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부코바에 자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 은퇴해서 부코바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다레살람 근교 음베지에 농지를 샀다. 코코넛, 오렌지 바나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집을 지었다. 방이 두 개고 거실과 식당과 부엌이 있는 집이다. 은퇴를 하면 그리로 갈 것이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까지 다 합치면 남자형제가 다섯 여자형제가 셋 있다. 다레살람, 모로고로, 부코바, 무완자, 아루샤 등지에 흩어져서 산다. 다들 결혼을 했다. 가까이 사는 남자형제들과는 자주 만난다. 그제도 모로고로에 사는 형이 왔다. 타자라에 근무하는 형은 오늘 만날 예정이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돕는다.
나의 아버지는 다레살람에서 살기는 했지만 부코바에 돌아갈 생각으로 집을 짓지 않고 셋집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부코바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는 현재 나의 샴바의 길 가까운 쪽에 다시 큰 집을 짓고 있다. 지금은 셋집에서 살고 있는데 올해 말이면 집을 다 지어서 그 집으로 이사갈 것이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리고는 부코바에 있는 웅고 고등학교에 뽑혀서 그리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성적은 디비젼 씨 였다. 디비젼 씨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좋은 성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학입학 경쟁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에 대학교에는 뽑히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는 1년간 아루샤에서 내셔널 서비스 (일종의 군복무)를 했다. 퍼레이드, 무기 훈련, 정신 단련 등의 훈련을 한다. 나의 캠프에는 1200명 가량이 있었다. 남자 여자 다 같이 훈련을 받는다.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훈련이다. 그런데 정부에 돈이 없어서 몇 년간 폐지되었다가 아마 다음달부터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작은 개인 회사에 들어갔다。건설 회사였는데 나는 견습 회계(어카운트 트레이니)로 일했다. 그러나 그 회사 주인인 인도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혹심하게 다루어서 싫었다. 게다가 월급이 너무 작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문에서 외국인에게 스와힐리를 가르치는 교사 양성을 위한 모집 공고를 보고는 응시해서 면접을 하고는 채용이 되었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래서 나를 나이로비로 보내어 교사 훈련을 시켰다.
나이로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에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단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다레살람에 돌아와서 스와힐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응시자는 무척 많았지만 6명이 뽑혀서 그중 4명은 탈락하고 결국 2명만 훈련을 받아 스와힐리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우라고 하는 사립 스와힐리 교육 기관이다.
나는 거기서 6년 정도 일하다가 독립을 해서 프리랜서로 스와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회사는 무척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한테 주는 월급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 간 나 혼자서 일하다가 다른 교사들이 나에게 동조하여 루사라는 새로운 학원을 만들었다. 현재 우리 학원에는 나를 포함하여 교사가 4명이다. 나의 아내도 역시 교사이다.
우리에게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는데 비수기에는 하루에 4시간 정도 가르친다. 성수기에는 미국 평화봉사단과 계약을 맺어서 아루샤에서 가르친다. 그들은 한번에 60명 정도 자원 봉사자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는 아루샤로 가서 3개월 동안 가르친다. 단기 집중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6시간 가르친다.
이 직업으로 나는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고 많은 다른 문화에 접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는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즉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학원을 냈을 당시 시다(스웨덴 원조기관)와 계약을 맺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연고로 나는 스웨덴을 다녀올 수 있었다. 1993년이었다. 나는 거기에 2개월 있었다. 내가 간 목적은 언어 교육장 견학이었다. 개발도상 국가들과 문화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스웨덴 인스티튜트에서 후원을 하여 갈 수 있었다. 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여러 기관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카나다인, 그리고 미국인, 일본인 서부 아프리카 그밖에 유럽인 등 순으로 학생 수가 많다.일본인들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해 오는데 미국인은 피곤하면 숙제를 안 해 온다. 북구인들은 매우 친절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니에레레 대통령 시절로 무상 교육정책이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정책이 달라져서 부모가 학비를 일정분 부담하도록 되어 아버지가 학비를 냈다.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이었는데도 대학교에 뽑히지 못해서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학원이 자리가 잡히고 내 두 번째 집을 다 짓고 나면 대학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법률을 공부하고 싶다. 만일 다레살람 대학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개방대학에 등록해서 다니겠다.
법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장차 정치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되려면 물론 법을 알아야 할 뿐더러 학력도 있어야 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한다. 내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 기여를 하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있지만 모두 부패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내가 정치가가 되어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까지 다 합치면 남자형제가 다섯 여자형제가 셋 있다. 다레살람, 모로고로, 부코바, 무완자, 아루샤 등지에 흩어져서 산다. 다들 결혼을 했다. 가까이 사는 남자형제들과는 자주 만난다. 그제도 모로고로에 사는 형이 왔다. 타자라에 근무하는 형은 오늘 만날 예정이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돕는다.
나의 아버지는 다레살람에서 살기는 했지만 부코바에 돌아갈 생각으로 집을 짓지 않고 셋집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부코바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는 현재 나의 샴바의 길 가까운 쪽에 다시 큰 집을 짓고 있다. 지금은 셋집에서 살고 있는데 올해 말이면 집을 다 지어서 그 집으로 이사갈 것이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리고는 부코바에 있는 웅고 고등학교에 뽑혀서 그리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성적은 디비젼 씨 였다. 디비젼 씨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좋은 성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학입학 경쟁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에 대학교에는 뽑히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는 1년간 아루샤에서 내셔널 서비스 (일종의 군복무)를 했다. 퍼레이드, 무기 훈련, 정신 단련 등의 훈련을 한다. 나의 캠프에는 1200명 가량이 있었다. 남자 여자 다 같이 훈련을 받는다.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훈련이다. 그런데 정부에 돈이 없어서 몇 년간 폐지되었다가 아마 다음달부터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작은 개인 회사에 들어갔다。건설 회사였는데 나는 견습 회계(어카운트 트레이니)로 일했다. 그러나 그 회사 주인인 인도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혹심하게 다루어서 싫었다. 게다가 월급이 너무 작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문에서 외국인에게 스와힐리를 가르치는 교사 양성을 위한 모집 공고를 보고는 응시해서 면접을 하고는 채용이 되었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래서 나를 나이로비로 보내어 교사 훈련을 시켰다.
나이로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에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단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다레살람에 돌아와서 스와힐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응시자는 무척 많았지만 6명이 뽑혀서 그중 4명은 탈락하고 결국 2명만 훈련을 받아 스와힐리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우라고 하는 사립 스와힐리 교육 기관이다.
나는 거기서 6년 정도 일하다가 독립을 해서 프리랜서로 스와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회사는 무척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한테 주는 월급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 간 나 혼자서 일하다가 다른 교사들이 나에게 동조하여 루사라는 새로운 학원을 만들었다. 현재 우리 학원에는 나를 포함하여 교사가 4명이다. 나의 아내도 역시 교사이다.
우리에게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는데 비수기에는 하루에 4시간 정도 가르친다. 성수기에는 미국 평화봉사단과 계약을 맺어서 아루샤에서 가르친다. 그들은 한번에 60명 정도 자원 봉사자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는 아루샤로 가서 3개월 동안 가르친다. 단기 집중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6시간 가르친다.
이 직업으로 나는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고 많은 다른 문화에 접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는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즉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학원을 냈을 당시 시다(스웨덴 원조기관)와 계약을 맺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연고로 나는 스웨덴을 다녀올 수 있었다. 1993년이었다. 나는 거기에 2개월 있었다. 내가 간 목적은 언어 교육장 견학이었다. 개발도상 국가들과 문화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스웨덴 인스티튜트에서 후원을 하여 갈 수 있었다. 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여러 기관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카나다인, 그리고 미국인, 일본인 서부 아프리카 그밖에 유럽인 등 순으로 학생 수가 많다.일본인들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해 오는데 미국인은 피곤하면 숙제를 안 해 온다. 북구인들은 매우 친절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니에레레 대통령 시절로 무상 교육정책이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정책이 달라져서 부모가 학비를 일정분 부담하도록 되어 아버지가 학비를 냈다.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이었는데도 대학교에 뽑히지 못해서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학원이 자리가 잡히고 내 두 번째 집을 다 짓고 나면 대학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법률을 공부하고 싶다. 만일 다레살람 대학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개방대학에 등록해서 다니겠다.
법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장차 정치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되려면 물론 법을 알아야 할 뿐더러 학력도 있어야 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한다. 내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 기여를 하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있지만 모두 부패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내가 정치가가 되어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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