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독일통치와 반발 -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africa club 2001. 11. 21. 15:22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의 저항은 탄자니아인 최초의 저항이었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는 잔지바르의 세이드 칼리파(Seyyid Khalifa)와 동회사에 광물채굴권, 통상조례와 본토수입관세의 징수에 관한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의 관리들은 그때부터 대부분의 해안도시들에 걸쳐서 회사의 깃발을 서둘러 게양하였다.  독일의 저의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동일한 깃대위에 술탄의 깃발 옆에 나란히 독일기를 게양할 권리를 주장했다.  팡가니(Pangani)에서 분별없이 잔지바르의 깃발을 제지한 사건은 곧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전 해안지방을 휘말려 들어가게 한 폭력소요를 불러일으켰다.  리왈리스(Liwalis)와 아키다스의 해산, 회교사원에 개를 데리고 들어가는 신성모독행위와 새로운 통상과 토지조례의 부과는 해안지방사람들에게 독일인들이 나라를 접수하러 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했다.  아부쉬리가 이끄는 해안지방의 사람들은 이것에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아부쉬리 빈 살림 알-하쓰(Abushiri bin Salim al-Harth)는 팡가니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자리잡으려고 도착한 1888년 8월 8일 팡가니에서 사건이 터졌다.  해안주민들은 독일기 게양을 거부했고 심지어 술탄의 강력한 평화노력까지 거부하면서 새로이 도착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얼마후 바가모요(Bagamoyo), 탕가(Tanga), 미킨다니(Mikindani)와 킬와(Kilwa)주민들이 독일인들에 맞선 폭동에 팡가니주민들과 합류했다.  10월까지 잔류한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의 관리들이 다레살람(Dar es Salaam)과 바가모요에서 포위되었다.
    이 중대한 시점에 폰 비스만(Von Vissmann)소령이 그 저항을 진압하고 더 이상의 굴욕으로부터 독일을 구해내기 위해서 독일로부터 파견되었다.  줄루(Zulu), 소말리(Somali), 누비아(Nubia), 터키군이 동반하고, 잔지바르인들이 아랍인들을 도울 가능성에 대한 사전경고의 의미로서 영국해군 해안봉쇄대의 도움을 받아 폰 비스만은 우선 팡가니를 점령하고나서 다레살람북방의 도시들을 진압하였다.  아부쉬리 자신은 탈출했으나 결국 우사가라(Usagara)의 줌베 마가야(Jumbe Magaya)의 배신으로 붙잡혀서 1889년 12월15일 바가모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스만은 1889년 해안지방의 거물인 브와니 헤리(Bwana Heri)의 거점이던 사다니(Sadani)를 폭격하였다.  브와나 헤리는 그의 거점이 피폭당하는 사이에 달아났다.  이 폭격으로 해안지방에서의 저항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