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와 아프리카인의 반발
독일인들은 인원부족에 직면한 이후로 해안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구조, 즉 아랍식의 아키다스(Akidas)와 줌베(Jumbes)체제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와싸(G.C.K.Gwassa)는 독일인들이 행정중심지들을 설치할 입지를 선정하는 요소들을 개괄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이 요소들은 주로 다섯항목으로 집약된다.
첫째, 교역과 교통을 통제하기를 기대하며 교역로를 따라 형성된 구도시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탕가(Tanga)노선의 건설이 1891년에 시작되었다. 음프와 프와(Mpwapwa), 타보라(Tabora), 우지지(Ujiji)와 같은 중앙교역로를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생산적 노동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많은 인구가 존재하는 지역들도 역시 독일행정기관을 끌어들였다. 이런 지역들은 우삼바라(Usambara)와 킬리만자로(Kilimanjaro)지역에 있었다. 동시에 공동의 경제적 잠재력과 이주하기에 적합한 지역들도 독일인의 주둔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에, 많은 인구를 가진 지역들은 고도의 잠재력을 가진 지역들이었고, 그러한 경우에 독일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냈다.
세째, 실제적 혹은 잠재적 저항을 통제하려는 희망이 독일인들의 입지선정에 또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데 키사키(Kisaki)와 특히 마헹게(Mahenge) 군주둔지들은 음크와와(Mkwawa)족과 헤헤(Hehe)족에 맞서 싸우던 독일 식민주의자들에게 공급선을 마련해주기위해 설치되었다. 이링가(Iringa)는 점령 당한 이후로 요새화되어져야만 했고 음완자(Mwanza)와 부코바(Bukoba)는 어쩌면 북부지방에 등장한 영국인들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어졌을런지 모른다.
네째, 일부의 경우에 독일인들은 이미 설치되어있던 선교센타부근에 주둔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컨데, 평화적으로 경제영역을 확장하길 염원했던 폰 조덴(Von Soden)총독은 선교사들을 독일식민지화의 앞잡이들로서 이용하길 원했다. 폰 조덴총독은 베를린 루터파선교사들과 독일 모라비아교파선교사들을 음베야(Mbeya)지역에 독일 영향력을 세우는데 이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후에 독일인 주둔지들이 음베야지역에 설치되었다.
다섯째, 자신들의 통치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독일인들은 맨 처음부터 경제적 이용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은 탄자니아에서 일련의 좌절을 맛보았다. 우선 독일동아프리카회사와 회사의 이익을 독점코자했던 칼 피터스(Carl Peters)가 주주수를 소수로 유지했기때문에 탄자니아로 유입되는 충분한 자본투자가 부족했다. 게다가 동부아프리카는 유력한 독일 자본가들에 관한 한 미지의 땅이었다. 그 정책은 현지의 수익성있는 장사를 찾아내어 지배하는데 독일인들이 실패함으로써 또한 늦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불충분하긴 했으나 존재하고 있던 교역체계는 잔지바르인, 인도인과 아랍인 상인들의 수중에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경제적 이용에 대한 좌절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3가지 방식으로 농업개발을 장려하였다. 첫째, 독일인들은 열대플랜테이션을 개발하기위하여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시도했으나 아프리카인들이 이런식으로 이용당하길 꺼려했기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둘째로, 식민정부는 고지지역에서 유럽인들의 직접적 농장경영을 장려했고 그 결과로써 파생되는 고도의 잠재력을 지닌 지역에서의 정착민들에 의한 토지수탈은 초창기의 예측과는 맞지 않았다. 셋째, 식민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을 종종 최악의 노동조건하에서 현금작물을 재배하게 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아프리카의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이 분출되었다.
독일인들은 인원부족에 직면한 이후로 해안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구조, 즉 아랍식의 아키다스(Akidas)와 줌베(Jumbes)체제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와싸(G.C.K.Gwassa)는 독일인들이 행정중심지들을 설치할 입지를 선정하는 요소들을 개괄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이 요소들은 주로 다섯항목으로 집약된다.
첫째, 교역과 교통을 통제하기를 기대하며 교역로를 따라 형성된 구도시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탕가(Tanga)노선의 건설이 1891년에 시작되었다. 음프와 프와(Mpwapwa), 타보라(Tabora), 우지지(Ujiji)와 같은 중앙교역로를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생산적 노동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많은 인구가 존재하는 지역들도 역시 독일행정기관을 끌어들였다. 이런 지역들은 우삼바라(Usambara)와 킬리만자로(Kilimanjaro)지역에 있었다. 동시에 공동의 경제적 잠재력과 이주하기에 적합한 지역들도 독일인의 주둔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에, 많은 인구를 가진 지역들은 고도의 잠재력을 가진 지역들이었고, 그러한 경우에 독일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냈다.
세째, 실제적 혹은 잠재적 저항을 통제하려는 희망이 독일인들의 입지선정에 또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데 키사키(Kisaki)와 특히 마헹게(Mahenge) 군주둔지들은 음크와와(Mkwawa)족과 헤헤(Hehe)족에 맞서 싸우던 독일 식민주의자들에게 공급선을 마련해주기위해 설치되었다. 이링가(Iringa)는 점령 당한 이후로 요새화되어져야만 했고 음완자(Mwanza)와 부코바(Bukoba)는 어쩌면 북부지방에 등장한 영국인들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어졌을런지 모른다.
네째, 일부의 경우에 독일인들은 이미 설치되어있던 선교센타부근에 주둔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컨데, 평화적으로 경제영역을 확장하길 염원했던 폰 조덴(Von Soden)총독은 선교사들을 독일식민지화의 앞잡이들로서 이용하길 원했다. 폰 조덴총독은 베를린 루터파선교사들과 독일 모라비아교파선교사들을 음베야(Mbeya)지역에 독일 영향력을 세우는데 이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후에 독일인 주둔지들이 음베야지역에 설치되었다.
다섯째, 자신들의 통치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독일인들은 맨 처음부터 경제적 이용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은 탄자니아에서 일련의 좌절을 맛보았다. 우선 독일동아프리카회사와 회사의 이익을 독점코자했던 칼 피터스(Carl Peters)가 주주수를 소수로 유지했기때문에 탄자니아로 유입되는 충분한 자본투자가 부족했다. 게다가 동부아프리카는 유력한 독일 자본가들에 관한 한 미지의 땅이었다. 그 정책은 현지의 수익성있는 장사를 찾아내어 지배하는데 독일인들이 실패함으로써 또한 늦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불충분하긴 했으나 존재하고 있던 교역체계는 잔지바르인, 인도인과 아랍인 상인들의 수중에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경제적 이용에 대한 좌절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3가지 방식으로 농업개발을 장려하였다. 첫째, 독일인들은 열대플랜테이션을 개발하기위하여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시도했으나 아프리카인들이 이런식으로 이용당하길 꺼려했기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둘째로, 식민정부는 고지지역에서 유럽인들의 직접적 농장경영을 장려했고 그 결과로써 파생되는 고도의 잠재력을 지닌 지역에서의 정착민들에 의한 토지수탈은 초창기의 예측과는 맞지 않았다. 셋째, 식민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을 종종 최악의 노동조건하에서 현금작물을 재배하게 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아프리카의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이 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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