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분할과 그 뒤의 지배에 대해, 아프리카인이 결코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할기로부터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각지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아라비 파샤의 발란(1881∼82), 수단의 마흐디 발란(1881∼98), 아비시니아 아드와의 싸움 (1896), 소말리아 사이이드 무하마드 반한(1891∼1920), 우간다 부뇨로의 반란(1891∼1920), 팀가니카 헤헤족의 반란(1891∼98) 과 마지마지의 반란 (1905∼1907), 니아살랜드 칠렘브웨이 반란(1915), 로디지아 마타벨레족과 뫄쇼나족의 반란(1986), 나탈 줄루족의 반란(1906), 남서아프리카 헤레로와 나마의 반란(1904∼1906), 골드코스트 아샨티의 반란(1900), 리비아 사누시의 반란(1912∼31) 등이다. 이들 초기저항의 특징은 첫째 종교가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중요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 둘째로 부족단위의 투쟁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근대적 장비를 갖춘 식민지군의 힘 앞에 무릎을 끓어갔다.
남아프리카연방에서는 1918년 도시의 아프리카인 민족회의가 결성되어 정부의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케냐에서는 백인 입식자로 말미안아 토지에서 쫓겨난 키쿠유족의 헤리 추쿠가, 21년 키쿠유청년동맥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아프리카인 처우개선을 위한 청원·진정 등의 합법적 수단을 취한 온건한 것이었으며, 독립은 아직 목표로서 내세워지고 있지 않았다. 아프리카 민족운동은 크게 2차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으로, 이시기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민족운동의 <맹아기>라 불린다. 즉 분할 직후의 초기 저항은 거의 모두 탄압되었으나, 아프리카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초기의 저항조직, 전술면의 약점을 비판했지만, 그 정신면은 높이 평가하여, 이를 계승해갔다.
둘째, 2 차세계대전 이후시기로, 앞의 <맹아기>에 대해 이 시기의 운동은 <개화기(開化期)>라 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서인도제도에서 일어났던 범아프리카주의운동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독립을 희구하는 일대조류가 되었다. 이 운동은 또 제 2차세계대전 후의 아시아 제국의 독립과, 그 결과 열린 반둥회의 (1955)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과, 제 2차대전에 연합군 측에서 참전하여 아프리카 이외의 세계를 경험했던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귀국한 사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즉, 영국 식민지 골드코스트에서는 1948년 코코아의 독점적 매상에 대해 아프리카인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영국정보는 그 원인조사를 위한 위원회의권고에 따라, 아프리카인에 대폭적인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에 협조적이었던 골드코스트회의당(당수 당카)을 비판하면서 K.은크루마는 탈당하여 회의인민당(會議人民黨)을 결성하고,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총파업을 호소했기 때문에, 체포·투옥되었다. 그 동안, 51년의 시넌법에 따라 입법심의회선거를 실시한 결과, 회의인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은크루마는 석방되었다. 그리고 56년 선거에서 다시 다수파를 차지한 회의인민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57년 3월 검은 아프리카 최초이 독립국으로 가나가 탄생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열린 프랑스국민의회에서, 모든 아프리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신헌법 제안이 있었으나, 당시 프랑스정부는 조국 부흥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몰두하여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돌리 수 없었다. 1946년 아프리카인은 바마코회의를 열어, 세네갈을 제외한 7개 식민지가 참가하고, 우에 부아니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민주연합을 결성하고 프랑스 공산당과 연합했다. 프랑스정부는 RDA를 위험시하여 50년에 RDA집회를 금지했다. 56년 '기본법'이 제정되어 아프리카인에게 대폭적 자치가 부여되었으나, 독립에 간해서는 독립 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 의제가 되었다. 58년 드골이 제 5공화국 수립과 함께 본국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프랑스공동체 구상이 나와, 기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공동체에 가입했다. 기니의 세쿠 투레는 '예속속의 부유 보다는 자유 속의 빈곤을 택하겠다' 하여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원조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기니를 제외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60년에 프랑스 공공체 틀 안에서 독립을 달성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민족운동이 억제되어 왔으나, 영국·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을 향한 움직이멩 자극되어 급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9년 바콩고족 아바코당(당수 G,카사부부)에 대한 집회금지가 발단이 된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폭동·학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독립의 요구가 높아졌다. 50년 대 초 브뤼셀원탁회의가 열려 독립시기에 관한 협의가 있었으나,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아프리카인 대표의 목소리에 벨기에 정부는 사태를 포기하는 형태로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그해 6월 카사부부대통령, 루뭄바총리 아래 독립이 달성되었다.
분할과 그 뒤의 지배에 대해, 아프리카인이 결코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할기로부터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각지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아라비 파샤의 발란(1881∼82), 수단의 마흐디 발란(1881∼98), 아비시니아 아드와의 싸움 (1896), 소말리아 사이이드 무하마드 반한(1891∼1920), 우간다 부뇨로의 반란(1891∼1920), 팀가니카 헤헤족의 반란(1891∼98) 과 마지마지의 반란 (1905∼1907), 니아살랜드 칠렘브웨이 반란(1915), 로디지아 마타벨레족과 뫄쇼나족의 반란(1986), 나탈 줄루족의 반란(1906), 남서아프리카 헤레로와 나마의 반란(1904∼1906), 골드코스트 아샨티의 반란(1900), 리비아 사누시의 반란(1912∼31) 등이다. 이들 초기저항의 특징은 첫째 종교가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중요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 둘째로 부족단위의 투쟁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근대적 장비를 갖춘 식민지군의 힘 앞에 무릎을 끓어갔다.
남아프리카연방에서는 1918년 도시의 아프리카인 민족회의가 결성되어 정부의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케냐에서는 백인 입식자로 말미안아 토지에서 쫓겨난 키쿠유족의 헤리 추쿠가, 21년 키쿠유청년동맥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아프리카인 처우개선을 위한 청원·진정 등의 합법적 수단을 취한 온건한 것이었으며, 독립은 아직 목표로서 내세워지고 있지 않았다. 아프리카 민족운동은 크게 2차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으로, 이시기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민족운동의 <맹아기>라 불린다. 즉 분할 직후의 초기 저항은 거의 모두 탄압되었으나, 아프리카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초기의 저항조직, 전술면의 약점을 비판했지만, 그 정신면은 높이 평가하여, 이를 계승해갔다.
둘째, 2 차세계대전 이후시기로, 앞의 <맹아기>에 대해 이 시기의 운동은 <개화기(開化期)>라 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서인도제도에서 일어났던 범아프리카주의운동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독립을 희구하는 일대조류가 되었다. 이 운동은 또 제 2차세계대전 후의 아시아 제국의 독립과, 그 결과 열린 반둥회의 (1955)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과, 제 2차대전에 연합군 측에서 참전하여 아프리카 이외의 세계를 경험했던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귀국한 사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즉, 영국 식민지 골드코스트에서는 1948년 코코아의 독점적 매상에 대해 아프리카인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영국정보는 그 원인조사를 위한 위원회의권고에 따라, 아프리카인에 대폭적인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에 협조적이었던 골드코스트회의당(당수 당카)을 비판하면서 K.은크루마는 탈당하여 회의인민당(會議人民黨)을 결성하고,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총파업을 호소했기 때문에, 체포·투옥되었다. 그 동안, 51년의 시넌법에 따라 입법심의회선거를 실시한 결과, 회의인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은크루마는 석방되었다. 그리고 56년 선거에서 다시 다수파를 차지한 회의인민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57년 3월 검은 아프리카 최초이 독립국으로 가나가 탄생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열린 프랑스국민의회에서, 모든 아프리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신헌법 제안이 있었으나, 당시 프랑스정부는 조국 부흥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몰두하여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돌리 수 없었다. 1946년 아프리카인은 바마코회의를 열어, 세네갈을 제외한 7개 식민지가 참가하고, 우에 부아니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민주연합을 결성하고 프랑스 공산당과 연합했다. 프랑스정부는 RDA를 위험시하여 50년에 RDA집회를 금지했다. 56년 '기본법'이 제정되어 아프리카인에게 대폭적 자치가 부여되었으나, 독립에 간해서는 독립 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 의제가 되었다. 58년 드골이 제 5공화국 수립과 함께 본국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프랑스공동체 구상이 나와, 기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공동체에 가입했다. 기니의 세쿠 투레는 '예속속의 부유 보다는 자유 속의 빈곤을 택하겠다' 하여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원조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기니를 제외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60년에 프랑스 공공체 틀 안에서 독립을 달성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민족운동이 억제되어 왔으나, 영국·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을 향한 움직이멩 자극되어 급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9년 바콩고족 아바코당(당수 G,카사부부)에 대한 집회금지가 발단이 된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폭동·학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독립의 요구가 높아졌다. 50년 대 초 브뤼셀원탁회의가 열려 독립시기에 관한 협의가 있었으나,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아프리카인 대표의 목소리에 벨기에 정부는 사태를 포기하는 형태로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그해 6월 카사부부대통령, 루뭄바총리 아래 독립이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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