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지역통합은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꿈이었고 범(汎)아프리카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1963년 5월 아프리카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 OAU, 이후 OAU로 기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단결과 통합의 원칙에 동의한 1963년 OAU의 출범은 범(汎)아프리카주의 이념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 OAU는 먼로비아 그룹의 비전을 수용한 최초의 범(汎)아프리카 조직이자 아프리카 대륙에 기반을 둔 아프리카 독립국들의 첫 번째 정부 간 조직으로 아프리카가 세계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발언과 함께 국제 관계의 확대를 의미했다.
- OAU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 본부를 두었다.
- OAU는 (1) 회원국의 평등한 주권 보장, (2) 내정불간섭, (3) 신성불가침의 국경 준수 등 3가지 기본 원칙을 주장했다.
탄자니아의 니에레레(Julius Nyerere)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열렬히 통합된 ‘새 아프리카’를 만들고자 희망했다.
- 1963년 “크고 작은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을 위해, 우리는 오늘 ‘아프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백 년간 경제 불안과 사회적 억압에 시달려온 아프리카 민중이 마땅히 누려야 할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다.”
OAU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간 분쟁이 일어나면 아프리카의 평화와 번영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구분하는 국경선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통합의 정서가 없으면 국경선은 불화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했다.
OAU는 식민지배 당시 확정된 국경을 유지하는 데 동의하고 ‘모든 국가의 독자적 영토와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 첫째,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온 영토 보존을 지지 - 냉전 이후 민족적인 긴장과 분리주의 운동이 심화됨
- 둘째, 회원국의 국내 문제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원칙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특정 국가의 군사정권도 인정함으로써 인권유린에 대해 침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0년대에 우간다의 독재자인 이디 아민(Idi Amin)은 우간다의 독재와 인권침해에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81년 감비아(Gambia)의 수도 반줄(Banjul)에서 열린 국가정상회의에서는 주로 반줄 헌장(Banjul Charter)이라고 알려진 ‘인간 및 국민의 권리에 대한 아프리카 헌장(African Charter on Human and People's Rights)'을 채택하기도 했다.
- 셋째, 모든 분쟁을 협상, 조정, 화해 또는 중재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OAU 조정중재 및 화해위원회(OAU Commission of Mediation, Arbitration and Conciliation)는 처음부터 실패작이었다.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 이보(Igbo)족이 주창한 비아프라공화국(Republic of Biafra)은 인정하지 않았다.
- 넷째, 식민주의와 백인 소수 지배에 강력히 반대했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및 상투메 프린시페(São Tomé and Principe)의 해방을 지원했다.
OAU의 활동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첫째는 OAU가 39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범(汎)아프리카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둘째는, OAU가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OAU는 냉전 기간 동안 폭력적인 무력 분쟁에 대응한 아프리카의 주요 지역 기구였으며 OAU의 조정중재 및 화해위원회(OAU Commission of Mediation, Arbitration and Conciliation)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으나, 비효율성과 회원국 내정에 불개입 원칙으로 1977년 해체되었다.
- 예를 들어 1963년 10월 OAU 결의안은 알제리와 모로코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군사감시단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OAU 회원국들의 정치적 의지와 관심 부족으로 해당 결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 OAU는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Biafran War : 1967-1970)에 개입하기를 꺼려했으며 연방정부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나이지리아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 OAU는 1993년 에리트레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 OAU는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도 인정했다.
- 나이지리아의 군사정권은 1995년 11월 노벨평화상 후보자인 켄 사로위와(Ken Saro-Wiwa)와 다른 8명의 오고니(Ogoni)족 활동가들을 살인 혐의로 투옥하여 탄압했으나 나이지리아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거나 처벌하는 등의 확고하고 종합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OAU는 주로 대륙의 모든 형태의 식민 지배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평화유지군의 개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무력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OAU의 결정은 신뢰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특히 회원국은 개입이 자국의 이익을 위협한다면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OAU는 아프리카 분쟁에 여러 차례 개입했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차드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1979년 나이지리아는 OAU의 지원을 받아 차드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하였고 1980년 초에 아프리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차드에서 내전이 재개되자 철수했다. OAU가 평화유지활동에 자금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제적인 원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6월 병참 지원 문제와 OAU가 제시한 선거와 철수에 대한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드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하는 것은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차드 사례는 OAU의 첫 번째 평화유지 임무였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화유지 협력 사례였던 차드의 실패는 이후 10년 동안 OAU의 평화유지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였다. 구체적인 실패이유는 부적절한 계획, 임무에 대한 혼란, OAU의 지휘와 통제 구조의 부재, 병력 파병국의 편파성, 재정 및 병참 자원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의지의 결여 등으로 볼 수 있다.
OAU는 1990년 르완다에 평화유지 임무를 시행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수개월의 지연 끝에 우간다, 부룬디, 구(舊)자이레의 군사감시임무단(Military Observer Team : MOT)이 1991년 4월 르완다에 배치되었다. 말리, 나이지리아, 세네갈, 짐바브웨, 콩고(브라자빌), 튀니지 출신의 240명의 병력을 포함한 중립군사감시단(Neutral Military Observer Group : NMOG)과 NMOG II는 이후 MOT를 대체하였다.
그러나 분쟁을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한 OAU의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발행했고 이는 OAU의 실질적인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OAU의 실패는 역량과 자원의 부족이 평화유지활동의 전략적, 행정적, 전술적 측면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과 자유를 막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OAU를 통해 통합⋅경제⋅사회 발전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실행했고 많은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 1980년 나이지리아에서 나온 라고스 행동계획(Lagos Plan of Action : LPA) 및 라고스 최종법(Final Act of Lagos)(1980)은 아프리카 국가들 간 자립적 발전과 협력을 위한 프로그램 및 전략을 담고 있다.
- 1981년 나이로비에서 나온 아프리카 인권 헌장(African Charter on Human and People’s Rights) (Nairobi 1981)과 1999년 모리셔스 그랜드 베이(Grand Bay)에서 나온 그렌드베이 인권행동 계획선언(Grand Bay Declaration and Plan of Action on Human Rights)이 있다.
- 1985년 아프리카 경제 회복을 위한 선결 프로그램(Africa’s Priority Programme for Economic Recovery : APPER)은 1980년대(1986-1990)의 개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비상계획이었다.
- 1990년에 나온 아프리카의 정치 및 사회경제적 상황과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에 관한 OAU 선언(OAU Declaration on the Political and Socio-Economic Situation in Africa and the Fundamental changes taking place in the world)은 아프리카가 이니셔티브를 잡고 평화⋅민주주의⋅안보에 대한 도전을 해결하고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 1990년에 채택된 국민참여헌장(Charter on Popular Participation)은 아프리카 시민을 발전과 의사 결정의 중심에 두겠다는 OAU의 새로운 결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 1991년 아프리카 경제공동체(African Economic Community : AEC) 설립에 관한 조약은 아부자 조약(Abuja Treaty)이라고 부르는데 지역경제공동체 블록을 통해, 아프리카 공동시장을 6단계로 나누어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담고 있다.
- 1993년 분쟁 예방, 관리 및 해결을 위한 기구(Mechanism for Conflict Prevention, Management and Resolution)는 아프리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아프리카 지도자의 협력을 표출한 것이었다.
- 1995년 카이로 행동 아젠다(Cairo Agenda for Action)를 발표했다.
- 1997년 아프리카 대외 부채 위기에 대한 아프리카 공통입장(African Common Position on Africa’s External Debt Crisis)을 선언했다.
- 1999년 알제리에서 나온 비(非)헌법적 정권교체(Unconstitutional Changes of Government)와 2000년 비(非)헌법적 변화에 대한 OAU의 대응을 담은 로메 선언(Lome Declaration)을 발표했다.
- 2000년 안보·안정·발전·협력에 관한 협의(Conference on Security, Stability, Development and Cooperation : CSSDCA)는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와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증진을 위한 기본 원칙을 확립했다.
- 아프리카는 HIV/AIDS 전염병, 말라리아, 결핵과 싸우며 환경 보호에 관한 집단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 AU 구성법(Constitutive Act of the African Union)이 2000년 로메 정상회담(Lome Summit)에서 채택했다.
- 2001년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New Partnership for Africa’s Development : NEPAD)이 루사카 정상회담(Lusaka Summit)에서 AU의 프로그램으로 채택했다.
이후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기구가 설립되었으나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 간 무역이나 상호작용을 증진하는 데 기대했던 것만큼 많은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AU의 문제점은 국가의 주권을 우선시하고 내정불간섭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 아프리카 분쟁 관리에 있어 소극적이면서 ‘느슨한 통제’를 행사하기 때문에 협상, 중재, 화해, 알선 등의 분쟁 해결방식이 거의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또한, OAU가 아프리카 대륙 하위 지역 기구인 ‘지역경제공동체(Regional Economic Community : REC, 이하 REC로 기술)’와의 명확한 관계 설정을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이슈 > 아프리카연합(AU)의 평화유지활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리카 국제관계-아프리카 외교 정책의 변화 (0) | 2021.01.14 |
---|---|
아프리카의 국제관계-종속-탈식민지(dependency-decolonialization) 논쟁 (0) | 2021.01.14 |
아프리카의 국제관계-역사적 고찰 (0) | 2021.01.14 |
아프리카 통합과 아프리카중심주의(Afrocenterism) - 범(汎)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아프리카연합(AU)의 출범 (0) | 2021.01.08 |
아프리카 통합과 아프리카중심주의(Afrocenterism) - 범(汎)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 (0) | 202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