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정치일반

전통적인 정치 체제에서 근대 국가로의 전이

africa club 2001. 10. 22. 17:33
아프리카에서의 근대적인 국가 형태는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 아프리카의 현대 정치 체제

1) 60-80년대 중반까지의 일당 독재/사회주의 국가 체제 ... 이디 아민(1971-79)
이 시기의 아프리카 정치형태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Authoritarian political system)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82년을 기준으로 49개국 중 7개국을 제외하고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취하고 있는데 군사정권과 일당 정치체제가 주요 통치 형태이다.

■ 아프리카의 군사정권
아프리카의 각 국이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이후 아프리카의 정치체제는 일당독재 또는 군사정권으로 대표되었다. 사실 일당독재나 군사정권의 정치형태는 아프리카 뿐 만 아니라 식민 지배를 갓 벗어난 대다수의 제 3세계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정치형태이기도하다. 아프리카도 예외는 아니어서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한 50년대 말부터 각국은 반 식민 독립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정권을 형성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국가에서 독립 후 불과 몇 년 사이에 군부 쿠테타를 경험하면서 군사정권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아프리카의 신흥 독립 국가들은 독립 후 불과 몇 년 사이에 군부의 쿠테타를 경험하게 되었을까? 여기에서는 서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의 사례를 들어 아프리카 정치에 있어서 군사정권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나이지리아(Nigeria)
나이지리아는 1960년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공식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나이지리아는 독립 초기부터 세 지역(북부, 서부, 동부)을 지배하는 세 종족(하우사-풀라니, 요루바, 이보)간의 권력 쟁탈전으로 얼룩졌는데, 1962년에 중서부주가 새로 창설되었으나 정치의 3각 구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중 북부주는 나이지리아 전 영토의 65% 이상을 차지했지만 경제발전과 교육 수준면에서 다른 주에 뒤떨어졌다.
독립 당시 북부인민회의(Northern People's Congress), 행동조직(Action Group) 그리고 전국 나이지리아 시민회의(National Council of Nigerian Citizens)가 있었다. 북부인민회의는 하우사-풀라니, 행동조직은 요루바 그리고 전국 나이지리아 시민회의는 이보족을 대변했다.
1959년 독립 10개월 전 실시한 의회 선거에서 북부 인민회의는 시민회의와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북부 인민회의는 집건 후부터 북부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북부인민회의는 1962년에 실시된 인구조사를 조작해 북부지방의 인구수를 부풀려 놓고 1964년 연방의회 총선거의 의석 312석 중 167석을 확보했다. 시민회의와 행도조직은 이에 항의, 국민에게 보이코트를 호소했으나 북부 인민회의와 행동조직에서 분리한 나이지리아 국민민주당과의 연합전선(Nigerian National Alliance)은 북부주와 서부주에서 대승하였다.
하우사-풀라니 종족은 북부주 내에 있는 소수 종족에 대해서도 탄압정책을 썼다. 이 와중에 북부주의 티브(Tiv)족이 하우사-풀라니의 탄압에 반대, 폭동을 일으켰다.
위와 같은 사태는 북부가 남부를 지배하려 한다는 공포감을 더욱 강화시켰다.
1966년 1월 소수의 이보 청년 장교가 쿠테타를 일으켜, 북부 주지사, 연방정부 수상, 고급 장성 등을 살해했다. 쿠테타의 동기는 종족 갈등, 정치인들의 부패, 파벌 싸움 등에 염증을 느낀 소장파 장교들이 이상주의적인 국가 건설을 꿈꾸며 일으켰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청년 장교들은 대부분 이보족이었고 살해된 사람들은 대부분 하우사-풀라니였다는 사실은 이것이 종족 갈등에서 비롯된 쿠테타였다는 가능성도 설득력있게 나돌았다.
쿠테타 다음 날 암살의 대상이었던 아구이이 이론지(Aguiyi-Ironsi) 장군이 쿠테타 세력을 진압하고 정부에게 통치권을 요구했다. 이론지 장군은 집권 후 모든 정당과 종족 단체를 해체하고, 연방제도를 폐지하여 나이지리아를 35개 도(道)로 나누었다. 그리고 연방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이제까지 북부주의 공무원 채용에 있어 특혜를 보아왔던 북부 주민은 이에 반발했다. 이론지 장군은 이보인을 고문으로 대거 기용하고 1월 쿠테타의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50명의 고급 장교중 27명이 이보족이었고 5명만이 하우사-풀라니출신이었다.
이에 1967년 7월 북부주 출신 군인들이 쿠테타를 일으키고 이론지 장군을 비롯해 39명의 장교를 살해했는데 그 중 27명이 이보족이었다. 이들은 북부의 소수족 출신으로 북부 출신 장교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고우원(Yakubu Gowon) 중령에게 정권을 인수하도록 요구하였다.
고우원 정권이 들어선 후 하우사-풀라니족은 북부에서 이보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보족은 이와 같은 학대에 반발,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분리 독립한 국가가 비아프리(Biafra)였다.
고우원은 집권 2개월 후 임시 헌법위원회를 구성하고 신헌법 기초를 위임했다.
또 1967년 4월에는 민정 이양을 위한 구체적인 일정표를 발표했다. 이 일정표에 의하면 1968년까지 신헌법을 채택하고, 1969년 초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정권 이양 준비로 1967년 5월에 나이지리아를 12주(북부 6개, 동서부 3개, 라고스, 서부, 중서부)로 분할하였다.
하지만 분할을 한 지 3일 후에 동부가 독립을 선언하는 등 내란이 일어났다. 이에 민정 이양을 위한 일정표는 물거품이 되었다. 고우원은 1974년 민정 이양을 무기 연기할 것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고우원의 인기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조속한 정권 이양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군부내에서도 정권 이양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다수족 출신(하우사-풀라니, 이보, 요루바)은 민정 이양을 원하고, 소수족은 이를 반대했다. 다수족 출신은 민정 이양 후에 자기 종족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지면 자기돌도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소수 출신 군인들은 군정하에서 승진의 기회가 많고 혜택도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젊은 장교들이 1975년 고우원을 제거하고 무르탈라 모하메드(Murtala Mohammed) 장군을 국가 원수로 선출했다.
모하메드는 모든 주지사를 해임하고 지사의 최고군사회의의 위원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지사의 권한을 축소했다. 그리고 소장 이상의 고급 장성을 전부 은퇴시켰다. 이것은 우선 군 자체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군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하메드는 1979년 10월 까지 정권을 민간에 이양할 것임을 선언하고, 헌법위원회를 설치, 신 헌법을 기초하도록 지시했다. 모하메드는 1976년에 암살되었지만 그의 민정 이양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돼 모하메드의 뒤를 이은 오바산조(Obasanjo)에 의해 1979년 4월에 총선이 실시되고 10월 1일에 군사정권은 선거에 승리한 정당에게 정식으로 정권을 이양했다.
신 헌법 아래에서 나이지리아는 미국과 유사한 대통령 책임제와 연방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특히 종족주의를 금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고안했는데, 예를 들어, 연방 자금의 주 정부에의 분배는 독점 기관이 관할하며, 분배율도 50%는 평등의 원칙에 의하고 나머지 50%는 인구 비례에 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통령도 국민의 다수표를 얻은 자가 당선되나 3분의 2의 주에서 최소 4분의 1의 표를 얻어야 했다. 지사의 선거도 유사했으며 또 정당도 그 중앙 집행위원회가 최소한 3분의 2의 주에서 온 대표로 구성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의 정당은 여전히 종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향후 나이지리아 정치에 종족 갈등을 재현할 불씨를 안고 있었다. 오바페미(Obafemi)가 이끄는 나이지리아 국민당(National Party of Nigeria)은 하우사-풀라니, 나이지리아 연합당(United Party of Nigeria)은 요루바, 그리고 나이지리아 인민당(Nigerian People's Pary)은 이보족에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1983년 민간 정권은 무하메드 부하리(Buhari)가 이끄는 군부 쿠테타로 인해 무너지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즉각 정당 활동의 금지, 은행 구좌 동결 등을 골자로 한 행동을 개시했다.
1985년 부하리 정권은 또다시 바방기다(Babangida)가 이끄는 군부에 의해 전복되었다.
1993년 군부 실세였던 아바챠(Abacha)가 정권을 인수하고 철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권을 인수받은 아바챠는 그 동안의 국가 기구나 정부 조직을 전면 해체하고 그 자리를 군부 세력으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아바챠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아바챠는 조만간 정권을 민간 정부에 이양한다고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94년에 나이지리아의 유명한 작가인 오올 소잉카(wole Soyinka)가 아바챠 정권의 정통성에 정면 도전해 연방 고등법원에 제소를 했다. 연방 정부 재판소는 아바챠가 반대당 당수를 감금한 것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95년 사로-위와(Saro-Wiwa)를 비롯한 여덟명의 오고니 행동주의자들에 대해 사형을 언도했는데 이것이 국내외로부터 아바챠 정권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국내외의 들끓는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아바챠 정권은 이들 9명의 오고니 행동파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이후 수차례의 암살기도와 살인, 테러가 나이지리아 정국을 뒤흔들었다.
1998년 6월 아바챠는 대통령 궁에서 의문사를 했다. 아부바카르(Abubakar)는 재빨리 정권을 인수한 후 아바챠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1999년 2월 퇴역 장성 오루세군 오바산죠(Obasanjo)가 62.78%를 얻어 2위 후보(37.22%)를 따 돌리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나이지리아는 현재 민간 정부로 정권이 이양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