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독일통치와 반발 -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africa club 2001. 11. 21. 15:22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팡가니강 유역은 두가지 이유로 유럽인들의 활동거점이었다.  첫째, 우삼바라(Usambara)는 해안으로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광대한 고지지역이었고, 유럽식 농업은 고지대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풍미하고 있었다.  둘째, 독일침략군은 팡가니계곡을 내려다보고있는 위치에 있는 비옥한 고지대에 조밀하게 모여살고 있는 주민들 사이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였다.
    독일인들이 1880년대에 팡가니유역에 들어갔을 당시, 적대관계는 독일인들이 동맹자와 협력자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했다.  마사이(Masai)족은 질병과 내전으로 너무 약화되어 중대한 반대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류계곡에 지배적인 아루샤(Arusha)족은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류지역은 우삼바라의 통치자인 킴웨리 자 늄바(Kimweri za Nyumba)가 통치하고 있었다.  1869년 그가 사망하자 기나긴 계승권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이 지역에 있어서의 독일의 점령을 한층 용이하게 만들었다.
    킬리만자로지역에서는 최초의 외교관이었던 린디((Rindi)가 독일인들을 기만하여 자신의 적수였던 시나(sina)를 죽일것을 부추겼다.  독일인들에 대한 린디의 우호적 행위로 인하여 독일인 앞잡이들이 모쉬(Moshi)에 배치되었다.  린드의 친구였던 독일인들은 키보쇼(Kibosho)의 시나와 잠재적으로 마찰관계에 있었다.  1891년초 린디는 시나가 독일지배에 대한 반항으로 독일기를 끌어내렸다는 풍문을 퍼뜨렸다.  비스만(Wissmann)은 즉시 시나의 태도에 대한 징벌과 진압을 결정했다.  린디는 독일 토벌대를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토벌대의 전투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병과 무기들을 제공하였다.
    시나의 본거지는 비록 요새화되어 있었으나 함락당했고 시나는 독일인들과의 조약을 맺는데 동의했다.  침략자들은 시나가 린디에게 두 지역을 내어주고 그가 감금하고 있던 우루(Uru)족 족장을 석방한다는 조건하에 시나에게 화친강화를 보증했다.  그리하여 린디의 부추김을 받아서 독일인들은 시나를 파멸로 끝나게 했다.
    1892년 린디가 죽고나자 전에는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던 마랑구(Marangu)족의 마레알레(Marealle)추장이 음모를 꾸며 킬리만자로지역에서 독일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부상했다.  1900년까지 그는 독일인들에게 모쉬(Moshi), 키보쇼와 여타 지역출신 추장들의 불충을 납득시켰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배반행위는 결국 19명의 추장들을 처형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탄자니아에서 린디와 마레알레는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민족배반자들일 것이다.  두사람 모두 독일행정기관에 비교하여  하위직책을 맡길 원하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위협받고 있던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만을 원했음에 틀림이 없었고, 기술적으로 좀 더 우수한 세력과의 외교게임에서 일부의 이점들을 간파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배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직접적 성과물들은 일견 자신들의 협력을 정당화시켜 주는듯 했으나 그들이 사실상의 정치권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정권을 빼앗기기전에 능동적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의 정치권력상실과 별다를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