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대 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흥망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BC 10세기 무렵 이집트 남쪽에서 일어난 쿠시왕국이다. 나일강 종류의 나파타가 수도였던 이 왕국은 고대이집트왕조가 쇠퇴함을 틈타 이집트를 정보하고 제25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BC 667년에 아시리아군의 침입을 받아 남방 메로웨로 도읍을 옮기고 메로웨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인도양에 이르는 교역 루트와 제철기술로 번성했으며, 독자적인 메고웨문자를 발명했다. 그 문화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큰 구조물을 많이 건설했다. 그러나 기원 전후에 로마군의 침략을 받고 또 BC 350년에는 교역 루트를 장악한 악숨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악숨왕국은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전신으로, 아라비아반도와 강한 우대를 가졌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6세기에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에 대항했으나 오히려 번영했다. 6세기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에 대항했으나 오히려 페르시아에게 멸망되었다. 서(西)수단 지방에서는 8세기에 가나제국이 번성했는데, 왕가라족의 금(金)과 북쪽의 아랍인이 가지고 온 소금의 교역을 중개하여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 수도는 쿰비살레였으며 아랍인 여행가 알바크리가 11세기 초 궁정의 번영상을 기록하였다.
11세기 후반, 북쪽의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제국의 이슬람 개종(改宗)을 기도하여 남하했는데 1075년에 제국은 멸망했다. 그 뒤 1240년, 만딩고 족이 이 지역에 말리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은 세력을 서방으로 확대하여 왕가라, 밤부크를 포함하여 감비아강에 이르는 일대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 경제적 기초는 사하라를 넘는 교역에 부과한 세수(稅收)였으며, 14세기에는 니제르강 만곡부에 있는 통부크투가 상업·학문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제3대 만사무사왕은 1324년 여러 종자(從者)와 함께 황금을 가지고 메카를 순례하는 도중에, 카이로에서 황금을 물쓰듯하여 카이로의 금 시세가 10년 이상 동안 떨어졌다고 한다.
왕의 사후, 제국은 차츰 쇠퇴하여 아들 마가왕시대에는 모시 족에게 통부크투를 빼앗겼다.. 제 5대 슬레이만 왕은 세력 회복에 힘썼으며, 이 시기에 말리제국을 방문했던 아랍인 역사가 이븐 바투타는 <삼대륙 주유기>에서 그 번영상과 정연했던 국내질서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초에 북방의 유목민 투아레그족과 남쪽 모시족의 침략을 받고, 1473년 송가이제국에의해 젠네를 점령당해 말리제국은 멸망했다. 송가이제국의 손니 알리왕은 투아레그족·모시족을 추방하고, 니제르강 상·중류 지역에 일대 제국을 구축했다.
1493년에 즉위한 무하마드왕은 광대한 통치조직을 확립하고 과세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제정을 안정시켰다. 또 이슬람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사하라를 넘는 교역은 활발해졌으며 젠네, 통부크투, 우알라타 등의 도시는 교역·종교·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남쪽의 카치나, 자리아, 카노의 하우사족 등 여러 국가를 멸하여 영토는 대서양 연안까지 이르렀으며 부5방에서는 투아레그족의 근거지 에일과 아가데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계속되던 계승자 싸움과 1590년 북방 모로코군의 남하로 송가이제국은 멸망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시아파 사람들이 오만에서 이주해왔다. 아람인은 이 지역을 잔지라 하여 라무, 말린디, 몸바사, 펨바, 잔지바르, 킬와, 모잡비크, 소팔라등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아랍인은 잔지의 산물인 금·철·상아·노예 등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인도로 운반하였고, 인도산의 직물류와 장식구슬, 중국제 도자기를 들여왔다. 해안 제도시의 번영에 관해서는 10세기으 아랍지리학자 마수디나 12세기의 모고코 지리학자 알이드리시가 기록하고 있다. 이들 동해안의 도시들은 인도양 교역이라는 상업활동을 공통된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외에 이슬람문화와 스와힐리어를 공유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1417∼19년에는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함대를 이끌고 동아프리카해안에 내항하였다. 그 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동해안에 도래한 이후 포르투갈인이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여 공물을 강요했으며, 무력으로 도시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 도시들은 단독으로 또는 연합하여 포르투갈인에 대항했으나, 그 대부분은 패하여 해안부 및 인도행 교역은 포르투갈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상의 고대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대부분 그 경제적 기반을 <장거리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제학자 비드로비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한 변형으로 <아프리카적 생산양식>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BC 10세기 무렵 이집트 남쪽에서 일어난 쿠시왕국이다. 나일강 종류의 나파타가 수도였던 이 왕국은 고대이집트왕조가 쇠퇴함을 틈타 이집트를 정보하고 제25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BC 667년에 아시리아군의 침입을 받아 남방 메로웨로 도읍을 옮기고 메로웨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인도양에 이르는 교역 루트와 제철기술로 번성했으며, 독자적인 메고웨문자를 발명했다. 그 문화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큰 구조물을 많이 건설했다. 그러나 기원 전후에 로마군의 침략을 받고 또 BC 350년에는 교역 루트를 장악한 악숨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악숨왕국은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전신으로, 아라비아반도와 강한 우대를 가졌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6세기에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에 대항했으나 오히려 번영했다. 6세기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에 대항했으나 오히려 페르시아에게 멸망되었다. 서(西)수단 지방에서는 8세기에 가나제국이 번성했는데, 왕가라족의 금(金)과 북쪽의 아랍인이 가지고 온 소금의 교역을 중개하여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 수도는 쿰비살레였으며 아랍인 여행가 알바크리가 11세기 초 궁정의 번영상을 기록하였다.
11세기 후반, 북쪽의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제국의 이슬람 개종(改宗)을 기도하여 남하했는데 1075년에 제국은 멸망했다. 그 뒤 1240년, 만딩고 족이 이 지역에 말리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은 세력을 서방으로 확대하여 왕가라, 밤부크를 포함하여 감비아강에 이르는 일대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 경제적 기초는 사하라를 넘는 교역에 부과한 세수(稅收)였으며, 14세기에는 니제르강 만곡부에 있는 통부크투가 상업·학문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제3대 만사무사왕은 1324년 여러 종자(從者)와 함께 황금을 가지고 메카를 순례하는 도중에, 카이로에서 황금을 물쓰듯하여 카이로의 금 시세가 10년 이상 동안 떨어졌다고 한다.
왕의 사후, 제국은 차츰 쇠퇴하여 아들 마가왕시대에는 모시 족에게 통부크투를 빼앗겼다.. 제 5대 슬레이만 왕은 세력 회복에 힘썼으며, 이 시기에 말리제국을 방문했던 아랍인 역사가 이븐 바투타는 <삼대륙 주유기>에서 그 번영상과 정연했던 국내질서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초에 북방의 유목민 투아레그족과 남쪽 모시족의 침략을 받고, 1473년 송가이제국에의해 젠네를 점령당해 말리제국은 멸망했다. 송가이제국의 손니 알리왕은 투아레그족·모시족을 추방하고, 니제르강 상·중류 지역에 일대 제국을 구축했다.
1493년에 즉위한 무하마드왕은 광대한 통치조직을 확립하고 과세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제정을 안정시켰다. 또 이슬람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사하라를 넘는 교역은 활발해졌으며 젠네, 통부크투, 우알라타 등의 도시는 교역·종교·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남쪽의 카치나, 자리아, 카노의 하우사족 등 여러 국가를 멸하여 영토는 대서양 연안까지 이르렀으며 부5방에서는 투아레그족의 근거지 에일과 아가데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계속되던 계승자 싸움과 1590년 북방 모로코군의 남하로 송가이제국은 멸망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시아파 사람들이 오만에서 이주해왔다. 아람인은 이 지역을 잔지라 하여 라무, 말린디, 몸바사, 펨바, 잔지바르, 킬와, 모잡비크, 소팔라등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아랍인은 잔지의 산물인 금·철·상아·노예 등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인도로 운반하였고, 인도산의 직물류와 장식구슬, 중국제 도자기를 들여왔다. 해안 제도시의 번영에 관해서는 10세기으 아랍지리학자 마수디나 12세기의 모고코 지리학자 알이드리시가 기록하고 있다. 이들 동해안의 도시들은 인도양 교역이라는 상업활동을 공통된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외에 이슬람문화와 스와힐리어를 공유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1417∼19년에는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함대를 이끌고 동아프리카해안에 내항하였다. 그 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동해안에 도래한 이후 포르투갈인이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여 공물을 강요했으며, 무력으로 도시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 도시들은 단독으로 또는 연합하여 포르투갈인에 대항했으나, 그 대부분은 패하여 해안부 및 인도행 교역은 포르투갈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상의 고대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대부분 그 경제적 기반을 <장거리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제학자 비드로비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한 변형으로 <아프리카적 생산양식>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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