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29 4

8. 키하울리 4

제 어머니 즉 아내와 나는 97년에 결혼 50주년되는 금혼식을 했었다. 이제 결혼한지 52년이 된다. 나의 아내는 이제 좀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하다. 우리 소유의 집을 지니고 산다. 집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내가 직접 조금씩 조금씩 지었다. 은행융자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내주고 짓는 현장을 검사하고 또 내주고 하는 식이었다. 집을 다 짓고 나면 즉시 내 월급에서 융자를 강제로 갚아나가게 되어있다. 다 갚아야 집의 명의가 내 앞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대지에 집을 두 채 지었는데 큰집은 방이 세 개짜리로 세를 주고 나는 방이 두 개인 작은 집에 살고 있다. 뭐 우리가 잘사는 것은 아니다. 집세에 의지해서 사니까 어떨 때는 세든 사람이 돈이 없다고 집세를 못 낸다고 하면 기다려야 한다. 우리..

7. 키하울리 3

나는 아이들을 다섯 두었다. 딸이 둘, 아들이 셋이다. 나의 부모님 경우와 똑같다. 애들 중 어떤 놈은 아주 머리가 좋고 어떤 놈은 좀 쳐지고 그렇다. 나의 큰 애는 1948년에 태어났고 그 후 3년 터울로 아이들이 태어났다. 송게아에서는 관습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 연년생은 좋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태어나도록 했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은 성급해서 그런 간격을 지키지 않는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는데 우리 때는 그런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노인들이 아이가 세 살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 아이를 낳으라고 가르쳤다. 윗 아이가 좀 커야 갓난아기가 태어나도 수월하니까. 그러나 아이들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한없이 많이 둘 수가 있었다. 딸이건 아들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큰애는 이제 50이 넘었는데..

6. 키하울리 2

나의 어머니는 술을 아주 좋아하셨다. 이웃에 가서 술마시기를 좋아하셔서 곧잘 집에 늦게 오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우리가 저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자 어머니는 아예 저녁 지을 부담이 없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한편 걱정이 되었다. 나의 두 누님은 물론 나보다 더 먼저 결혼을 했다. 그들은 아주 먼데로 시집을 갔다. 한 누님은 킬로사라는 곳으로 갔다. 다우리로 염소를 많이 받았는데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 팔아야 했다. 나는 그 후 oversea coporation 이라는 개인회사에 취직이 되어 어머니의 허락을 맡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oversea coporation 은 땅콩을 가공하는 회사이다. 그 회사는 린디라는 곳에 있어서 나의 아내에게 고..

5.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몇 명만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 키 하울리 1

키하울리 (남, 73세)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아주 몇 명만이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도시에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 시골 사람들이 다 변해버려서.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름은 죠셉 힐라리 키하울리다. 나는 1926년 송게아의 키보세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탄자니아의 남쪽인데 높은 산이 많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로 한번도 어디 일자리에 채용되어본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는 가축을 돌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네 살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반면 나의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돌보고 키웠다. 우리를 도와 줄 다른 사람이 없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