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노선 실험 ... 탄자니아의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영국과 독일은 1841년 이후 탕가니카와 잔지바르(탄자니아의 전신인 두 지역)에 급속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17세기 이후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잡고 있던 오만(Oman)은 그 영향력을 잃고 영국과 독일의 세력 다툼은 치열해져 갔다. 제 1차 세계 대전이후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한 반면 영국은 승전국으로 탕가니카와 잔지바르에 영향력을 독점했다.
탄자니아 흑인들의 정치 세력화는 1929년 탕가니카 아프리카회(Tanganyika African Association)으로 시작해서 1954년에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탄자니아의 국부(國父)로 음왈리무(Mwalimu,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탄자니아의 정치를 주도하며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모델을 실험하게 된다.
tanu는 1959년과 1960년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니에레레는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탕가니카가 공화국을 선포했고 니에레레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4년 잔지바르가 탕가니카와 연합하면서 탄자니아로 국명을 바꾸었다.
1967년 초 탄자니아는 아루샤 성명(Arusha declaration)을 통해 사회주의 자립자족의 경제 모델을 발표한다. 이 모델의 핵심은 우자마(Ujamaa)로 불리는 마을 공동체였다. 이 모델이 제시하는 기본 정책은 농촌지역의 자립과 대중을 위한 교육에 있었다. 이와함께 상업은행과 많은 산업체들이 국유화되었다.
1977년 tanu는 잔지바르의 ASP(Afro-Shiazi Party)와 함께 혁명당(Chama cha Mapinduzi)를 형성했다. 니에레레는 이 당의 총재가 되었다. 탄자니아 본토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 반면 잔지바르는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1985년에 잔지바르의 알리 하산 음위니(Ali Hassan Mwinyi)가 탄자니아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니에레레를 이어 탄자니아의 2대 대통령으로 피선되었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탄자니아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사유화와 IMF로부터의 차관, 경제간섭 등을 경험하게 된다. 니에레레는 이를 두고 "기대치 않았던 사회주의의 퇴보"라고 묘사했고 일부 강경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니에레레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1990년 음위니는 두 번째로 대통령 직에 당선된다.
1992년 7월에서 1996년 중반까지 12개 이상의 군소정당이 등장해 탄자니아는 다당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으면서 1995년에 실시된 첫 다당제 선거는 CCM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다. 니에레레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속적으로 탄자니아의 정치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 예로 1995년 당시 과학, 기술과 고등교육부 장관으로 있던 음카파(Benjamin Mkapa)를 대통령 후보로 올려놓은 것은 니에레레의 영향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음카파는 니에레레의 총애를 받는 후계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음카파는 1995년 선거에서 61.8%의 높은 지지율을 얻어 27.8%를 얻은 2위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대통령 직을 승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CCM은 의회 232석 가운데 186석을 독점해 사실상의 1당체제를 유지해 간다.
3) 80년대 중반 이후의 다당제 ... 무늬만 민주화. 실질적인 일당 독재. 모부투 세세 세코. 로버트 무가베. 카빌라.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국민당...
영국과 독일은 1841년 이후 탕가니카와 잔지바르(탄자니아의 전신인 두 지역)에 급속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17세기 이후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잡고 있던 오만(Oman)은 그 영향력을 잃고 영국과 독일의 세력 다툼은 치열해져 갔다. 제 1차 세계 대전이후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한 반면 영국은 승전국으로 탕가니카와 잔지바르에 영향력을 독점했다.
탄자니아 흑인들의 정치 세력화는 1929년 탕가니카 아프리카회(Tanganyika African Association)으로 시작해서 1954년에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탄자니아의 국부(國父)로 음왈리무(Mwalimu,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탄자니아의 정치를 주도하며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모델을 실험하게 된다.
tanu는 1959년과 1960년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니에레레는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탕가니카가 공화국을 선포했고 니에레레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4년 잔지바르가 탕가니카와 연합하면서 탄자니아로 국명을 바꾸었다.
1967년 초 탄자니아는 아루샤 성명(Arusha declaration)을 통해 사회주의 자립자족의 경제 모델을 발표한다. 이 모델의 핵심은 우자마(Ujamaa)로 불리는 마을 공동체였다. 이 모델이 제시하는 기본 정책은 농촌지역의 자립과 대중을 위한 교육에 있었다. 이와함께 상업은행과 많은 산업체들이 국유화되었다.
1977년 tanu는 잔지바르의 ASP(Afro-Shiazi Party)와 함께 혁명당(Chama cha Mapinduzi)를 형성했다. 니에레레는 이 당의 총재가 되었다. 탄자니아 본토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 반면 잔지바르는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1985년에 잔지바르의 알리 하산 음위니(Ali Hassan Mwinyi)가 탄자니아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니에레레를 이어 탄자니아의 2대 대통령으로 피선되었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탄자니아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사유화와 IMF로부터의 차관, 경제간섭 등을 경험하게 된다. 니에레레는 이를 두고 "기대치 않았던 사회주의의 퇴보"라고 묘사했고 일부 강경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니에레레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1990년 음위니는 두 번째로 대통령 직에 당선된다.
1992년 7월에서 1996년 중반까지 12개 이상의 군소정당이 등장해 탄자니아는 다당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으면서 1995년에 실시된 첫 다당제 선거는 CCM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다. 니에레레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속적으로 탄자니아의 정치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 예로 1995년 당시 과학, 기술과 고등교육부 장관으로 있던 음카파(Benjamin Mkapa)를 대통령 후보로 올려놓은 것은 니에레레의 영향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음카파는 니에레레의 총애를 받는 후계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음카파는 1995년 선거에서 61.8%의 높은 지지율을 얻어 27.8%를 얻은 2위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대통령 직을 승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CCM은 의회 232석 가운데 186석을 독점해 사실상의 1당체제를 유지해 간다.
3) 80년대 중반 이후의 다당제 ... 무늬만 민주화. 실질적인 일당 독재. 모부투 세세 세코. 로버트 무가베. 카빌라.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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