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노스(Oceanos) :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많은 사람들은 과실, 악천후, 무능력 또는 이 모든 요인의 결합으로 인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곤 한다. 하지만 역사책은 배가 가라앉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이 행동한 영웅적 행위와 용감성을 기록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대부분의 경우에 침몰선의 선원은 위험한 순간에 위대한 용기와 희생을 보여준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1991년 8월에 남아공의 이스트 런던(East London)근처에서 침몰한 그리스의 여객선 오세아노스(Oceanos)는 이런 훌륭한 전통에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목의 순간에서, 죽음 앞에서 용기를 보여준 것은 선장과 선원이 아니라 승객들 자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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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오세아노스는 1952년에 건조되었고 진 라보르도(Jean Laborde), 마이키나이(Mykinai), 아스코나(Ascona) 그리고 이스턴 프린세스(Eastern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항해를 하였다. 오세아노스라는 이름을 1978년에 명명되어졌고 그리스의 Epirotiki Steamship & Navigation Company of Piraeus라는 회사에 소속되었다.

 

1991년에 남아공의 여행사인 TFC가 이 배를 전세 내어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이 배는 남아공 근해를 항해하고 있었다. 1991년 8월 3일 토요일 저녁 7시쯤 오세아노스는 선장 야니스 아바란스(Yannis Avranas)의 지휘아래 374명의 승객과 180명의 선원 그리고 26명의 TFC 승무원 등 총 580명을 싣고 이스트 런던을 떠나 더반(Durban)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오세아노스는 밤을 새워 항해하여 다음날 아침 7시에 더반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배안에서는 “독한 술 항해(booze cruise)"라고 불리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아 바다는 거친 폭풍우가 치고 강한 바람이 시속 140킬로미터로 불고 있었으며 파도는 8미터 높이나 되었다.

 

항구를 떠난지 4시간 30분 만에, 오세아노스는 첫 SOS 요청을 보냈다. 배는 근해에 좌초되어 우현이 기울어져 있었고 엔진실은 물에 잠기고 있었다. 육지에서 조난 요청을 받은 후에 즉시, 그 지역을 지나고 있던 세척의 상선에 조난신호를 보내서 오세아노스를 구조하러 가도록 하였고 더반에서는 예인선을 포함한 세 척의 배를 출항시켰다. 또한 남아공 공군에게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고 헬리콥터 부대가 구조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라운지에서 카바레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cabaret  플로어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저녁 9시 3분경에 처음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엔진의 시동이 꺼졌다. 오래지 않아, 배는 천천히 우현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선체에 큰 구멍이 난 것이 알려졌고 곧 비상조치를 하여 구멍을 막았다. 그렇지만 곧 구명조끼가 건네졌다. 여객선의 매니저이며 행사 책임자인 로빈 보틀만(Robin Boltman)이 막 무대로 나가려 할 때 전원이 나갔다고 말했다.

 

“그 배는 비상등이 작동하기 전까지 완벽한 어둠 속에 있었다. 우리는 휴게실에 모든 승객들을 모았고 연예인들이 그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농담을 했으며 악기를 연주했다. 우리는 승객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했다. 바닷물은 아래 갑판에 발목까지 차 올랐다. 우리는 휴게실에 승객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고 TFC 여행사 대표 로라이네 벳츠(Lorraine Betts)와 나는 승객들을 위한 약품과 같은 필요한 물품을 가지러 아래로 내려갔다.

 

“배는 우현으로 더 가파르게 기울어졌고 새벽 2시에 우리는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서 단지 2 척의 구명보트만 내릴 수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이 보트는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이 타고 있었고, 한 승객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어떤 선원은 “구명보트로 인한 소란 속에 여자와 어린이들을 옆으로 밀쳤다” 보트가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로빈 보틀만은 선교에 올라갔지만 선교는 텅 빈채로 버려져 있었고 이미 시작된 해군과 공군의 구조작업팀에 겨우 연락을 취했다.

 

 

배가 점점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으면서 이것은 끔찍한 밤이었다. “그날 밤 내내 우리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 있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인  코체(Kotze)씨가 말했다.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자, 우리는 서로 넘어졌고 물건들은 서로 부딫히며 충돌했다. 완전한 공포로 가득한 오랜 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랍게도 침착했다. 아무도 울거나 소리치거나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코체씨는 “끔찍했다. 완전히 지옥이었다. 영화 포세이돈의 한 장면처럼. 갑판은 그런 무서운 장면으로 가득했고 나는 목숨을 구하고자 난간에 매달렸다.

 

처음으로 도착한 비행기는 새벽 5시에 워터클루어프(Waterkloof) 공군기지에서 나온 C160 수송기였으며 배를 선회하였다. 여전히 어둠뿐이었고, 배가 놀랍게도 전복되어 있었지만 오세아노스의 갑판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좌초된 배 주위를 순회하는 것은 수많은 상선들이었고 그 배들이 비춘 탐조등이 거친 파도 위의 좌초된 배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 7시 30분, C160은 여전히 침몰한 배 주위를 순회하였고 11대의 퓨마(puma) 헬리콥터와 두 대의 알호우터(Alhouette) 헬리콥터 그리고 두 대의 다코타스(Dakotas)는 더반의 아이스터플랏(Ysterplaat)과 스와르트콥스(Swartkops) 공군기지에서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오세아노스는 뱃머리가 침수되고 있었고 여전히 배에 승선한 남은 사람들은 갑판 뒤쪽에 기어 올라가 있었다. 또 다른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간신히 올라탔고, 배 전복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에 뛰어 들기도 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하기 전 배를 단념했던 사람들은 그 지역을 항해하는 다섯 척의 상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풍속 35노트의 강풍이 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헬리콥터는 침몰선에서 좀 떨어져 승객들을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첫 번째 구조 헬리콥터에 앉기를 요청했다. 그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육지에서 좀 더 효과적인 구조작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어, 그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승객 중 한 명인 존 힉클린은 나중에 선장이 대다수의 선원들보다 더 오래 배에 머물렀지만 그는 아주 재빨리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승객들이 선교로 가도록 요청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명보트가 떠나려 할때 선장은 그 배에 타서 감독하겠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며 선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선장과 선원에 의해 버려진 것은 오세아노스호 승객들은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승선한 TFC 직원들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처음 도착했을 때, 벳츠(Betts)양이 수영장이 있는 갑판에서 승객들을 돌보는 동안 나는 선교에 머물러 있었다.” 보틀만은 설명했다. “크로스토크(Crosstalk)밴드 출신인 크리스토퍼 모스 힐스(Christopher Moss Hills)는 헬리콥터에 오르는 사람들을 도왔다. 반면에 배의 마술사인 쥴리안(Julian)과 몇몇 친구들은 배의 고무보트를 내렸고 오세아노스호를 순회하면서 구명보트에 다가가기 위해 바다 속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을 구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였다.

 

배에 더 이상 승객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보틀만은 그 날 아침 11시 30분쯤에 배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배는 바다 속에 더 깊이 가라앉았고, 파도로 인해 가구들은 물 속으로 쓸려갔다. 해군은 실종되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찾기 위해 다이버들을 보냈다. 배는 2시간 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오세아노스호로부터 구조된  219명은 이스턴 케이프의 트란스케이 해안으로 알려진 커피만(Coffe Bay)의 헤븐 호텔(Heven Hotel)에 처음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옮겨진 그들은 걱정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났다. TFC 관계자들은 또한 숙박시설과 옷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준비하려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급파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비판하든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후에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다른 배에 의해 구조되었던 내 가족과 헤어졌고 내 배를 잃어버렸다. 나에게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가?”

 

오세아노스호 침몰에 관한 조사가 1년 후에 아테네에서 열렸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 않은 선장을 비롯한 4명의 고위직 선원들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특히 그들은 전력실에 물이 차는 것을 막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책하였다.

 

이미 삼백만 랜드를 지불했고 여전히 백만 랜드 정도의 부채가 남아 있는 TFC 여행사는 조사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채청산작업하에 들어가 있었다. TFC는 담당 변호사를 통해 조사된 보고서에 따라 그리스의 선박회사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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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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