9. 14. 21:29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 시미엔 프롤로그

 

이번 여행을 하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찬란한 문명과 함께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수려한 자연경관이었다. 초원이가 가고 싶어한 세렝게티 초원과 지구에서 가장 큰 분화구인 응고롱고로에서의 사파리 체험은 왜 전세계 여행자들이 그토록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꿈꾸는지를 알려주었다. 대자연의 광활한 초원에서 오랫동안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온 동물들을 보며 느낀 경외감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아니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그곳에서 우리가 대자연 앞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시미엔산은 탄자니아의 국립공원과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으로 우리의 눈길을 붙잡았다. 해발 2000미터의 고원에 세워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사미엔. 트래킹 내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장엄한 골짜기와 기기묘묘한 봉우리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독특한 희귀동물들은 아프리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야생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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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라 –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2013. 9. 14. 21:28


사카라 –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세계 4대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자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는 그 이름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나에게는 또한 이집트 장군과 속국 누비아 공주의 사랑을 다룬 오페라 ‘아이다’의 배경이었던 아련한 로맨스의 나라이다. 그렇지만 역시 이집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나일강변 너머 사막에 펼쳐진 피라미드 유적이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불리며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미스테리에 쌓여있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피라미드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과연 언제일까? 그 해답은 ‘죽은자들을 위한 도시’인 사카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일강변에 위치한 사카라는 드넓은 피라미드 단지가 있는 곳이다. Saqqara라는 지명이 죽음의 신 Sokar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오랫동안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였다. 파라오 제1 왕조 시대부터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 동안 왕과 귀족들의 무덤을 건설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피라미드 단지와 세라피움 신전등 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끄는 곳이니 그 이름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전통적인 무덤양식이었던 한 층의 마스타바를 6층으로 쌓아올려 처음으로 피라미드의 형태를 보였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사각뿔형태의 피라미드는 이것이 발전한 형태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최초의 피라미드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석조 건축물이다. 기원전 27세기에 세워진 건축물이 4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 까지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파라오의 절대권력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요즘의 이집트는 민주화 혁명의 물결이 거세지만 이집트 고대문명의 정수이자 파라오 권력의 표상인 피라미드는 꿋꿋이 남아 현대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엄청난 건축물을 만든 당시 사람들의 노고가 떠오른다.

 

반만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은 파라오 조세르와 그의 재상 임호테프였다. 조세르는 고왕국 제 3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조세르의 세기’라고도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빛나던 시기를 이끌었던 파라오이다. 재상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옥새를 담당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위관료이자 천재적인 건축가였으며 의술과 문학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건축가이자 주술가·예언자이면서 의술과 천문학에도 뛰어났던 그를 이집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평가하는 것은, 수천 년을 앞선 임호테프에게 오히려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임호테프라는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면 아마 그것은 바로 영화 미라에서였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후대에 길이 존경받는 명재상이었던 임호테프를 영화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추악한 괴물 ‘이모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치 헐리우드/일본이 한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서 이순신장군을 탐욕스러운 망령으로 묘사한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모텝이라는 인물의 설정이 서구인들의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오만에서 나온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파라오 조제르 하의 고대 이집트는 통일이 굳건해지고 사회의 진보가 이루어 졌으며, 종교와 예술분야에서도 전환점이라 할 만한 시기였다.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건축물은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집중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되는데, 이집트의 고왕국들과 중국의 진나라와 같은 거대한 왕조는 권력과 자원의 많은 부분을 왕의 무덤을 건설하는데 사용하곤 했다.

 

조세르왕의 계단식피라미드만 하더라도 한 층의 높이가 10여 미터로 총 높이가 65미터에 달한다. 이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진시황릉 사례-피라미드를 거대한 건축물로 정의한다면 진시황릉도 이에 해당하는 고대의 건축물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비합리적이고 전제적인 정치의 표상으로 보이는 이러한 대규모의 무덤 건설이 고대왕조에서는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고에서 파라오는 곧 태양신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태양이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은 파라오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만들어 태양신 파라오의 영원불멸을 돕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불멸로 가는 위대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무덤을 건설하는 것은 왕의 궁전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혹은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피라미드는 죽은 자가 영원히 안식을 취하는 공간인 동시에 부활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는 별과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밑변의 방향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도의 건축학적, 천문학적 지식에 기반하여 건설된 또다른 세계였다.

 

 

피라미드는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을 이집트로 불러오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시계바늘을 앞으로 돌려보면 바로 이렇게 찬란한 문화유산이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기제가 되기도 했다. (이집트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이집트에 대한 세계 여러사람의 관심이 컸지만 이는 한편 이집트로의 침략을 가속화하기도 했다)피라미드의 도굴과 유물의 해외반출은 힘을 잃은 국가권력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때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제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집트 인이 아닌 프랑스 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였다. 프랑스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한 그는 사카라의 세라피움 신전을 발굴하였는데   발굴한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금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문화재의 해외반출은 식민지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제 식민지시기는 물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수만점에 이른다.

 

 

문화재의 유출은 정부 관리나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이들은 문화재를 보존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타국의 문화재를 자신의 나라로 가져간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의 문화재를 현지에서 보호하려했던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노력은 선구적인 것이었다. 이 이름이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고 생각하던 중, 오페라 ‘아이다’가 그가 쓴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오페라는 바로 이 오귀스트가 이집트에서 남녀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쓴 소설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졌던 저녁, 이집트의 석양은 피라미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하늘로 상승하는 수직의 피라미드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수평선과 대비되며 우리의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게 하였다. 사카라는 망자를 위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기에 피라미드는 무덤인 동시에 영혼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피라미드와 그 이야기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설레임을 때로는 슬픔을 심어준다. 사카라에서는 죽은자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참고문헌

 

정규영, <<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르네상스, 2004.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임헌 옮김,<<위대한 파라오의 이집트>>, 예술시대,

 

인터넷 사이트

http://www.cyworld.com/theegypt/3661890

http://travfotos.tistory.com/12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145

 

다큐멘터리

-윤기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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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2013. 9. 14. 21:25

 

멤피스


전날 밤, 룩소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다시 카이로로 돌아온 우리는 아침 일찍 카이로의 남쪽에 위치한 멤피스로 향하였다. 멤피스로 가는 길에는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당나귀는 성격이 온순하고, 소나 말보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당나귀를 주로 타고 다닌다고 한다. 길을 가는 사람들 뒤로 약간은 허름한 건물들과 도로가 보였다. 드디어 멤피스에 도착했다.

 

 

 

 

그림 1 프타 신의 모습

 

 

고대 이집트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이고, 한 때는 파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할 정도로 번성했던 멤피스지만, 길가에 드문드문 있는 옛 신전이나 왕궁의 흔적만이 그런 과거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제 1왕국 때부터 상․하로 통일된 이집트 고왕국의 기원전 2200년까지의 수도였다. 멤피스라는 이름은 옛 이름은 고대 이집트어로 ‘피라미드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라는 뜻으로, 사카라의 남부에 있는 고왕국 제6왕조의 페피 1세의 피라미드의 이름인 멘네페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흰 성벽’이라는 뜻의 이네브 헤즈, 상,하 두 이집트의 지배를 상징한 ‘두 땅을 묶는 곳’이는 뜻의 앙크 타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멤피스는 창조신 프타 신앙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멤피스에는 왕궁 이외에도 프타 신전이 곳곳에 있었는데, 4세기 초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밀라노 칙령)하고, 데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 이외의 신앙을 금지시켰고, 이 때 멤피스의 프타 신전도 파괴되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프타는 ‘우주의 건설자’라는 뜻으로, 다른 곳에서와 달리 멤피스에는 프타를 중심으로 한 천지창조 신화가 있었다.

 

이 신화에 따르면 프타가 그의 심장과 혀로 아툼을 비롯하여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을 만들어 천지를 창조했으며, 태양신 라의 눈물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프타의 부인은 파괴의 여신인 세크메트이며, 아들은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네페르툼인데, 이들은 ‘멤피스의 삼신’이라고 불린다. 프타의 모습은 등에 육체적인 안녕을 상징하는 메나트를 메고 손에는 생명을 나타내는 앙크(☥)와 부활을 상징하는 제드 장식의 지팡이를 들고 머리를 깎은 미라로 표현된다. 

 

 

지금의 멤피스에는 프타 신전 유적의 입구에 있는 조각 박물관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곳에는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상은 원래 누워있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3천 4백여 년 전에 람세스 2세가 프타 신전을 확장하면서 만든 것으로 그 당시 신전 앞에는 2개의 거상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 멤피스의 조각 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까지 카이로의 람세스 중앙역 광장에 서 있었다.

 

이 거상은 대기오염과 자동차, 열차의 진동으로 훼손될 염려가 있어 2008년에 대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조각 박물관 안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은 왕관의 일부와 무릎 이하의 한쪽 다리와 한쪽 팔꿈치가 떨어져나가고 늪에 박혀 있던 것을 1820년에 발굴하여 이곳에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한 개의 큰 석회암을 깎아서 만든 이 석상은 원래 그 길이가 15m였다. 지금은 파손되어 12m만 남아 있으며 그 무게가 80t이나 된다.

 

박물관 앞뜰로 나오면, 람세스 2세의 입상과 여러 가지 조각들, 그리고 멤피스의 스핑크스와 멤피스의 신수인 황소 아피스의 해부대가 있다. 멤피스의 스핑크스는 기자의 스핑크스 다음으로 큰데, 기자의 것보다 얼굴부분이 훼손되어있지 않아서 스핑크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림 2 성스러운 소 아피스

 

 

설화 석고로 만들어진 아피스의 해부대는 프타 신전에서 길러졌던 황소 아피스의 미라를 만들 때 사용된 것이다. 아피스는 죽은 왕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의 신인 오시리스가 되었다고 믿어졌으며, 미라는 오시리스의 자격으로 사카라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멤피스의 신수로서 아피스는 '프타의 대리자'로 숭배되었고, 또한 풍요와 힘을 나타내는 왕권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피스는 프타 신전 내의 ‘아피스의 집’에서 길러졌으며, 화려한 치장을 하고 굉장히 성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아피스의 칭호는 아무 황소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피스를 찾기 위해 사제들이 각지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죽은 아피스가 환생되었음을 입증하는 특별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송아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 신체적 특징은 29개의 모양의 표식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이마에 하얀 역삼각형 무늬가 있고, 어깨에는 독수리 모양의 하얀 무늬가 있으며, 엉덩이 근처에는 매와 비슷한 무늬가 있으며, 혀에는 풍덩이를 닮은 무늬가 있는 등의 특징들이다. 멤피스의 사제들은 신체적 특징을 가진 송아지를 찾으면 '아피스의 집'까지 개선행진을 벌였다. 이러한 아피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까지 계속되다가 세라피스 숭배로 바뀌었다.

 

이처럼 이집트 신화에서는 다양한 동물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선사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송아지를 보살피는 어미 소의 자애로움, 악어의 강건함, 사자의 사나움 등과 같은 동물들이 각기 가진 성격에 대해 찬탄이나 공포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인간과 결합시켜 신격화 하였다. 동물을 숭배하는 것은 신앙의 하나가 되어가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들과 관련된 동물을 신전에서 사육했으며, 이들 동물은 자유로이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태양, 대지, 물의 신 세베크를 상징한 악어는 크로코딜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연못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고, 지혜의 신인 토트를 나타내는 따오기는 헤르모폴리스에서 사육되었다. 환희와 사랑의 여신을 나타내는 고양이는 바스트(Bast) 신전 내에서 돌아다니게 하고, 신성한 황소 아피스(Apis)는 멤피스에서 길러졌다. 아피스 황소처럼 이 신성한 동물들은 죽은 후에도 신의 대접을 받으며 사후에는 미이라로 만들어졌다.

 

세베크 악어와 같은 경우는 사제들이 그 악어의 앞다리와 귀를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으며, 성역에 모인 순례자들이 악어에게 최고급 먹이를 먹였다고 한다. 그 악어가 음식을 받으면 순례자에게 자신의 자비를 베푼다는 표시였으며, 사람에게는 나일강에 뛰어들어 악어의 먹이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되었다고 한다는 것에서 그 당시 동물숭배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물이나 자연에 대한 숭배는 자연환경에 지배되어 그 뜻대로 생활활 수밖에 없었던 원시사회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다. 멤피스에서 아피스 황소에 대한 숭배가 그러했듯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동물숭배 또한 점차 사그라졌다.

 

 

참고문헌

 

손주영•송경근, 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pp 31-34

http://ko.mythology.wikia.com/wiki/%EB%A9%A4%ED%94%BC%EC%8A%A4_%EC%8B%A0%ED%99%94

 


이태원, 이집트의 유혹, 기파랑, 2009, pp 163-169

http://thaiscampos.suite101.com/animal-worship-in-ancient-religions-a198171

http://en.wikipedia.org/wiki/Animal_worship

http://bipedsandbrutes.wordpress.com/2011/11/03/the-origins-of-animal-worship/

http://cafe418.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yMaB&fldid=I0Zm&contentval=0000czzzzzzzzzzzzzzzzzzzzzzzzz&nenc=y8McCQFicrvxGHM_CDtQew00&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http://www.tournile.com/focus/myth/why.php

http://blog.ohmynews.com/greenyds/248851

http://blog.daum.net/holysitesearch/35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xhana&logNo=130037299903&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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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2013. 9. 14. 21:14

 

룩소르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나일 강을 따라가면 아주 먼 옛날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훑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긴 나일 강처럼 긴 이집트의 역사를 가진 그 곳, 룩소르. 룩소르가 바로 이집트의 오래된 사진첩이다. 룩소르는 이집트 역사 중에서도 신왕국시대의 중심무대였다. 룩소르는 이 시기에 ‘테베’라고 불리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많은 자취를 남겼다.

 

이집트의 왕을 뜻하는 ‘파라오’라는 명칭도 테베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가 시작될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를 태양신 ‘라’의 후손이라 믿었고 신처럼 존중되었다. 신과 같다고 여겨지는 파라오야말로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었고 종교상의 주체였다. 파라오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눈으로 드러나는 어떤 실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파라오는 건축물들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었다. 자신의 권력이 강할수록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이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들은 파라오의 명성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자부심을 북돋아 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집트라는 국가는 아주 강하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집트 건축물들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제일 먼저 손에 꼽히는 점이 엄청난 규모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그 거대한 규모를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억’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룩소르 동쪽 지역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인데, 이 신전은 역사상 가장 넓은 종교건축물이다. 유럽의 어떤 종교건축물이라도 카르나크 신전의 중앙홀에 쏙 들어갈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가 감히 상상이 되는가?

 


입이 떡 벌어지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집트 건축물들은 대부분 종교 건축물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여러 동물을 신으로 숭배했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관은 건축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원한 삶을 원했던 이집트인들은 그러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돌처럼 단단한 재료를 이용해서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이 특징은 파라오의 장제전에서 알 수 있다.

 

룩소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주변 경관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호평 받고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깎아 내지른듯한 돌산의 절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뒤쪽 돌산과 비슷한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배경과 건축물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커다란 돌을 깎아서 만든 하나의 거석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계 없이도 돌을 조각할 수 있는 기묘한 방법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능통했기에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건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제전이란 파라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혼을 제사하던 곳이다. 하트셉수트 여왕 역시 돌로 장제전을 건축함으로써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상징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크기도 엄청나다. 왕도 아닌 여왕의 장제전을 왜 이렇게 크게 지었나 생각할 수 있지만 하트셉수트 여왕은 엄연히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였다.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마지막 여성 파라오라면 하트셉수트는 이집트의 최초 여성 파라오이다.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죽고 그녀는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1)남편인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 아이가 없었던 하트셉수트는 왕위를 잇지 못했고 후궁이 낳은 아들 투트모세 3세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22년간 투트모스 3세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강한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수염을 붙이고 파라오 옷을 입는 등 남성 파라오처럼 보이게 했다.

 

남성 파라오의 모습을 한 채 파라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많은 동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내용의 벽화들이 주로 새겨져 있는 것을 통해서도 하트셉수트가 그녀의 위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비록 공동정치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을 빼앗긴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파라오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20여년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나중에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고나서야 왕위를 되찾은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벽화와 조각을 훼손시켰다. 벽화나 조각상에서 얼굴을 없애고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 때문인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는 얼굴을 잃은(?) 스핑크스와 인물들이 줄을 잇는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있는 룩소르의 서쪽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불린다. 반면 동쪽은 ‘산 자들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다. 동쪽과 서쪽의 기준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나뉘어진다. 우리 옛말에 죽은 사람을 일컬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강을 건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강 한줄기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불리다니 신기한 사실이다. 룩소르의 동쪽과 서쪽이 다른 별명을 갖고 있는 이유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 때문이다.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에는 주로 카르나크 신전이나 룩소르 신전과 같이 업적이나 신을 기리는 신전이 있지만,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는 역대 왕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왕가의 계곡이나 영혼을 제사하는 장제전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가의 계곡은 신왕국시대 왕들의 묘가 자리해 있는 곳이다. 일종의 파라오들의 공동묘지라고나 할까. 그런데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들의 묘는 이전의 왕들과는 조금 다르다.

 

신왕국시대 이전의 왕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해서 그 곳을 묘지로 삼았지만 신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의 건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의 무덤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이전의 피라미드형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한 신왕국시대의 왕들은 자신의 묘가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피라미드 양식과 다른 암굴을 파서 분묘로 만들었다. 자신의 무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골짜기에 동굴을 파서 그 속에 미라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것이다. 땅 속에 길게 이어진 동굴을 팠기 때문에 왕가의 계곡에 가보면 얼핏 보기에는 그냥 허허벌판 돌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석구석 어딘가에는 왕의 무덤이 있다.

 


암굴 형태의 묘는 제 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를 시작으로 제 20왕조의 람세스 11세까지 계속해서 건설되었다. 왕들은 도굴꾼의 눈을 피해 암굴묘라는 다른 형식의 무덤을 선택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많은 묘소들이 대부분 매장 직후에 도굴 당했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라까지 훔쳐갔기 때문에 무덤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하워드 카터가 1922년에 발굴한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원상태로 남아있다.

 

발견된 총 62기의 무덤 중 유일하게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도굴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굴하는 과정에 파헤친 다른 무덤의 돌 더미에 투탕카멘 왕 무덤의 입구가 막혔기 때문이다. 투탕카멘의 묘 위에 람세스 6세의 묘가 만들어졌는데, 람세스 6세의 무덤은 파헤쳐 도굴 당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투탕카멘은 왕위에 10년도 채 있지 못하고 19살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요절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왕이었지만 하워드 카터가 찾아낸 온전한 그의 무덤만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부장품들은 이집트 왕의 화려했던 과거를 보여준다. 재위 기간이 채 10년이 되지 못하지만 3000여 점의 부장품이 나온 것으로 추정했을 때 번성했던 시기를 통치하던 왕의 묘에 얼마나 많은 부장품이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고대 이집트 왕들은 왕으로서 직무의 대부분을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왕릉에서 도굴해갔을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볼 수조차 없다니…. 휑한 왕릉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짐은 어쩔 수 없다.

 

왕가의 계곡은 지금까지 총 62기의 묘가 발굴되었지만 투탕카멘의 묘 이후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남은 왕의 미라는 13구에 이른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13구의 미라도 왕가의 계곡 근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땅 속에 묻혀있는 묘들도 세상의 빛을 볼 시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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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당시 이집트는 왕족간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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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집트 고왕국(Old Kingdom)

2008. 7. 28. 11:26

   신석기 혁명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비옥하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인을 통하여 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삶의 안정적인 방법은 강 유역을 따라 점차적으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100년 경, 이전에 적(Red)과 백(White)으로 나누어진 나일 강 위쪽(Upper ; 남쪽)과 아래쪽(Lower ; 북쪽)의 왕국은 메네스(Menes) 왕에 의해 통일되어 파라오 왕조(Pharaonic dynasties)가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중앙집권화된 통치 하에서, 이집트 문화는 발전하면서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 과학, 농업 그리고 상형문자는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그리고 남쪽 특히 누비아(Nubia) 등지의 주변국에 영향을 미쳤다.

파라오의 초기 4대 왕조는 고대왕국으로 명명되어지고, 쿠푸(Khufu), 카프레(Khafre), 그리고 멘카루(Menkaure)는 사콰라(Saqqara)에 계단형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초기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로 신에 대한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파라오의 믿음의 상징이며 지상의 신성한 왕권의 상징으로 건설되었다.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s)는 쿠푸(Khnum-Khuf. 줄여서 Khufu라고 함, 그리스어로 Cheops ;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제 4왕조의 왕 ; 2613?-2494? B.C.)대왕이 건설했다. 높이는 146.59미터에 이르며, 한 개당 2.5톤에 이르는 돌덩이 230만개로 만들어졌다.

농업에 기반을 둔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과 무역을 했다. 수단의 남쪽 경계, 리비아와 서부아시아까지 교역로를 확보하고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집트는 자주 출병하였다. 당시 이집트의 뛰어난 통치자였던 하쿠프(Harkuf)는 기원전 2,300년경 콩코 분지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원정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과 접촉하게 했고, 누비아까지 국경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외부와의 접촉으로 이집트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아스완 댐 근처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은 파라오 왕권이 남쪽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페피 1세(Pepi I)하의 제 6 왕조는 왕권이 약화된 시기였다. 이집트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왕자들과 지방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반란의 위협은 국가의 몰락을 가져와 2 세기 동안 이집트는 몰락을 겪었다. 이러한 일은 잉여농산물에 의해 국가가 유지되고 있던 이집트의 쇠퇴를 가속화했고, 결국 중앙 권력의 와해로 왕조가 멸망한다.

Mansa Musa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기자(Giza), 나일강, 이집트, 쿠푸, 파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