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아프리카의 민족과 문화

팔라샤(FALASHA)족

africa club 2001. 11. 23. 14:18
팔라샤(Falssha) 족은 아프리카의 시미엔(Simien) 산맥을 따라, 북쪽과 동쪽으로는 탁카즈(Takkazze) 강을, 그리고 남쪽으로 타나호수와 서쪽의 수단을 경계로 위치해 있다. 수세기 동안 이 이디오피아의 검은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는 건조하고 비탈진 불안정한 곳에 거주하고 있다.  
팔라샤 족의 기원은 확실하지가 않아 조상의 기원에 관한 추측만이 나돌 뿐이다. 한 가지 설에 의하면 헤브루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무렵, 일부가 당시에는 아비시니아(Abyssinia)로 알려진 현재의 수단에 정착하였다. 또 다른 설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사원의 첫 번째 파괴 후 또는 기원 후 70년 두 번째의 파괴 후 일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통해 여행하면서 아비시니아에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로맨틱한 설에 의하면 솔로몬 왕과 쉬바 여왕의 아들인 메네릭크(Menelik) 1세가 그의 모친의 나라에 돌아올 때 유대인 무사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의 결혼으로 생겨난 자손이 현재의 팔라샤 족의 기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가장 믿을만한 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유대인 무역 상인들이 홍해를 건너 이디오피아에 도착하여 해변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무역로를 통해 악슘(Axum)의 산악 지역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 시켰다는 것이다. 이디오피아 연대기에 의하면 유대교는 4세기에 기독교가 악슘으로 전파되기 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이렇듯 유대교 신자들은 기독교 개종의 물결로 박해를 받고 쫓겨났다. 이디오피아인들은 또한 아라비아를 침략했으며 기원 525년에 칼렙(Kaleb)왕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대왕 핀챠스 두네와(Pinchas Dhunewa)를 전투에서 만났다.  이 전투에서 두네와가 패배를 하자 많은 유대인 죄수들이 시미엔으로 후송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현재 팔라샤 족은 19,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이웃 부족과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들의 의복은 다른 이디오피아인들과 다를 게 없다. 남자들은 항상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무릎 위로는 폭이 넓고 무릎과 발목 사이는 좁은 면바지를 입는다. 그들은 또한 샤마(shama)라 불리는 직사각형의 천을 두르고 다녔다. 여자들은 발목까지 오는 긴 드레스를 입었고 상위로는 샤마를 둘렀다. 성직자들만이 머리에 장식을 하고 다녔다.
과거에 팔라샤 족은 쿠쉬틱(Cushitic) 그룹 언어 중의 하나인 아가우(Agau)의 여러 변형된 방언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디오피아의 국어는 암하릭(Amharic)어이다. 팔라샤 족이 헤르로(Hebrew)나 함하릭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팔라샤의 학교에서는 헤브로어를 가르치고 있다.  
팔라샤 족의 종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달한 구약성서인 펜타토치(Pentateuch) 또는 토라(Torah)에 근간을 둔다. 토핏(Tobit), 주디쓰(Judith), 바루쉬(Baruch), 에노쉬(Enoch), 주빌리스(Jubilees)와 같이 작자가 미상인 책들 또한 종교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팔라샤 족들은 탈무드나 유대의 구전법(oral law)에 대해 무지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팔라샤 족과 다른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펜타토치 이후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팔라샤 족의 초기 형태의 종교의 영향 때문이다. 더 나아가 토라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셉투아긴트(Septuagint)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또한 두 부족이 이 기간 동안 셈족(Semitic)과 같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이디오피아 교회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팔라샤 족이 원래의 헤브로 토라에 가까운 번역본을 소유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팔라샤 족은 아론(Aaron)의 직계손임을 주장하는 카헨(Cahen)이라는 사제가 있다. 실제적으로 모든 좋은 성품을 가진 팔라샤 족은 기도문이나 성서를 잘 전달한다면 사제의 직무를 떠맡게 된다. 각 지역마다 사제들은 자질을 충분히 갖춘 단 한 명의 사제를 선발한다. 여전히 몇몇 팔라샤 수도승 중에는 금욕과 함께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친다. 그러나 팔라샤 족 중에는 수녀를 찾아볼 수 없다.
팔라샤 족에게는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여러가지 특색이 있다. 안식일 준비는 전날인 금요일 정오부터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던 일을 마치고 강가로 가서 목욕재계를 하고 다음날을 위해 빨래를 한다. 이 의식을 위해 팔라샤 족들은 강가 가까이에 거주해야 한다. 이디오피아인들은 이를 보고 팔라샤 인들에게서 물 냄새가 난다고 비웃는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불도 켜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마을에 남아 있는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유대교의 예배당인 메시드(Mesjid)에 참석한다. 이는 기도서가 이디오피아 콥틱 교회의 라틴어인 게즈(Ge'ez)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예배당은 투쿨(Tukul) 이라고 하는 초가 지붕에 둥근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팔라샤 족은 신을 신고 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예배당에 모인 수천의 천사들을 밟지 않기 위해 예배당인 메시드에 출입을 할 때에는 신을 벗는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관습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있는 곳은 신성한 땅이니라' 라고 표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3장 5절).
모든 안식일이 중요하지만, '일곱번째 안식일--즉 그 해의 21번째 안식일--이 가장 중요하다. 이날에는 금요일 일출에서부터 토요일 땅거미가 질 때까지 하루 내내 찬양과 기도를 한다.
팔라샤 족의 축제는 이디오피아인들과는 다르지만 유대인들과 유사한 태양력을 사용하였다. 일 년은 12달 30일이고 13달째는 5일 동안이다. 4년마다 윤년이 돌아오고 마지막 달은 6일 동안이다. 펜타토치에 설명된 축제들은 유대인들의 의해 행해졌으며 그 외에도 팔라샤 족 고유의 축제들이 있다.
이 축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9번째 달의 마지막 날에 행해지는 식디(Sigd)라고 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에제라(Ezra)와 네헤미아(Nehemiah)가 이끄는 추방자들이 바빌로니아(Babylonia)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진다. 이날 사제들은 성서를 들고 높은 언덕의 정상에 원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등에 돌을 지고 언덕을 오른다. 정상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들고 온 죄로 비유되는 것들을 던져 버린다. 다른 관습 중의 하나는 새들에게 곡식 알갱이를 먹이는데, 알갱이들은 고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습은 dba 키푸르(Yom Kippur) 라 불리는 속죄의 날에 행해진다.
팔라샤 족에게 있어서 돌은 중요하고 상징적인 존재이다. 어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각각의 적대자들은 돌을 집어 등에 놓는다. 그러고 나서 그 돌을 던져버리고 서로에게 키스를 하면 싸움은 해결된다.
팔라샤 족은 원뿔형의 초가 지붕으로 된 둥근 오두막들이 지어진 작은 마을에 산다. 이 마을들은 주로 언덕의 정상과 강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외에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오두막들이 있는데, 이곳은 저주의 또는 피의 오두막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는 여성들이 생리 기간인 7일 동안 일도 하지 않고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기간이 끝나면 여성들은 몸을 씻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이전에는 위에서 언급한 저주의 오두막 뿐만 아니라, 각 마을마다 출산을 위한 오두막이 있었다. 아들을 출생한 후 8일이 되는 날-포경 수술을 하는 시점-산모는 아이를 출산한 저주의 오두막을 나와 출산을 위한 오두막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내아이를 출산하면 40일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80일 동안 산모는 머리를 자르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옷을 세탁한다. 그리고 출산 장소로 쓰인 오두막은 불에 태워 없앤다.
청결하기로 소문난 팔라샤 족에게는 베를 짜는 솜씨가 좋은 직공, 도공, 대장장이들이 경제 생활의 주류를 이룬다. 이디오피아에 있는 다른 대장장이들처럼, 그들의 예술을 초자연적인 힘과 연관시키려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대장장이와 현인을 의미하는 타비브(Tabib)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이 용어는 또한 마녀를 경멸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밤에는 하이에나로 변하여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졌다.
팔라샤 족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지만 농지가 부족하여 궁핍한 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이디오피아인들 처럼 그들은 농지를 소유하지 않는다.
좋은 농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최근에 이들 중 일부는 수단과 이디오피아의 국경지대인 세티트-휴메라(Setit-Humera)로 이동하였다. 그곳의 토양은 비료가 필요 없는 검은 점토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면화, 참깨, 수수 등이 생산된다. 전통적인 팔라샤족의 홈랜드와 세티트-휴메라 지역의 차이는 엄청나다. 가파른 언덕과 이어진 암석으로 덮인 들판은 수평선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평지가 되었다. 산악지역에 내리는 소나기 대신 덥고 건조한 날씨와 거세게 퍼붓는 빗줄기로 인해 팔라샤 족은 그곳에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팔라샤 족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살아갈 지는 의문이다. 외부로부터의 선교 활동과 유대인들로 인해 그들의 터전은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있다. 팔라ㅑ 족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알려진 이스라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원하고 있다.                  
100년 이상을 팔라샤 족들은 예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의식과 관습들을 과감히 버리도록 결정하였다. 팔라샤 족들에게 미치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압력은 인구를 19세기에 250,000명에서 현재는 20,000명이 채 안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팔라샤 복지원은 의료와 교육 시설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이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또한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