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역사 3

africa club 2001. 10. 19. 13:56
3. 노예무역시대

15세기 유럽인의 대항해시대 개막은 종래부터 있어왔던, 북아프리카로부터 사하라사막을 넘는 교역과 인도양을 통한 동아프리카의 아랍인 교역대신, 그들이 아프리카해안부와 접촉할 기회를 가져왔다.
개막 당시 유럽인의 목적은 동인도와의 향료무역(香料貿易)이었으며, 아프리카해안선은 단순히 원양향해를 위한 보급기지로서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광산개발과 사탕수수·담배·인디고(염료) 등의 플렌테이션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력으로서의 아프리카인 노예의 가치가 올라가고 포르투갈·에스파냐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여러 나라가 대서양노예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에는 서인도제도에 대한 노예수출, 서인도제도로부터 유럽으로 열대산물의 수출, 그것을 받아들여 가공한 제품을 아프리카로 운반하여 노예와 교환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이 성립하여 노예수출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대서양노예무역의 규모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종래 갖가지 추정(推定)이 시도되어 왔으나, 통설로는 1500만∼2000만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 통설에 대해 의스코신 대학 역사학 교수 커틴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추정에 의해 종래의 통설을 정정하였다.
먼저, 종래의 통설 형성과정을 박히고 그 비과학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나서 직접적인 증거로서 한계는 있으나 노예수입치를 사용했으며 나아가서 선적기록 (노예무역에 관여했던 선박수, 적재량, 항해중의 손실, 즉 벌병, 기아, 반항 등에 의한 사망 등)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간접자료조서 인용 가능한 인구통계나 서인도제도 및 미국의 생산력 등에 따라 추계를 내서 4세기 반에 걸친 노예무역 규모를 956만 6100명으로 했다.
그 시대별 수출수는 1456∼1600년 27만 4900명, 1601∼1700년 134만 1100명, 1701∼1810년 605만 1700명, 1811∼1870년 189만 8400명으로 최전성기는 18세기였다. 수출선은 전기간을 통해 최대가 남아프리카로서 470만 명, 그 다음은 카리브해제도로서 404만 명, 북·중앙아메리카가 65만 1000명, 유럽이 17만 5000명으로 되어 있으며, 나라별로는 브라질, 아이티, 자메이카, 쿠바 순으로 되어 있다. 또 수출측 서아프리카를 보면 제네감비아로부터 곡물해안·상아해안에 이르는 상(上)기니는 노예수출이 비교적 적었으며, 골드코스트로부터 카메룬에ㅐ 이르는 하(下)기니, 그 중에서도 니제르강 하구주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럽인이 해안부족에서 무기·화약을 제공하고, 내륙부족에게 인도하는 식으로 노예포획이 이루어졌고, 그 거래에는 금·은화가 아니라 갖가지 유럽제품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남녀 두 사람의 노예에 대해서는 연초 한두름·관상(管狀)산호 한 연·머스킷총 1정·단검 3개·러주(酒) 3병·린넨손수건 24장·1파인트들이 용기 12개 등이었고, 특히 총·화약·주류(酒類)·직물류 등이 주요 거래상품이었다.
이 노예무역이 서아프리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첫째, 아프리카 인구의 감소이다. 이 문제는 주로 한창 일할 나이인 청년층들이 노예의 주 대상이 됨으로써 아프리카 경제발전에 큰 저해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무역과 산업 즉 경제적인 영향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아프리카의 정치, 사회학적인 변화를 들 수 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영국에서 주로 인도적인 이유에서 노예제 및 노예무역을 폐지하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W. 월버포스는 T.크라크슨 등과 함께 1786년 노예무역폐지협회를 설립했다. 이어서 그들은 1823년 반노예제협회를 창립하고 의회에 출두했으나, 노예제로 이익을 보고 있던 상인이나 플랜테이션 소유자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못보고, 1833년에야 가까스로 영국제국 내의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어서 영국은 다른 유럽 여러나라에 대해서도 노예무역 및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호소하여, 잇따라 폐지되어갔다. 그러나 폐지 후에도 노예밀무역은 계속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노예무역이 끝난 것은 1870년대가 되어서였다.
노예무역폐지 후, 노예를 대신하게 된 상품으로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찾은 것은 열대산물이었다. 즉, 서아프리카해안부의 야자유(뒤에는 팜핵도 포함)와 세네갈이 땅콩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산업혁명을 껶은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비누·윤활유·양초의 원료가 되는 야자유, 마가린·사료의 원료인 팜핵, 식물성기름을 제공하는 땅콩의 수요가 컸다. 야자유 수출량은 1810년 불과 1000톤 이던 것이 42년 2만톤, 55년 4만톤, 땅콩은 40년대의 제로 단계에서 19세기 말에는 매년 평균 3만톤으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이들 합법무역의 생산물은 대부분이 아프리카인 소농에 의해 소규모로 재배된 것이었으며, 유럽인은 집하(集荷)된 산물을 해안부에서 거래한 데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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