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도·탐험의 시대
노예무역의 폐지와 함께 유럽 각국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미개인'으로 생각해왔던 아프리카인에게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전하고, 동시에 유럽문명을 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대륙으로 들어갔다.
16세기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은 동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한 적은 있었으나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당한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는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이 중단되었다. 17세기 중반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주도된 복음 전도 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원리를 재인식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선교단체들이 결성됨으로써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비인도주의적인 노예무역의 종식에 앞장섰으며 18세기 말엽 부터는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침례교 선교회가 1792년에, 런던선교회가 1799년 그리고 감리교 선교회가 1813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과 이 지역의 자연적인 악조건으로 선교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또한 19세기중엽 영국은 자유무역주의의 전성기였고 영토적 야심은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선교사들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은 포교와 함께 교육도 하였으며, 뒤의 식민지시대에는 아프리카인 초등교육은 대부분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담당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을 증가시킨 또 다른 이유는 1815년부터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유럽사회의 향상된 생활수준의 변화이다. 즉 생활 수준의 향상은 해외 탐험과 선교활동 지원을 위한 자금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한편 그때까지 아프리카해안부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내륙은 거의 공백부로 남아 있었다. 이 미지의 공백부를 밝히기 위해, 영국에서는 1788년 아프리카 내륙발견협회 선교사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 전도에 종사하였으며, 나아가서 내륙에 대한 포교를 목표로 중동부아프리카에 세 차례 탐험을 하여 지리상의 중요한 발견을 이루고 동시에 내륙부에서 노예사냥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그 폐지를 호소했다.
사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대륙을 발견하기는 오래되었지만 일부 해안지역만 그들이 이용했을 뿐이며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답사는 부진했다. 유럽인들은 리빙스턴이 그의 글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은 미덕과 결점을 지닌 그들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인들 보다는 아프리카 자체의 지리적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서아프리카에 있는 니제르강의 수원·수류·하구의 신비를 캐기 위해, 내륙발견협회는 M파크·D.데넘·H.클래퍼턴·랜더 형제들을 파견하여 1830년에는 니제르강의 신비가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수원에 <달의 산>이 있다고 한 나일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왕립지리협회는 19세기 중엽, 버턴·스피크·그랜트·베이크 등을 파견했으며, 그 수원과 내륙부에 있는 엘버트호(湖)·빅토리아호·탕가니카호가 잇따라 밝혀졌다. 그리고 이 탐험기의 최후를 장식하여, 1870년대에는 스텐리가 콩고강의 수원으로부터 하구까지를 답사했다.
이 여행은 종래의 순수한 지리학적 관심에서 나온 탐험과 그 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한 이 지역의 사유화를 계기로 유럽각국의 영토적 야심이 노출된 <아프리카 분할>의 시발점이 되었다.
노예무역의 폐지와 함께 유럽 각국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미개인'으로 생각해왔던 아프리카인에게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전하고, 동시에 유럽문명을 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대륙으로 들어갔다.
16세기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은 동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한 적은 있었으나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당한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는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이 중단되었다. 17세기 중반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주도된 복음 전도 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원리를 재인식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선교단체들이 결성됨으로써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비인도주의적인 노예무역의 종식에 앞장섰으며 18세기 말엽 부터는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침례교 선교회가 1792년에, 런던선교회가 1799년 그리고 감리교 선교회가 1813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과 이 지역의 자연적인 악조건으로 선교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또한 19세기중엽 영국은 자유무역주의의 전성기였고 영토적 야심은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선교사들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은 포교와 함께 교육도 하였으며, 뒤의 식민지시대에는 아프리카인 초등교육은 대부분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담당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을 증가시킨 또 다른 이유는 1815년부터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유럽사회의 향상된 생활수준의 변화이다. 즉 생활 수준의 향상은 해외 탐험과 선교활동 지원을 위한 자금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한편 그때까지 아프리카해안부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내륙은 거의 공백부로 남아 있었다. 이 미지의 공백부를 밝히기 위해, 영국에서는 1788년 아프리카 내륙발견협회 선교사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 전도에 종사하였으며, 나아가서 내륙에 대한 포교를 목표로 중동부아프리카에 세 차례 탐험을 하여 지리상의 중요한 발견을 이루고 동시에 내륙부에서 노예사냥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그 폐지를 호소했다.
사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대륙을 발견하기는 오래되었지만 일부 해안지역만 그들이 이용했을 뿐이며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답사는 부진했다. 유럽인들은 리빙스턴이 그의 글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은 미덕과 결점을 지닌 그들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인들 보다는 아프리카 자체의 지리적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서아프리카에 있는 니제르강의 수원·수류·하구의 신비를 캐기 위해, 내륙발견협회는 M파크·D.데넘·H.클래퍼턴·랜더 형제들을 파견하여 1830년에는 니제르강의 신비가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수원에 <달의 산>이 있다고 한 나일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왕립지리협회는 19세기 중엽, 버턴·스피크·그랜트·베이크 등을 파견했으며, 그 수원과 내륙부에 있는 엘버트호(湖)·빅토리아호·탕가니카호가 잇따라 밝혀졌다. 그리고 이 탐험기의 최후를 장식하여, 1870년대에는 스텐리가 콩고강의 수원으로부터 하구까지를 답사했다.
이 여행은 종래의 순수한 지리학적 관심에서 나온 탐험과 그 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한 이 지역의 사유화를 계기로 유럽각국의 영토적 야심이 노출된 <아프리카 분할>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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