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8학년을 마쳤다. 키사 미션스쿨이었다. 학교까지 12킬로 정도 되었다. 아침 일찍 5시경 일어나서 가야했다. 매우 멀어서 항상 뛰어가야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니고 시험에 통과하면 5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고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더 집에서 멀기 때문에 나는 매우 겁이 났다. 거기서 4년을 가르쳤다. 나는 결혼도 거기서 했다.
사실 아버지는 학교를 마친 후에는 바로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나의 큰 언니는 아버지가 신랑감을 골라주었다. 아버지의 말을 안들으면 쫓겨나고 어머니가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신랑감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때 미스터 마가울라(남편)은 다레살람의 무굴라니 제이케이티에서 군인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 부모를 방문하러 왔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이 되자 그리로도 찾아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고향집으로 데려가서 나의 부모님께 소개하자 승낙을 했다. 남편은 다우리를 치르고 결혼했다. 결혼식은 내 근무지의 성당에서 했다. 작은 어머니와 브라더가 왔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에는 참석을 안하는 것이 관습이다. 1970년 이었다. 나는 그때 22살이었고 남편은 25살이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 후 시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고 일 주일을 머물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결혼하고 남편의 부모 집에 일 주일 머물때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시어머니가 다 일을 했다. 나는 2주 휴가를 받아서 1주일은 나의 친구의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결혼식 한 후 1주일 동안은 시댁에 머물렀다. 시부모님은 아직도 살아계신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남편은 양복을 입었다.
결혼 후 다레살람으로 와서 남편이 있는 제이케이티의 캠프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캠프 가까이에 있는 재활교육원에서 가르쳤다. 거기서 2년 가르친후 음토니 초등학교에서 내내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나는 캠프에서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거의 30년을 살아왔다. 남편이 87년부터 94년까지 8년간 숨바왕가(탄자니아 남쪽 국경근처)로 전출이 되어 거기가서 산 해를 빼놓고는 내내 여기서 살았다. 우리가 숨바왕가에 갔을 때는 나의 큰언니의 딸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애가 계속살고 나머지는 세를 놓았다.
남편이 숨바왕가로 전근을 했을 때 나도 그곳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남편은 그곳에서 은퇴를 했다. 그후 다시 다레살람으로 와서 나는 지금의 소코이네 학교에서 내내 근무하고 있다. 나는 아마 이 학교에서 은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55살에 은퇴하게 되어있는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60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년이면 55세여서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60살까지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좋아한다. 다른 교사들과도 잘 지낸다. 경조사가 있을 때 참석하고 서로 돕는다. 한반에 125명이 되기도 하다. 너무 학생수가 많다. 교과서도 모자라고 책걸상도 모자란다.
학교에서의 문제는 주로 학부형에게 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교육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학생들은 결석을 많이 하고 남학생들은 아주 거칠다. 교실 밖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고 담배를 피우고 훔치고. 고학년들.
벌을 주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오늘 벌을 주어도 내일 또 그런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학부형들이 학비를 못내서 학생들이 결석하는 일이 많고 학생들이 안나오기도 해서 애를 먹는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더 집에서 멀기 때문에 나는 매우 겁이 났다. 거기서 4년을 가르쳤다. 나는 결혼도 거기서 했다.
사실 아버지는 학교를 마친 후에는 바로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나의 큰 언니는 아버지가 신랑감을 골라주었다. 아버지의 말을 안들으면 쫓겨나고 어머니가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신랑감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때 미스터 마가울라(남편)은 다레살람의 무굴라니 제이케이티에서 군인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 부모를 방문하러 왔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이 되자 그리로도 찾아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고향집으로 데려가서 나의 부모님께 소개하자 승낙을 했다. 남편은 다우리를 치르고 결혼했다. 결혼식은 내 근무지의 성당에서 했다. 작은 어머니와 브라더가 왔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에는 참석을 안하는 것이 관습이다. 1970년 이었다. 나는 그때 22살이었고 남편은 25살이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 후 시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고 일 주일을 머물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결혼하고 남편의 부모 집에 일 주일 머물때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시어머니가 다 일을 했다. 나는 2주 휴가를 받아서 1주일은 나의 친구의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결혼식 한 후 1주일 동안은 시댁에 머물렀다. 시부모님은 아직도 살아계신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남편은 양복을 입었다.
결혼 후 다레살람으로 와서 남편이 있는 제이케이티의 캠프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캠프 가까이에 있는 재활교육원에서 가르쳤다. 거기서 2년 가르친후 음토니 초등학교에서 내내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나는 캠프에서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거의 30년을 살아왔다. 남편이 87년부터 94년까지 8년간 숨바왕가(탄자니아 남쪽 국경근처)로 전출이 되어 거기가서 산 해를 빼놓고는 내내 여기서 살았다. 우리가 숨바왕가에 갔을 때는 나의 큰언니의 딸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애가 계속살고 나머지는 세를 놓았다.
남편이 숨바왕가로 전근을 했을 때 나도 그곳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남편은 그곳에서 은퇴를 했다. 그후 다시 다레살람으로 와서 나는 지금의 소코이네 학교에서 내내 근무하고 있다. 나는 아마 이 학교에서 은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55살에 은퇴하게 되어있는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60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년이면 55세여서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60살까지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좋아한다. 다른 교사들과도 잘 지낸다. 경조사가 있을 때 참석하고 서로 돕는다. 한반에 125명이 되기도 하다. 너무 학생수가 많다. 교과서도 모자라고 책걸상도 모자란다.
학교에서의 문제는 주로 학부형에게 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교육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학생들은 결석을 많이 하고 남학생들은 아주 거칠다. 교실 밖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고 담배를 피우고 훔치고. 고학년들.
벌을 주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오늘 벌을 주어도 내일 또 그런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학부형들이 학비를 못내서 학생들이 결석하는 일이 많고 학생들이 안나오기도 해서 애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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