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역사

africa club 2001. 10. 19. 13:57
5.1 식민지 시대

1) 아프리카 분할

1870년대의 제국주의가(帝國主義家)에 들어선 유럽열강은 공업제품시장과 원료 공급원을 찾아서 아프리카를 분할해갔다. 그러나 이전까지 상인이나 선교사들의 활동에만 맡겨졌던 아프리카 개발은 국가적 사업이 되고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점거하여 19세기 말부터 20여년 동안 서구열강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경쟁이 최고조에 달했다. 먼저 서부아프리카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말 신흥제국들인 독일, 벨기에, 포르트갈 등과 함께 중부, 동부, 남부아프리카에서 본격적인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식민지획득은 주로 무력에 의해 행해졌으며 간혹 정복이외에 족장이나 추장들과의 계약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말에 이미 모든 아프리카 대륙이 서구열강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후, 통일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적대감정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프랑스의 관심을 식민지 획득에 쏠리게 하였으며, 프랑스는 81년 튀니스를 병합했다.
이집트에서는 79년 부오아 이스마일이 영국·프랑스의 재정관을 해임시켰다는 이유로 양국 정부는 부오아를 퇴위시켜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라비 파샤의 반란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으로 그 진압에 나섰으니, 프랑스의 국내위기 때문에 영국은 단독으로 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다. 수에즈운하 개척에 다액을 투자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그 대상(代償)으로 서아프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앙·서아프리카에서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분지의 지배를 목표로 1876년 국제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는 탐험가드 브라자를 파견하여 82년 콩고 하구 북쪽 지역을 획득했다. 한편 영국은 84년 상인 뤼더리츠의 요청에 따라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의 영유를 주장하였으며, 서아프리카에서도 같은 해 토고란드와 카메룬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콩고분지의 지배를 결정하기 위한 베를린회의가 84년 11월에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포르투갈의 콩고분지의 지배를 거부하고, 레오폴드 2세의 콩고자유국에 의한 지매와 그곳에서의 각국의 자유무역을 인정했다. 한편 프랑스는 니제르강 상류 지역으로부터 항구 쪽으로 세력을 신장하려 했으나 도중에 만딩고제국을 재건하려는 사모리 투레의 저항을 받아 지연되었으며, 그 동안 영국은 상인 골디의 요청으로 해안부를 영유했다.
동아프리카 해안부는 잔지바르의 술탄 지배하에 있었는데 독일식민지협회의 피터스가 내륙수장(首長)들과 맺은 협정을 방패로 하여, 독일은 83년 베를린회의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팅가니카)의 영유를 인정케 했다.
한편 영국은 1879년 매키논은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얻은 특권을 방패로 하여 영국령 동아프리카(케냐)의 영토권을 주장하여, 86년 영·독협정에 의해 동아프리카내륙부를 이분했다. 이어서 영국·독일의 관심은 나일강수원에 쓸렸으며 양국의 각 특허회사는 부간다왕국에 사절을 파견했으나 독일이 한발 나섰다. 그러나 90년 영·독협정으로 독일은 영국의 우간다 영유와 잔지바르의 보호령화를 인정했으며, 그 대신 영국은 북해의 헬골란트섬을 독일에 할양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리트리아와 소말리랜드를 영유하고 있었는데 88·89년 프랑스·영국과 가가 협정을 맺어 이 지역을 삼분할(三分割)했다. 동아프리카해안부 술탄의 주권을 인정한 영·불협정 (1862)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영·독협정으로 잔지바르를 보호령화한 데 대해,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보호령화를 영국이 인정케 했다. 또한 프랑스는 영국의 로열니제르회사의 북방확대를 두려워하여, 90녀 영국은 수단을 재정복하려고 키치너사이끄른 이집트군을 파견하고, 98년 옴두르만 싸움에서 마흐디군을 무찌르고 하르툼에 들어갔다. 한편 프랑스는 마르상 사령관의 군대가 동진하여 파쇼다로 진군하여 98년 양군을 파쇼다에서 대치했는데, 이교교섭 결과 프랑스가 철퇴했다(파쇼다 사건).
남아프리카에서는, 1880년 영국여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은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아회사가 북방 마타베렐란드와 마쇼날란드의 병합(로디지아)을 기도했으며, 동시에 바고첼란드(잠비아), 니아살랜드(말라위)도 병합했다. 그러나 마니칼란드(모잠비크의 일부)에서는 포르투갈과 대립하여, 90년 영국·포르투갈협정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로즈는 보어인 공화국(트란스발과 오렌지자유국)과의 병합을 기도하여, 95년 제임스 침입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로즈의 정치생명은 끝났다. 그 뒤 영국의 남아프리카 정책은 G.체임벌린 식민장관과 G.밀너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에 인계되었으며, 99년 그들은 마침내 보어인 공화국과 개전(開戰)하였고 1902년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보어전쟁의 종결로,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은 사실상 끝났다.
이처럼 아프리카대륙은 서구 열강들의 의욕적인 협력계의 산물로서 분할되어 열강들의 식민지화 되었다. 또한 아프리카대륙의 분할에 있어 아프리카의 자연적, 지리적, 지정학적인 조건이나 아프리카인들의 역사, 사회, 정치, 경제 및 인종, 문화 등의 여러 사실과 여건들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독립이후 아프리카 발전을 가로막는 주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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