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
1960년대초 아프리카 국가의 권위주의 정 치의 특징은 독자적, 집단적 성향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망의 정권들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도피하거나 해외에서 반대 단체를 형성했지만, 이보다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원조국의 정책변화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성향(pro-democracy)과 대륙내 인권단체의 성장이었다.
법률가. 학생, 광부, 농촌 여성 조직, 도시 노동자와 비고용자, 언론인들, 성직자와 다른 여러 사회단체들은 폭력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정권의 결과로 민주주의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케냐에서 급진장로교성직자는 다당제 선거를 요구했고, 가두시위를 일으켰다. 봉고(Omar Bongo) 가봉 대통형 반대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상점약탈과 리브레빌레(Livreville) 거리에서 대중폭동을 초래하게 되었다.
축구시합(결승전)에서 수십명이 반정부 슬로건을 부르짖음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바레(Mohammed Siad Barre) 전대통령의 경호원들에 의해 저격되어 죽음을 당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라트시라카(Didies Ratsiraka) 대통형 정부는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대중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1989년, 중국 천안문광장에서 폭력장면 포스트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삐라들은 "경계의 의미"였다. 그들은 학생들과 민주주의 성향이 아닌 학생들을 죽인 영웅적인 군인들의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에 대한 공공연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인 압력을 취하는 활동가들과 사회단체들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요구함으로써 민주주의 시위가 진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이상화 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실질적인 동기가 있으므로 다소의 희생이 따랐으며, 초기 정치인들을 포함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직접 하려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윤을 취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현 정치노선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Mobutu Sese Seko) 전대통령과 같이 아프리카에서 부를 사유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선교사학교의 요리사와 아들로 태어난 모부투의 개인 재산은 수억 달러로 추정되었고 해외 재산은 "열 한 개의 성과 벨기에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파리에 있는 건물, 니스에 호화로운 저택, 스위스에 32개의 침실 빌라, 해변 빌라, 그리고 스페인에 16 세기 성.
자이레(콩고민주공화국)에서 모부투의 영지는 민주주의 시위, 다수 야당체제, 대통령 친위대에 대항했던 이들에 행한 폭력과 살인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었다. 1991년 8월, 9월메 20개가 넘는 정치야당, 신성 연합 (Sacred Union)의 반대 움직임이 다수당 정치로의 전환에 대한 국가 회의에 개입하기 위해 모부투의 결정을 논박함으로써 진압경찰과 충돌했다. 모부투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아주(극한) 교활하면서도 성공적인 정치인의 또다른 본보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 또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허용하려는 모부투의 결정은 "60에 온 지혜"라는 현실의 결과이다. 또한 마다가스카르의 라트시라카 대통령은 야당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났다. " 내가 옳을지 라도 나는 허리를 숙일 것이다. "라고 그는 라디오 방송에서 청년들에게 말했고, 지속적으로 연합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야당과의 회담을 요구했다.
모부투와 라트시라카의 대중에 대한 굴복은 아프리카대륙에 전반적으로 나타났던 민주주의 요구의 물결에 대한 지도층의 대답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이 처음으로 경제적 불만과 연관되어 나타났다. 예를들어 잠비안에서 처음으로 의사들이 물가상승에 대한 반발로 폭동을 일으켰다. 물가하락은 1989년부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1989년 7월 주요생산물인 옥수수의 가격이 두 배가 되었다. 가격은 옥수수 비용이 미국 달러 7.40 달러로 1990년 6월 다시 두 배가 되었다. 저임금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주당2.0 미국 달러이다. 물가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다만 더 큰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다.
계속적인 민주화는 잠비아의 일당 체제 종료와 카운다(Kenneth Kaunda)사임을 요구했다. 대학에서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은 '카운다는 가야만 한다. ' 그리고 '제거 카운다'를 외쳤다. 이와같은 문제에 관해한 청년은 '정부는 참여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카운다보다도 나아질 수 있었다. '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불안 또는 민주주의 요구에 응하던 응하지 않든간에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이 몇 가지의 길을 선택했다. 모두가 외부원조국 또는 토착 활동가로부터 민주주의 요구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세 방법중 한 방법을 택했다. : 저항의 우회적 방법의 모색, 경영 변화, 또는 유동성의 변화. 따라서 민주주의 요구의 걸과 또는 권위주의 저항은 아프리카대륙 전반을 통해 다양화되었다. 변화의 세 가지 유형은 몇 가지 경우에 있어 약간의 의문을 제시하였지만 차츰 진전되어 왔다.
1. "성공적인 민주화" : 이러한 것들은 지도층을 싸고 있던 국가들이 민주주의 움직임으로부터 다수당 경선으로 압력에 굴복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공직(직무)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베넹과 까뽀베르더가 그 예이다.
2. "일인 권위주의 저항" : 권위주의 집권자들은 내외 부로부터 민주주의 성향에 저항 해 왔다. 케냐와 코트디브아르가 그 적절한 애이다.
3. "재구조, 전환과 지연": 어떤 정치 지도자들은 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나서 그와같은 압력을 전환시키기 위한 모색책을 찾으면서 이에 응해 왔다. 나이지리아의 바방기다 군사정권은 1992년 제 3 공화국에 대한 움직임과 카운다의 잠비아의 경우에서와 마친가지로 이러한 것을 설명해 준다.
케이프베르데는 1974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서아프리카 해변의 화산섬국가이다. 1991년 2월 17일에 대통령 페레이라(Aristedes Pereira)는 17년간 일당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다수당 선거에서 패배했다. 새 대통령 몬테리오(Antonio Mascarenhas Monterio)와 새롭게 창당된 민주당 의장인 베이가(Carlos Veiga)는 73.5%를 얻음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 베이가는 급격한 실업위기를 개선할 것을 약속했고 관광업을 포함하여 외국 자본의 계속적인 투자를 희망하였다. 선거는 매우 순조로왔고 계속적인 세력의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 이동이 계속되었다. ) 이와같은 사건들은 후기 아프리카 독립국들에게서 현저히 나타난다. 일당통치자들은 정권을 포기했으며 평화적 변화의 설명은 비교적 순조롭게 나타났다. 청년들과 추방된 이들은 페레이라 정부의 침체된 사회주의와 같이 불행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힘을 정비하기 시작했으며 은밀히 변화해 나아갔다. 이러한 것은 케이프베르데 통치의 특징을 나타내었다. 여러 국가들이 전아프리카 포르투갈형 의 나머지 나라들이 싸워왔던 것처림 케이프베르데의 경험을 알고 있다.
다당제 민주주의로의 변화는 베넹에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졸업한 고등학생들의 항의로 1985년 초기에 일어났다. 민주주의 변화로의 저항은 부분적으로 전 마르크스주의 독재자 케레쿠(Mathieu Kerekou)에 기인했다. 케레쿠는 그가 다당제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던 개혁정치를 관장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쓰곤 했다. 또한 프랑스의 관여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베넹은 "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실험의 연구 장소"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의 목적은 잠재적인 큰 소동없이, 어떠한 경제적인 원조도 없이 불어권 아프리카의 정치적 개혁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알렌(Allen)은 카톨릭교회와 지지로 민주화의 반대세력이 성장하게 된 것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교회는 민주주의 변화를 요구했던 서문을 공포했고, 이를 전환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움직임의 근거는 학생들과 대중의 결합이었다.
대중민주주의는 1989년 12월부터 암암리에 진행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IMF는 인권향상. 마르크스 발전전략의 포기, 그리고 다당제 정치에로의 움직임으로 케레쿠정부를 궁지로 몰았던 베넹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케례쿠는 민주주의 발전에 도전함으로써 이에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으며, 1990년 2월 자신의 수상으로서 개혁적 자본주의 기술관료인 전 재무장관 소글로 (Nicephore Soglo)를 인정했다. 후에 소글로는 1991년 3월 대통령선거에서 케레쿠에게 승리함으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베넹의 450만 인구는 막스-레닌주의의 17년간의 군사정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소글로가 무너진 베냉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지방자본, 외국자본투자를 함으로써 레닌주의가 급격히 무너져 갔다.
Africa Confidential Newsletter는 베넹이 정치적으로 독재정치의 붕괴 속에서 다당제 민주주의의 한 모델로 어떤 다른 나라들보다도 성공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소글로 자신은 이러한 민주화가 유혈없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이밖에 아프리카의 정치지도자들은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압력을 수용함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다. 서 구원조국들과 나이로비에서 정치적 실무가들로부터 일어나는 민주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모이(Daniel asap Moi)의 케냐는 반대적 성향의 좋은 본보기이다. 케냐는 또한 원조가 "좋은 정부"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계속된 논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63년 독립 이래 케냐는 적절한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던 비교적 안정된 서구주의적인 정권으로서 워싱턴과 런던으로부터 견지되었다. 20년 넘게 권력을 누려온 모이의 지도방식과 인적인 특징에 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모이는 가차없이 다당제 정치를 반대하였고 본질적인 권위주의자로 비춰졌다. 그는 잔인했으며 은밀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을 고수하는데 있어서 너무 까다롭지 도 않았다. 1990년에 모이는 경제적인 어려움, 유일집권당내 분열과 전문분야에 그들의 기반을 가지고 있던 케냐에 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케냐의 친민주주의가들의 대다수가 법률가, 학생들이고 여러 부류의 직업인들이었다. 대통령은 "쥐 같은 놈"이라고 말했던 그의 민주주의 반대자들을 박해했다. 민주주의는 외부사상을 도용한 비 애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요구된 외국의 이데올로기로서 묘사되었다.
케냐의 외무장관 오우코(Robert Ouko)와 같이 1990년 몇 가지 의문을 남긴 죽음 속에서 모이는 전 각료장관들과 인권변호사들을 포함하여 재야세력가들과 실질적인 반대 세력들을 체포했다. 또한 그는 그의 행동에 불 만을 나타내는 미국과 영국의 양국의 압력에 저항했다. 친 민주주의 모임이 금지되었고 소규모의 군대가 반체제인들을 진압하곤 했다. 나이로비 그리고 나쿠루의 중요 지방도시에서 4일간 연속되는 폭동에서 거의
28명이 사망했다. 모이는 그 죽음을 무장한 깡패들과 약물복용자들의 소행으로 돌렸다.
다당제체제하에서 모이의 지위는 오랫동안 지속해 오고 있다. 1990년 6월에 그는 "케냐의 다당제를 채택하는데 있어 외부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모이정권은 통치당내 분열과 약간의 변화가 진행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다원주의를 향한 어떠한 의구심도 가지지 않는 반대자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집권당내 다원주의가 요구했던 보수주의 인사들과 더불어 집권당내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갈래가 나타났다. 진보주의는 그해 말 인접국인 잠비아에서위 정치적 해방을 바라고 있었다. 케냐에 가중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7월 케냐의 인권요구에 위기를 가중시켰다. 케냐에서는 Taking Liberties라고 명명되는 아프리카의 파수꾼이 모이정권 아래 시민해방의 침해에 관해 문서화 했다. 아프리카의 파수꾼은 케냐감옥에서의 고문의 증거와 준경찰력으로 집권당의 젊은층을 이용했다는 것과 연설의 자유침해, 출판과 의회의 자유침해를 수집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영국이 인권상태가 향상될 때까지 그 원조를 연장했다.
다당제 정치를 위한 인권저항에 있어서 케냐의 경우는 정치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원 조국들에 직면한 문제점들을 나타내고 있다. 모이는 그와 같은 세력을 무마시키고 그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케냐의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을 이용해 왔다. 영국의 외무장관 드글라스 허드(Douglas Hurd)는 1991년 9월 케냐를 이틀간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체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모이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케냐에 대한 허더의 비교적 미온적인 태도는 "친구에 대한 호의"라는 비난을 유발시켰다. 코트디브와르의 보이그니(Felix Houphouet-Boigly) 또한 최근까지 서구세계의 강력한 우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민주주의 운동을 지속했고1961년 이후 보이그니는 서구 수출시장에 의존하는 친서구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에게 후원을 하고, 권위주의자들에게 다소 미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전성기에 보이그니는 숙련된 아주 탁월한 정치가였다. 보이그니의 이상한 특징 중의 하나는 새해 첫날 1만 CFA 프랑지폐(당시 22달러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주면서, 그리고 통행자들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기를 바라면서 코트디브와르의 수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
마침내 다당제 정치가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경제적 번영에 대한 가두시위와 연관된 오랜 분쟁 끝에 1990년 5월 다시 채택되었다 원인불명의 군과 경찰폭동이 이러한 일과 덩달아서 발생했다. 폭동 발생시 보이그니는 1961년 방위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미테랑(Francois Mitterrand)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의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면서 지내온 보이그니와의 40년 우정을 끝내면서 이러한 보이그니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통제는 대통령과 연관된 구코코아 지배엘리트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당제 정치로의 정치적 변화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전 일당체제는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 어려움, 당파적인 정치, 그리고 1980년 말의 가두시위에 의해 신뢰를 잃었으며 처음으로 5개의 야당과 경쟁했다.
1990년 초기 민주주의 성향의 시위는 아비 잔에서의 사치스러운 호텔, 행정지역과 거주지역으로부터 표출되었다. 주요 산업노동자들, 대중운동기관, 그리고 모든 항해노선이 위기상황에 임박했고 파업에 들어갔다.
아프리카에 유입된 다른 민주주의 성향과 혼합됨으로서 그들의 첫 관심사는 직업, 임금,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대다수의 불만은 경제긴축정책과 연관된 소위 "solidarity tax"였다. 학생들은 수업거부를 단행했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주장은 1990년 상당한 정치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대통형과 일당통치 당을 비난하는 플랜카드를 운반하는 학생들과 연합하였다. 익명의 팜플렛들이 배포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부정부패로 인한 부의 축적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해명에서 대통형은 "나는 나의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이는 상관이 없다. 코트다브와르는 신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베풀듯이 나에게도 도움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보이그니에게 최고의 계승자를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이그니는 마침내 1990년 말 10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강행했다. 수도 아비쟌의 가두시위에서 요구했던 것처럼 다원주의는 26개 야당의 형성을 초래했다. 하지만 소수좌익은 보이그니에 도전하기 위해 대통령 후보를제안했다. 그의 명성처럼 보이그니는 36%가 기권한 선거에서 82%를 얻음으로서 선거에 승리하면서 그의 숙련된 정치적 기술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많은 부정선거가 발생했지만 집권당이 선거를 통제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지를 받지 못한 한 야당후보는 이러한 여건 아래에서 투표의 40%를 얻었음이 추정되었다. 야당은 집권당이 투표를 통한 집권당의 민주적 신뢰를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아주 용이했
다.
나이지리아와 잠비아의 경우는 상당한 상이점을 가지는 경우지만 두 국가에 있어서 현 지도층은 다당제 정치로의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다.
재건설을 위한 정치적 경쟁이나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획득함으로써 나이지리아에서 1992년경 내부통제를 위한 아주 미온적인 바방기다 군사정권의 부활은 국내정치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표명하는 이들에 의해서 견지되어 왔다. 나이지리아는 국제정치에 있어서 아프리카의 중심지이다. 한때는 경제대국이었지만 수백만의 인구가 유가하락과 잘못된 구조조정의 결과로 크나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나이지리아인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의 인구의 2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 1백6만배럴의 오일을 수출하고 있다. 바방기다는 나이지리아 정치의 "마라도나"라는 애칭을 가져왔다. 그는 1985년 정권을 잡은 이후 현란한 정치적 움직임을 취해 왔었다. 실행에 옮기는 동안 1989년에 그는 쿠데타를 조정했다. 그리고 자유경쟁정치의 회생을 지연시켰다. 그는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로써 첫번째는 지방차원의 선거, 다음은 국가차원, 1992년에는 국내선거를 도모하고 있다. 그는 새롭게 깨끗한 정처를 하려고 하고 있다. 1987년 샤가리(Shehu Shagari)의 부패한 민간정부의 전 정치가들은 공직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또한 단지 2개 정당만이 경선이 인정되었다. 정당정치에 있어서 바방기다의 체재는 독립이후 나이지리아가 겪었던 민족적, 지역적 그리고 종교적인 분열 도피 책으로서 강구되었다. (북쪽에서 North-South, Christian-bkslim, Hausa-Fulani, 남쪽에서의 Yoruba 그리고 동쪽에서의 Ibo) 대다수가 이러한 정치 구조가 실지로 이러한 분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폭력사회 속에 있었다.
범죄, 난폭운전, 종교적 분쟁, 그리고 부패는 최근의 오일가격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구조와 경제적 하락의 산물이다.
좌익선호의 사회민주당과 우익선호의 민주공화당의 두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조직체들이 금지되었다. 이들 당들은 1989년 새롭게 창당된 13개 당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정치와 헌법체계를 설립하려는데 따른 재정비용은 정당조직이 나이지리아의 모든 곳에 자리를 잡는 만큼 많은 비용이 들었다(그리고 심각한 인종적 분쟁의 촛점이 되어왔다). 새로운 주들이 생성과정에 있으며 선거예정이 지연되어 왔다. 23개 주에서 나이지리아는 30개 주의 공화국이 될 것이다. 12월 마지막날 선거로 지방의원은 임기가 연장되었으며 국가지도자선거는 1991년 10월로 연기되었었다.
이러한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발전은 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나이지리아는 실질적이고 독립적인 하나의 압력단체와 호전적이며 지위상승을 원하고 있는 정치계급층이 있다. 이 둘은 데모, 가두시위 그리고 압력단체활동의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치적 투쟁은 가중되고 있다. 특수 국가지배층과 대통령에 관한 뇌물과 과다한 군의 개입, 그리고 군부지도자층이 군부로 귀환함으로서 불만족스러워 한다는 것과 군의 숫자를 제한하자는 제안이 보도되었다(12만명에서 6만명으로). 바방기다는 국내통치의 재생을 보다 지연시킬 것이다. 또한 만약 성공만 한다면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고 나이지리아는 쿠데타에 의한 정부교체의 순환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다행히 1999년 군정의 민선이양과 함께 실시된 선거에서 민간이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민주화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잠비아인들 또한 그들의 대통령이 군을 동원함으로서 쿠데타가 발생할 지에 관해 우려하고 있다. 카운다는 IMF의 원조금의 중단 이후 계속되는 폭동으로 1987년 처음으로 그의 정책을 포기했다. 잠비아의 550만 인구는 모호한 발전모델 전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동가격의 하락으로 잠비아는 농생산물을 증가시키는데 대한 개발전략을 변화시키고 있다. 카운다의 일당정부는 여러가지 방해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지막 행동지침이 반체제조직의 민중민주주의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정치의 bottom-up 모델을 지속해 왔고, 군부정권은 국내정치를 조정함으로 부활하였다. 반면에 잠비아의 카운다는 top down 모델을 힘으로 지속하는 동안 내외부의 압력들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용해 왔다.
또한 카운다는 다원주의 정치에 관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여 왔다. 그는 마침내 친 민주주의 소요와 그에게의 비난이 있은 이후 1990년 12월 다당제 정치로의 전환을 강제적으로 인정했다. 카운다는 칠루바(Frederic Chiluba)에 의해 지도되는 MMD(다당제 민주주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집권당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MMD는 범죄조직과의 연관뿐만 아니라 특권계층과의 연관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카운다는 당내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집권당의회와 선거를 지연시키는데 뛰어났다. 집권당은 반대파 제거를 위해 정부의 도움을 받곤 했다. 7개 야당들이 MMD에 이어 창당되었지만 카운다는 다항제 선거를 위한 유일한 후보였다. 다당제 선거는 10월 31이 예정일이었다. 카운다의 "Zambian Humanism"(크리스찬, 파비안 그리고 인디안의 불균등한 혼합)은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개혁지연과 저항에 따른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 변화를 위한 많은 수단과 방법은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그와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있어서 항상 어려움이 있지만 한가지만은 명확하다: 주로 도시와 수도에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대중은 학생과 법률가들에 의해서 이끌어 졌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와 조직의 계층화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해 왔다. 소수 민주주의 주창자들은 특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나머지는 경제적 어려움이 동기가 되었으며 사회적인 배경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1950년과 1960년초 민족주의 움직임의 이질적인 요소를 불러 일으켰다. 아마 이러한 내부적 요인들과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제 2의 독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초 아프리카 국가의 권위주의 정 치의 특징은 독자적, 집단적 성향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망의 정권들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도피하거나 해외에서 반대 단체를 형성했지만, 이보다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원조국의 정책변화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성향(pro-democracy)과 대륙내 인권단체의 성장이었다.
법률가. 학생, 광부, 농촌 여성 조직, 도시 노동자와 비고용자, 언론인들, 성직자와 다른 여러 사회단체들은 폭력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정권의 결과로 민주주의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케냐에서 급진장로교성직자는 다당제 선거를 요구했고, 가두시위를 일으켰다. 봉고(Omar Bongo) 가봉 대통형 반대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상점약탈과 리브레빌레(Livreville) 거리에서 대중폭동을 초래하게 되었다.
축구시합(결승전)에서 수십명이 반정부 슬로건을 부르짖음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바레(Mohammed Siad Barre) 전대통령의 경호원들에 의해 저격되어 죽음을 당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라트시라카(Didies Ratsiraka) 대통형 정부는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대중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1989년, 중국 천안문광장에서 폭력장면 포스트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삐라들은 "경계의 의미"였다. 그들은 학생들과 민주주의 성향이 아닌 학생들을 죽인 영웅적인 군인들의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에 대한 공공연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인 압력을 취하는 활동가들과 사회단체들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요구함으로써 민주주의 시위가 진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이상화 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실질적인 동기가 있으므로 다소의 희생이 따랐으며, 초기 정치인들을 포함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직접 하려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윤을 취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현 정치노선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Mobutu Sese Seko) 전대통령과 같이 아프리카에서 부를 사유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선교사학교의 요리사와 아들로 태어난 모부투의 개인 재산은 수억 달러로 추정되었고 해외 재산은 "열 한 개의 성과 벨기에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파리에 있는 건물, 니스에 호화로운 저택, 스위스에 32개의 침실 빌라, 해변 빌라, 그리고 스페인에 16 세기 성.
자이레(콩고민주공화국)에서 모부투의 영지는 민주주의 시위, 다수 야당체제, 대통령 친위대에 대항했던 이들에 행한 폭력과 살인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었다. 1991년 8월, 9월메 20개가 넘는 정치야당, 신성 연합 (Sacred Union)의 반대 움직임이 다수당 정치로의 전환에 대한 국가 회의에 개입하기 위해 모부투의 결정을 논박함으로써 진압경찰과 충돌했다. 모부투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아주(극한) 교활하면서도 성공적인 정치인의 또다른 본보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 또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허용하려는 모부투의 결정은 "60에 온 지혜"라는 현실의 결과이다. 또한 마다가스카르의 라트시라카 대통령은 야당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났다. " 내가 옳을지 라도 나는 허리를 숙일 것이다. "라고 그는 라디오 방송에서 청년들에게 말했고, 지속적으로 연합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야당과의 회담을 요구했다.
모부투와 라트시라카의 대중에 대한 굴복은 아프리카대륙에 전반적으로 나타났던 민주주의 요구의 물결에 대한 지도층의 대답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이 처음으로 경제적 불만과 연관되어 나타났다. 예를들어 잠비안에서 처음으로 의사들이 물가상승에 대한 반발로 폭동을 일으켰다. 물가하락은 1989년부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1989년 7월 주요생산물인 옥수수의 가격이 두 배가 되었다. 가격은 옥수수 비용이 미국 달러 7.40 달러로 1990년 6월 다시 두 배가 되었다. 저임금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주당2.0 미국 달러이다. 물가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다만 더 큰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다.
계속적인 민주화는 잠비아의 일당 체제 종료와 카운다(Kenneth Kaunda)사임을 요구했다. 대학에서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은 '카운다는 가야만 한다. ' 그리고 '제거 카운다'를 외쳤다. 이와같은 문제에 관해한 청년은 '정부는 참여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카운다보다도 나아질 수 있었다. '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불안 또는 민주주의 요구에 응하던 응하지 않든간에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이 몇 가지의 길을 선택했다. 모두가 외부원조국 또는 토착 활동가로부터 민주주의 요구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세 방법중 한 방법을 택했다. : 저항의 우회적 방법의 모색, 경영 변화, 또는 유동성의 변화. 따라서 민주주의 요구의 걸과 또는 권위주의 저항은 아프리카대륙 전반을 통해 다양화되었다. 변화의 세 가지 유형은 몇 가지 경우에 있어 약간의 의문을 제시하였지만 차츰 진전되어 왔다.
1. "성공적인 민주화" : 이러한 것들은 지도층을 싸고 있던 국가들이 민주주의 움직임으로부터 다수당 경선으로 압력에 굴복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공직(직무)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베넹과 까뽀베르더가 그 예이다.
2. "일인 권위주의 저항" : 권위주의 집권자들은 내외 부로부터 민주주의 성향에 저항 해 왔다. 케냐와 코트디브아르가 그 적절한 애이다.
3. "재구조, 전환과 지연": 어떤 정치 지도자들은 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나서 그와같은 압력을 전환시키기 위한 모색책을 찾으면서 이에 응해 왔다. 나이지리아의 바방기다 군사정권은 1992년 제 3 공화국에 대한 움직임과 카운다의 잠비아의 경우에서와 마친가지로 이러한 것을 설명해 준다.
케이프베르데는 1974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서아프리카 해변의 화산섬국가이다. 1991년 2월 17일에 대통령 페레이라(Aristedes Pereira)는 17년간 일당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다수당 선거에서 패배했다. 새 대통령 몬테리오(Antonio Mascarenhas Monterio)와 새롭게 창당된 민주당 의장인 베이가(Carlos Veiga)는 73.5%를 얻음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 베이가는 급격한 실업위기를 개선할 것을 약속했고 관광업을 포함하여 외국 자본의 계속적인 투자를 희망하였다. 선거는 매우 순조로왔고 계속적인 세력의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 이동이 계속되었다. ) 이와같은 사건들은 후기 아프리카 독립국들에게서 현저히 나타난다. 일당통치자들은 정권을 포기했으며 평화적 변화의 설명은 비교적 순조롭게 나타났다. 청년들과 추방된 이들은 페레이라 정부의 침체된 사회주의와 같이 불행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힘을 정비하기 시작했으며 은밀히 변화해 나아갔다. 이러한 것은 케이프베르데 통치의 특징을 나타내었다. 여러 국가들이 전아프리카 포르투갈형 의 나머지 나라들이 싸워왔던 것처림 케이프베르데의 경험을 알고 있다.
다당제 민주주의로의 변화는 베넹에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졸업한 고등학생들의 항의로 1985년 초기에 일어났다. 민주주의 변화로의 저항은 부분적으로 전 마르크스주의 독재자 케레쿠(Mathieu Kerekou)에 기인했다. 케레쿠는 그가 다당제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던 개혁정치를 관장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쓰곤 했다. 또한 프랑스의 관여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베넹은 "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실험의 연구 장소"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의 목적은 잠재적인 큰 소동없이, 어떠한 경제적인 원조도 없이 불어권 아프리카의 정치적 개혁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알렌(Allen)은 카톨릭교회와 지지로 민주화의 반대세력이 성장하게 된 것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교회는 민주주의 변화를 요구했던 서문을 공포했고, 이를 전환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움직임의 근거는 학생들과 대중의 결합이었다.
대중민주주의는 1989년 12월부터 암암리에 진행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IMF는 인권향상. 마르크스 발전전략의 포기, 그리고 다당제 정치에로의 움직임으로 케레쿠정부를 궁지로 몰았던 베넹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케례쿠는 민주주의 발전에 도전함으로써 이에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으며, 1990년 2월 자신의 수상으로서 개혁적 자본주의 기술관료인 전 재무장관 소글로 (Nicephore Soglo)를 인정했다. 후에 소글로는 1991년 3월 대통령선거에서 케레쿠에게 승리함으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베넹의 450만 인구는 막스-레닌주의의 17년간의 군사정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소글로가 무너진 베냉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지방자본, 외국자본투자를 함으로써 레닌주의가 급격히 무너져 갔다.
Africa Confidential Newsletter는 베넹이 정치적으로 독재정치의 붕괴 속에서 다당제 민주주의의 한 모델로 어떤 다른 나라들보다도 성공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소글로 자신은 이러한 민주화가 유혈없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이밖에 아프리카의 정치지도자들은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압력을 수용함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다. 서 구원조국들과 나이로비에서 정치적 실무가들로부터 일어나는 민주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모이(Daniel asap Moi)의 케냐는 반대적 성향의 좋은 본보기이다. 케냐는 또한 원조가 "좋은 정부"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계속된 논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63년 독립 이래 케냐는 적절한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던 비교적 안정된 서구주의적인 정권으로서 워싱턴과 런던으로부터 견지되었다. 20년 넘게 권력을 누려온 모이의 지도방식과 인적인 특징에 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모이는 가차없이 다당제 정치를 반대하였고 본질적인 권위주의자로 비춰졌다. 그는 잔인했으며 은밀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을 고수하는데 있어서 너무 까다롭지 도 않았다. 1990년에 모이는 경제적인 어려움, 유일집권당내 분열과 전문분야에 그들의 기반을 가지고 있던 케냐에 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케냐의 친민주주의가들의 대다수가 법률가, 학생들이고 여러 부류의 직업인들이었다. 대통령은 "쥐 같은 놈"이라고 말했던 그의 민주주의 반대자들을 박해했다. 민주주의는 외부사상을 도용한 비 애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요구된 외국의 이데올로기로서 묘사되었다.
케냐의 외무장관 오우코(Robert Ouko)와 같이 1990년 몇 가지 의문을 남긴 죽음 속에서 모이는 전 각료장관들과 인권변호사들을 포함하여 재야세력가들과 실질적인 반대 세력들을 체포했다. 또한 그는 그의 행동에 불 만을 나타내는 미국과 영국의 양국의 압력에 저항했다. 친 민주주의 모임이 금지되었고 소규모의 군대가 반체제인들을 진압하곤 했다. 나이로비 그리고 나쿠루의 중요 지방도시에서 4일간 연속되는 폭동에서 거의
28명이 사망했다. 모이는 그 죽음을 무장한 깡패들과 약물복용자들의 소행으로 돌렸다.
다당제체제하에서 모이의 지위는 오랫동안 지속해 오고 있다. 1990년 6월에 그는 "케냐의 다당제를 채택하는데 있어 외부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모이정권은 통치당내 분열과 약간의 변화가 진행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다원주의를 향한 어떠한 의구심도 가지지 않는 반대자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집권당내 다원주의가 요구했던 보수주의 인사들과 더불어 집권당내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갈래가 나타났다. 진보주의는 그해 말 인접국인 잠비아에서위 정치적 해방을 바라고 있었다. 케냐에 가중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7월 케냐의 인권요구에 위기를 가중시켰다. 케냐에서는 Taking Liberties라고 명명되는 아프리카의 파수꾼이 모이정권 아래 시민해방의 침해에 관해 문서화 했다. 아프리카의 파수꾼은 케냐감옥에서의 고문의 증거와 준경찰력으로 집권당의 젊은층을 이용했다는 것과 연설의 자유침해, 출판과 의회의 자유침해를 수집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영국이 인권상태가 향상될 때까지 그 원조를 연장했다.
다당제 정치를 위한 인권저항에 있어서 케냐의 경우는 정치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원 조국들에 직면한 문제점들을 나타내고 있다. 모이는 그와 같은 세력을 무마시키고 그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케냐의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을 이용해 왔다. 영국의 외무장관 드글라스 허드(Douglas Hurd)는 1991년 9월 케냐를 이틀간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체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모이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케냐에 대한 허더의 비교적 미온적인 태도는 "친구에 대한 호의"라는 비난을 유발시켰다. 코트디브와르의 보이그니(Felix Houphouet-Boigly) 또한 최근까지 서구세계의 강력한 우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민주주의 운동을 지속했고1961년 이후 보이그니는 서구 수출시장에 의존하는 친서구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에게 후원을 하고, 권위주의자들에게 다소 미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전성기에 보이그니는 숙련된 아주 탁월한 정치가였다. 보이그니의 이상한 특징 중의 하나는 새해 첫날 1만 CFA 프랑지폐(당시 22달러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주면서, 그리고 통행자들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기를 바라면서 코트디브와르의 수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
마침내 다당제 정치가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경제적 번영에 대한 가두시위와 연관된 오랜 분쟁 끝에 1990년 5월 다시 채택되었다 원인불명의 군과 경찰폭동이 이러한 일과 덩달아서 발생했다. 폭동 발생시 보이그니는 1961년 방위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미테랑(Francois Mitterrand)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의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면서 지내온 보이그니와의 40년 우정을 끝내면서 이러한 보이그니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통제는 대통령과 연관된 구코코아 지배엘리트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당제 정치로의 정치적 변화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전 일당체제는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 어려움, 당파적인 정치, 그리고 1980년 말의 가두시위에 의해 신뢰를 잃었으며 처음으로 5개의 야당과 경쟁했다.
1990년 초기 민주주의 성향의 시위는 아비 잔에서의 사치스러운 호텔, 행정지역과 거주지역으로부터 표출되었다. 주요 산업노동자들, 대중운동기관, 그리고 모든 항해노선이 위기상황에 임박했고 파업에 들어갔다.
아프리카에 유입된 다른 민주주의 성향과 혼합됨으로서 그들의 첫 관심사는 직업, 임금,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대다수의 불만은 경제긴축정책과 연관된 소위 "solidarity tax"였다. 학생들은 수업거부를 단행했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주장은 1990년 상당한 정치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대통형과 일당통치 당을 비난하는 플랜카드를 운반하는 학생들과 연합하였다. 익명의 팜플렛들이 배포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부정부패로 인한 부의 축적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해명에서 대통형은 "나는 나의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이는 상관이 없다. 코트다브와르는 신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베풀듯이 나에게도 도움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보이그니에게 최고의 계승자를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이그니는 마침내 1990년 말 10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강행했다. 수도 아비쟌의 가두시위에서 요구했던 것처럼 다원주의는 26개 야당의 형성을 초래했다. 하지만 소수좌익은 보이그니에 도전하기 위해 대통령 후보를제안했다. 그의 명성처럼 보이그니는 36%가 기권한 선거에서 82%를 얻음으로서 선거에 승리하면서 그의 숙련된 정치적 기술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많은 부정선거가 발생했지만 집권당이 선거를 통제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지를 받지 못한 한 야당후보는 이러한 여건 아래에서 투표의 40%를 얻었음이 추정되었다. 야당은 집권당이 투표를 통한 집권당의 민주적 신뢰를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아주 용이했
다.
나이지리아와 잠비아의 경우는 상당한 상이점을 가지는 경우지만 두 국가에 있어서 현 지도층은 다당제 정치로의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다.
재건설을 위한 정치적 경쟁이나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획득함으로써 나이지리아에서 1992년경 내부통제를 위한 아주 미온적인 바방기다 군사정권의 부활은 국내정치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표명하는 이들에 의해서 견지되어 왔다. 나이지리아는 국제정치에 있어서 아프리카의 중심지이다. 한때는 경제대국이었지만 수백만의 인구가 유가하락과 잘못된 구조조정의 결과로 크나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나이지리아인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의 인구의 2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 1백6만배럴의 오일을 수출하고 있다. 바방기다는 나이지리아 정치의 "마라도나"라는 애칭을 가져왔다. 그는 1985년 정권을 잡은 이후 현란한 정치적 움직임을 취해 왔었다. 실행에 옮기는 동안 1989년에 그는 쿠데타를 조정했다. 그리고 자유경쟁정치의 회생을 지연시켰다. 그는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로써 첫번째는 지방차원의 선거, 다음은 국가차원, 1992년에는 국내선거를 도모하고 있다. 그는 새롭게 깨끗한 정처를 하려고 하고 있다. 1987년 샤가리(Shehu Shagari)의 부패한 민간정부의 전 정치가들은 공직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또한 단지 2개 정당만이 경선이 인정되었다. 정당정치에 있어서 바방기다의 체재는 독립이후 나이지리아가 겪었던 민족적, 지역적 그리고 종교적인 분열 도피 책으로서 강구되었다. (북쪽에서 North-South, Christian-bkslim, Hausa-Fulani, 남쪽에서의 Yoruba 그리고 동쪽에서의 Ibo) 대다수가 이러한 정치 구조가 실지로 이러한 분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폭력사회 속에 있었다.
범죄, 난폭운전, 종교적 분쟁, 그리고 부패는 최근의 오일가격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구조와 경제적 하락의 산물이다.
좌익선호의 사회민주당과 우익선호의 민주공화당의 두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조직체들이 금지되었다. 이들 당들은 1989년 새롭게 창당된 13개 당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정치와 헌법체계를 설립하려는데 따른 재정비용은 정당조직이 나이지리아의 모든 곳에 자리를 잡는 만큼 많은 비용이 들었다(그리고 심각한 인종적 분쟁의 촛점이 되어왔다). 새로운 주들이 생성과정에 있으며 선거예정이 지연되어 왔다. 23개 주에서 나이지리아는 30개 주의 공화국이 될 것이다. 12월 마지막날 선거로 지방의원은 임기가 연장되었으며 국가지도자선거는 1991년 10월로 연기되었었다.
이러한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발전은 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나이지리아는 실질적이고 독립적인 하나의 압력단체와 호전적이며 지위상승을 원하고 있는 정치계급층이 있다. 이 둘은 데모, 가두시위 그리고 압력단체활동의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치적 투쟁은 가중되고 있다. 특수 국가지배층과 대통령에 관한 뇌물과 과다한 군의 개입, 그리고 군부지도자층이 군부로 귀환함으로서 불만족스러워 한다는 것과 군의 숫자를 제한하자는 제안이 보도되었다(12만명에서 6만명으로). 바방기다는 국내통치의 재생을 보다 지연시킬 것이다. 또한 만약 성공만 한다면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고 나이지리아는 쿠데타에 의한 정부교체의 순환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다행히 1999년 군정의 민선이양과 함께 실시된 선거에서 민간이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민주화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잠비아인들 또한 그들의 대통령이 군을 동원함으로서 쿠데타가 발생할 지에 관해 우려하고 있다. 카운다는 IMF의 원조금의 중단 이후 계속되는 폭동으로 1987년 처음으로 그의 정책을 포기했다. 잠비아의 550만 인구는 모호한 발전모델 전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동가격의 하락으로 잠비아는 농생산물을 증가시키는데 대한 개발전략을 변화시키고 있다. 카운다의 일당정부는 여러가지 방해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지막 행동지침이 반체제조직의 민중민주주의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정치의 bottom-up 모델을 지속해 왔고, 군부정권은 국내정치를 조정함으로 부활하였다. 반면에 잠비아의 카운다는 top down 모델을 힘으로 지속하는 동안 내외부의 압력들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용해 왔다.
또한 카운다는 다원주의 정치에 관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여 왔다. 그는 마침내 친 민주주의 소요와 그에게의 비난이 있은 이후 1990년 12월 다당제 정치로의 전환을 강제적으로 인정했다. 카운다는 칠루바(Frederic Chiluba)에 의해 지도되는 MMD(다당제 민주주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집권당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MMD는 범죄조직과의 연관뿐만 아니라 특권계층과의 연관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카운다는 당내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집권당의회와 선거를 지연시키는데 뛰어났다. 집권당은 반대파 제거를 위해 정부의 도움을 받곤 했다. 7개 야당들이 MMD에 이어 창당되었지만 카운다는 다항제 선거를 위한 유일한 후보였다. 다당제 선거는 10월 31이 예정일이었다. 카운다의 "Zambian Humanism"(크리스찬, 파비안 그리고 인디안의 불균등한 혼합)은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개혁지연과 저항에 따른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 변화를 위한 많은 수단과 방법은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그와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있어서 항상 어려움이 있지만 한가지만은 명확하다: 주로 도시와 수도에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대중은 학생과 법률가들에 의해서 이끌어 졌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와 조직의 계층화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해 왔다. 소수 민주주의 주창자들은 특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나머지는 경제적 어려움이 동기가 되었으며 사회적인 배경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1950년과 1960년초 민족주의 움직임의 이질적인 요소를 불러 일으켰다. 아마 이러한 내부적 요인들과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제 2의 독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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