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시사용어사전

아프리카와 중동(Africa and the Middle East)

africa club 2001. 11. 19. 21:23
아프리카와 중동(Africa and the Middle East)
이것은 아프리카국가들과 중동국가들(일반적으로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흥해와 아덴만에 이르는 모든 남부 국가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국가와 중동 국가들은 인접해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중동 국가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의 절반 이상도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아랍어는 터키, 이란,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중동 국가들의 주요 언어이며 모리타니아, 모로코, 서부사하라, 알제리, 튀니지아. 리비아, 이집트 그리고 북부 수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1945년 아랍의 단결을 중진시키기 위해 형성된 아랍연맹에는 처음부터 가입한 이집트를 포함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점차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가입하였다. 이집트는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아랍연맹에서 축출되었다. 아프리카의 아랍연맹 국가로는 모리타니아,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아, 리비아, 수단, 지부티 그리고 소말리아 등의 국가이다. 이중 소말리아와 지부티는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종교적인 면에서 이슬람 문화권이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함에 따라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동과 관계를 설립하였다. 흑아프리카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첫 번째 문제는 폭넓은 범아프리카주의의 개념정립이었다. 가나의 은쿠르마, 기네아의 세꾸뚜레,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같은 급진적인 지도자들은 범아프리카주의의 의미 적용에 있어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도 포함하고 있다. 보수주의적 지도자로써 간주되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 즉 사하라이북 국가들을 신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 북부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추구하였을 때 그들이 아프리카 국가로서가 아니라 중동 국가로서 취급하였다. 예를들면. 모로코가 독립을 추구하였을 때 그 나라 지도자들은 "모로코의 독립은 전체 아랍 마그레브가 독립을 하지않는 이상 완전한 독립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흑아프리카가 아니다라는 것을 내포하였다.
그러나 OAU가 1963년에 형성되었을 때 남아공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북아프리카 포함)이 참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는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유대관계를 맺으면 단교를 하는 등 내분이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고 있었으며 도로건설, 건축, 기술훈련 그리고 차관 등 많은 유용한 프로젝트들을 위한 기술을 원조 받았다.
가장 많은 이슬람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나이지리아조차 이스라엘의 원조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1973년초 부룬디, 차드, 콩고, 에티오피아, 기네아, 코뜨디부아르, 케냐, 말리, 니제르, 탄자니아, 우간다 그리고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등 12개국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한 학자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한 급진적이고 보수적인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1)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을 병행하며 진출. (2)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와 이주를 원하는 미국의 블랙유태인들의 귀국을 허용치 않고 있다.  (3) 이스라엘이 우간다의 오보해 정권을 전복시킨 아민을 도왔다는 것.  (4) 북부아프리카 국가들이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형제애'로써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전환점은 1973년 10월 OAPEC(아랍석유 수출국 기구:OPEC)이 설립되어 이스라엘과 대항하기 위해 석유를 무기화 하였을 때부터이다. 석유를 공급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국가를 모든 국가들이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석유가를 올림으로써 아프리카 국가들은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소토, 말라위, 남아공 그리고 스와질랜드 등 일부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OAPEC는 1974년 4배로 오른 오일가격을 차감해 주기 위해 7억달러를 아프리카에 제공하였다. OAU는 OAPEC의 지원이 너무 적다고 비난하고 아프리카 개발은행으로 간접적인 지원을 바랬다. 한편,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에서의 인종주의 형태인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의결권에서 아랍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77년 3월 7일 부터 9일까지 카이로에서 아프리카-아랍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그 지역에는 고도의 긴장감이 있었다. 가나대표는 아랍국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우리는 공군과 육군의 군사훈련을 도와주고 있던 수백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추방하였다. 우리는 아랍국이 우리를 원조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OAU도 또한 약속을 받았다. 우리는 기다렸으나 원조는 거의 오지 않았거나 전혀 오지 않았다". 탄자니아는 아랍국들이 수백만달러의 원조로 생색을 낸다고 비난하고 최근의 원조로 22억달러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아랍국들은 14억 5천만달러(이는 파키스탄 한 나라에 차관해 준 액수 보다도 적다)를 5년에 거쳐 원조하는 것으로 설득하였다 이 정상회담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시오니즘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공동 행동을 위해 밀접한 노력을 추구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폐막되었다.
OAU는 아랍의 원조가 너무 적고 AfDB 보다는 오히려 아랍국가들에 의해 원조가 통제되며 원조의 우선권이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나 무슬림 국가부터 지급되는데 비난하였다. 이집트가 아랍연맹에서 축출되었을 때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아랍연맹이 이집트를 OAU로부터 축출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OAU는 거절하였으며 아랍분쟁들은 아프리카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 아프리카-아랍 정상회담이 연기되었으며 아프리
카-중동간의 장래가 불명확해 졌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OAU와 아랍연맹에 동시에 가입된 국가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연맹 아프리카 국가들과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똑같은 입장에서 중동문제를 인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랍연맹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소멸을 원했으며 대신 팔레스타인의 대체를 원했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그곳에 남아있는 것에 동의를 하는 것 같았고 반면, 팔레스타인의 고향으로의 귀향도 동의하였다. 더 나아가 아프리카 국가로서 뿐만 아니라 아랍국가로서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 복원을 희망하였다. 사실 나이지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 정상 지연에 대해 아랑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만일 팔레스타인에게 홈랜드가 주어진다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 코뜨디부아르 그리고 라이베리아는 외교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콩고민주공화국은 1982년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1980턴의 OAU 정상 회담에서는 이집트의 축출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을 이끌었던 캠퍼 데이비드(Camp Davies)를 비난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아프리카와 중동간의 관계는 불안정하며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반면, 오일달러와 아파르테이트에 반대하는 것은 중동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아파르테이트와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아프리카 국가와 중동국가들이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