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상에서 보아 왔듯이 식민지의 통치방식 차이에 따라 독립과정도 상당히 달랐으나, 어느 경우에도 독립운동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어서 요구·폭동·투옥·대립·항쟁 등의 과정을 겪었다.
먼저 1956년에는 수단, 튀니지, 모로코가 독립을 했으며, 57년에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골드코스트가 독립하여 가나가 되었다. 계속해서 58년 기니가 독립했고, 60년에는 1월에 카메룬, 4월에 토고, 6월에 콩고(레오폴드빌, 현 자이르), 세네갈, 말리, 마다가스카르, 7월에 소말리아, 8월에 코트디부아르, 다호메(현 베냉), 어퍼볼타(현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중앙아프리카, 콩고(브라자빌), 가봉, 챠드, 10월에 나이지리아, 11월에 모리타니 등 모두 17개국이 차례로 독립하여 이른바 '아프리카 독립의 해'가 되었다. 이어서 61년에는 시에라리온,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62년에는 르완다, 부룬디, 알제리, 우간다, 63년에는 케냐, 64년에는 니아살랜드(현 말라위), 북로데지아(현 잠비아)가 속속 독립을 이룩하고, 1970년 중반 이후는 전 포르쿠갈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하였다. 그리고 1980년 짐바브웨가, 1990년에는 나미비아가 남아공으로부터 독립을, 1993년 에리트리아가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1994년 남아공이 백인지배하에서 독립하는 등 약간의 나라를 남기고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의 경우, 비교적 초기부터 아프리카인을 정치에 참여시킴으로써, 독립후의 정치운영이 벨기에령에 비해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경우는 '동화정책'으로 프랑스와의 일체화가 이루어졌으며, 독립 후에도 영국 식민지에 비해 본국과의 유대가 보다 강했다(다만 기니는 분명히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자이르)나, 유럽인의 입식지(케냐) 같은 곳에서는 유럽인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서 다른 데에 비해 독립이 난항이었다.
특히 가장 비참했던 것은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참가를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독립욕구에 대해 책임을 포기하는 형태로 사태를 내던진 벨기에령 콩고였다. 즉, 세계 유수의 구리·코발트 등의 광산자원을 가진 콩고에서 외국기업이 끝까지 이권을 유지하려고 획책한 사실이 독립후의 이 나라를 정치적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0년 6월 독립 5일 후에 벨기에 사령관에 대해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다시 7월에 구리산출지인 카탕가주(현샤바주)의 촘베가 이 주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루뭄바 총리가 국제연합군의 출동을 요청하면서 콩고문제는 국제화되기까지 하였다.
영령 식민지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더 발달되었는데도 불령식민지의 독립이 더 빨리 이루어진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프랑스가 그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완전히 분리된 정치단위로 보지 않고 단순한 그들의 해외영토로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고조되어 갈 때도 불령식민지는 독자적인 아프리카 국가로의 독립 보다는 1958년 드골에 의해 제창된 프랑스 연방의 구성원으로 잔류를 택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 기니가 독립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독립의 요구가 높아져 그후 2년 동안 다른 식민지들도 모두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독립국가들은 프랑스와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둘째, 영국은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독립을 위한 사전 준비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영토가 식민지라는 지위에서 완전한 정치적 주권체로 변화하는 것을 간단한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준비기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직면한 과제는, 정치면으로는 국가건설의 방향을 잡는 것과 경제면으로는 모노컬처 경제구조를 불식하는 일이었다.
먼저 정치면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한 방향은 사회주의노선이었다. 첫째는 아프리카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골자는 식민지화 이전의 아프리카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원리를 살려 농민과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칙취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원리에 따라 종래 백인이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 보험회사, 외국무역기업 등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거나 정부가 과반수의 주식을 취득함으로서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의 90% 이상이 종사하는 농사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농형태에서 공동농장, 공동작업, 노동에 따른 생산물의 배분이라는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과학적 사회주의 채택이다. 모잠비크나 앙골라에서는 모든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어 인민의 소유가 되었다. 또 전위당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경제를 계획했으며, 노동조합을 통한 인민의 경영 참가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구소련·동구·중국 등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의 자립화를 성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 수단으로서 첫째로 취해진 것이 백인 입식지에서는 입식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반환이며, 1962년의 케냐의 '100에이커 입식계획'이 그 예이다. 입식지를 세분화하여, 아프리카인에 재입식시켜, 아프리카인 중농을 육성함과 동시에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실업자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또 입식지 이외에 관개시설 건설과 비료의 도입 등, 제도·기술면의 개혁이 이루어져 이를 금융면에서 원조하기 위한 토지은행이나 공사 등이 설립되었다. 둘째로 식민지시기에 백인·인도인이 차지하고 있던 부문의 아프리카인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숙련자나 기술자가 적어 지금까지 운영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상을 포함하여, 경제 전체를 다각화하고 균형이 잡힌 경제구조를 창출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은 계획 실현을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그 재원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차관과 공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압도적으로 1차산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국제경제 변동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며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역저건의 악화와 채무의 누적에 의한 경제적 위기는 국민의 불만을 증대시켰으며 그 불만을 미리 발산한 군부에 의해 정권전복을 기도하는 쿠데타가 독립 후의 아프리카 제국에서 빈발하였다.
1965년의 알제리, 66년의 가나(은크루마의 실각)·나이지리아·부룬디·오트볼타·중앙아프리카, 67년의 다호메, 토고·시에라리온, 68년의 말리·콩고, 69년이 리비아·니제르·소말리아·수단, 71년의 우간다, 72년의 다호메·가나 마다가스카르, 73년이 르완다, 74년의 니제르·에티오피아, 75년의 나이지리아·차드 등에서의 쿠데타가 그 예이다. 군사저우건 가운데에는 과도저 r사명을 마치고 문민정권으로 이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군사정건이 장기화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짐바브웨의 독립과정을 보면, 76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하며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함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잉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 6월 짐바브웨·로디지아 괴뢰정권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프리카인 해방세력과 영국·미국이 반대하고 주변 각국의 영국을 움직여 같은 해 가을부터 제헌회의가 열렸고, 모든 당사자가 참석하여 토의한 결과, 화해가 성립되어 80년 4월에 독립이 실현되었다.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라고 불린 나미비아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불법통치하에 시달려 왔는데 88년 12월에 앙골라·쿠바·남아프리카공화국 간에 브라자빌합의가 이루어졌고, 앙골라주둔 쿠바군의 철수문제 등이 해결되었으므로 89년 4월부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435호에 바탕을 둔 독립절차가 개시되었고, 90년 3월 마침내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제국은 모두 독립을 달성하였다.
최근의 아프리카 전반의 동향을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탈 아파르트헤이트화와 더불어 민주화·자유화의 조류가 강해지고 있다. 격변하였던 소련·동유럽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이제까지 쌓인 강원체제의 모순이 분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의 안정이 긴급한 과재이며, 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단계적 창설도 일정에 올랐는데, 일국경제와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가 관건이다. 남아프리카의 변동은 더욱 급격하여 91년 6월에는 마침내 아파르트헤어트의 철폐가 실현되었다.
이상에서 보아 왔듯이 식민지의 통치방식 차이에 따라 독립과정도 상당히 달랐으나, 어느 경우에도 독립운동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어서 요구·폭동·투옥·대립·항쟁 등의 과정을 겪었다.
먼저 1956년에는 수단, 튀니지, 모로코가 독립을 했으며, 57년에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골드코스트가 독립하여 가나가 되었다. 계속해서 58년 기니가 독립했고, 60년에는 1월에 카메룬, 4월에 토고, 6월에 콩고(레오폴드빌, 현 자이르), 세네갈, 말리, 마다가스카르, 7월에 소말리아, 8월에 코트디부아르, 다호메(현 베냉), 어퍼볼타(현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중앙아프리카, 콩고(브라자빌), 가봉, 챠드, 10월에 나이지리아, 11월에 모리타니 등 모두 17개국이 차례로 독립하여 이른바 '아프리카 독립의 해'가 되었다. 이어서 61년에는 시에라리온,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62년에는 르완다, 부룬디, 알제리, 우간다, 63년에는 케냐, 64년에는 니아살랜드(현 말라위), 북로데지아(현 잠비아)가 속속 독립을 이룩하고, 1970년 중반 이후는 전 포르쿠갈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하였다. 그리고 1980년 짐바브웨가, 1990년에는 나미비아가 남아공으로부터 독립을, 1993년 에리트리아가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1994년 남아공이 백인지배하에서 독립하는 등 약간의 나라를 남기고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의 경우, 비교적 초기부터 아프리카인을 정치에 참여시킴으로써, 독립후의 정치운영이 벨기에령에 비해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경우는 '동화정책'으로 프랑스와의 일체화가 이루어졌으며, 독립 후에도 영국 식민지에 비해 본국과의 유대가 보다 강했다(다만 기니는 분명히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자이르)나, 유럽인의 입식지(케냐) 같은 곳에서는 유럽인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서 다른 데에 비해 독립이 난항이었다.
특히 가장 비참했던 것은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참가를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독립욕구에 대해 책임을 포기하는 형태로 사태를 내던진 벨기에령 콩고였다. 즉, 세계 유수의 구리·코발트 등의 광산자원을 가진 콩고에서 외국기업이 끝까지 이권을 유지하려고 획책한 사실이 독립후의 이 나라를 정치적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0년 6월 독립 5일 후에 벨기에 사령관에 대해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다시 7월에 구리산출지인 카탕가주(현샤바주)의 촘베가 이 주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루뭄바 총리가 국제연합군의 출동을 요청하면서 콩고문제는 국제화되기까지 하였다.
영령 식민지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더 발달되었는데도 불령식민지의 독립이 더 빨리 이루어진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프랑스가 그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완전히 분리된 정치단위로 보지 않고 단순한 그들의 해외영토로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고조되어 갈 때도 불령식민지는 독자적인 아프리카 국가로의 독립 보다는 1958년 드골에 의해 제창된 프랑스 연방의 구성원으로 잔류를 택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 기니가 독립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독립의 요구가 높아져 그후 2년 동안 다른 식민지들도 모두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독립국가들은 프랑스와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둘째, 영국은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독립을 위한 사전 준비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영토가 식민지라는 지위에서 완전한 정치적 주권체로 변화하는 것을 간단한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준비기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직면한 과제는, 정치면으로는 국가건설의 방향을 잡는 것과 경제면으로는 모노컬처 경제구조를 불식하는 일이었다.
먼저 정치면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한 방향은 사회주의노선이었다. 첫째는 아프리카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골자는 식민지화 이전의 아프리카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원리를 살려 농민과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칙취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원리에 따라 종래 백인이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 보험회사, 외국무역기업 등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거나 정부가 과반수의 주식을 취득함으로서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의 90% 이상이 종사하는 농사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농형태에서 공동농장, 공동작업, 노동에 따른 생산물의 배분이라는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과학적 사회주의 채택이다. 모잠비크나 앙골라에서는 모든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어 인민의 소유가 되었다. 또 전위당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경제를 계획했으며, 노동조합을 통한 인민의 경영 참가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구소련·동구·중국 등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의 자립화를 성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 수단으로서 첫째로 취해진 것이 백인 입식지에서는 입식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반환이며, 1962년의 케냐의 '100에이커 입식계획'이 그 예이다. 입식지를 세분화하여, 아프리카인에 재입식시켜, 아프리카인 중농을 육성함과 동시에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실업자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또 입식지 이외에 관개시설 건설과 비료의 도입 등, 제도·기술면의 개혁이 이루어져 이를 금융면에서 원조하기 위한 토지은행이나 공사 등이 설립되었다. 둘째로 식민지시기에 백인·인도인이 차지하고 있던 부문의 아프리카인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숙련자나 기술자가 적어 지금까지 운영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상을 포함하여, 경제 전체를 다각화하고 균형이 잡힌 경제구조를 창출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은 계획 실현을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그 재원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차관과 공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압도적으로 1차산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국제경제 변동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며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역저건의 악화와 채무의 누적에 의한 경제적 위기는 국민의 불만을 증대시켰으며 그 불만을 미리 발산한 군부에 의해 정권전복을 기도하는 쿠데타가 독립 후의 아프리카 제국에서 빈발하였다.
1965년의 알제리, 66년의 가나(은크루마의 실각)·나이지리아·부룬디·오트볼타·중앙아프리카, 67년의 다호메, 토고·시에라리온, 68년의 말리·콩고, 69년이 리비아·니제르·소말리아·수단, 71년의 우간다, 72년의 다호메·가나 마다가스카르, 73년이 르완다, 74년의 니제르·에티오피아, 75년의 나이지리아·차드 등에서의 쿠데타가 그 예이다. 군사저우건 가운데에는 과도저 r사명을 마치고 문민정권으로 이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군사정건이 장기화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짐바브웨의 독립과정을 보면, 76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하며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함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잉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 6월 짐바브웨·로디지아 괴뢰정권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프리카인 해방세력과 영국·미국이 반대하고 주변 각국의 영국을 움직여 같은 해 가을부터 제헌회의가 열렸고, 모든 당사자가 참석하여 토의한 결과, 화해가 성립되어 80년 4월에 독립이 실현되었다.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라고 불린 나미비아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불법통치하에 시달려 왔는데 88년 12월에 앙골라·쿠바·남아프리카공화국 간에 브라자빌합의가 이루어졌고, 앙골라주둔 쿠바군의 철수문제 등이 해결되었으므로 89년 4월부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435호에 바탕을 둔 독립절차가 개시되었고, 90년 3월 마침내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제국은 모두 독립을 달성하였다.
최근의 아프리카 전반의 동향을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탈 아파르트헤이트화와 더불어 민주화·자유화의 조류가 강해지고 있다. 격변하였던 소련·동유럽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이제까지 쌓인 강원체제의 모순이 분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의 안정이 긴급한 과재이며, 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단계적 창설도 일정에 올랐는데, 일국경제와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가 관건이다. 남아프리카의 변동은 더욱 급격하여 91년 6월에는 마침내 아파르트헤어트의 철폐가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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