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아프리카의 민족과 문화

5. 니제르-콩고 어족(Niger-Kordofanian Language Family)

Mansa Musa 2008. 7. 28. 11:54
    나이저 콩고 어족(Niger-Congo Family)은 나이저 코르도판 어족(Niger-Kordofanian Language Family) 또는 콩고 코르도판 어족(Congo-Kordofanian Family)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서아프리카의 세네갈로부터 동부지역인 케냐와 탄자니아 그리고 남부지역의 남아공에 이르기까지 가장 방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주로 반투어로 분리되는 언어들이 포함된다. 수단의 코르도판 지역의 언어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를 나이저-콩고어족이라 칭하고 이는 다시 6개의 하위 어군으로 분류된다. 대륙서쪽으로부터 차례로 열거해보면 월로프(Wolof), 플라니(Fula/Fulani)를 포함하는 西대서양(West-Atlantic)어군, 밤바라(Bambara), 수수(Susu) 등의 만데(Mande)어군, 모네(Mone), 구루마(Gurma), 도곤(Dogon), 카브레(Kabre)등의 볼타(Voltaic)어군(혹은 구르(Gur)어군), 네 번째로 가나, 나이지리아에서 사용되는 아산티(Ashanti), 아칸(Akan), 에베(Ewe), 요루바(Yoruba), 이보(Igbo)등의 언어를 포함하는 꾸아(Kwa)어군, 중앙아프리카아의 참(Cham), 상고(Sango), 음바(Mba), 잔데(Zande)어등으로 대변되는 아다마와 우방기(Adamawa-Ubangi)어군, 끝으로 두알라(Duala), 루안다(Ruanda), 스와힐리(Swahili), 쇼나(Shona), 헤레로(Herero), 줄루(Zulu) 등 400여 반투어를 포함하는 베누에 콩고(Benue-Congo)어군으로 이 어군만으로도 흑아프리카 중남부 전역을 차지하고 있다.

첫째로 서대서양(West-Atlantic)어군은 아프리카 대륙 서쪽 끝 대서양해안 연변과 그 배후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북으로는 모리타니아, 세네갈로부터 남으로는 라이베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사용되며 약 45개 언어가 속한다. 플라니(Fula/Fulani ; 800만정도 사용, 코카서스 인종에 가깝다.), 세레르(Serer ; 30만), 그리고 월로프(Wolof ; 120만)어가 속한다. 둘째는 만데(Mande)어군으로 말리를 중심으로 세네갈, 기니, 시에라 레온, 라이베리아, 상아해안, 부르키나 파소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가나, 말리, 밤바라(Bambara), 말린케, 디올라, 수수(Susu)등의 언어를 모두 만딩고어라고 한다. 만딩고 어는 약 600만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다. 셋째는 구르(Gur)어군 또는 볼타(Voltaic)어군으로 부르키나 파소, 가나, 토고, 상아해안, 말리 및 베넹에서 사용되고 있다. 모두 53개어로 약 550만의 화자가 사용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모네(Mone)어는 모시왕국에서 사용된 언어다. 구르마(Gurma ; 13만), 세누포(Senufo), 도곤(Dogon), 그리고 카브레(Kabre)어가 속한다. 넷째는 꾸아(Kwa)어군으로 꾸아라는 단어는 트위(Twi)어의 ‘사람, 인간’의 의미를 지닌 꼬아(kóa)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서부 기니해안으로부터 상아해안, 가나, 토고, 베넹을 거쳐 동부 나이지리아에 이르는 지역으로 해안으로부터 약 400km의 폭에 걸쳐서 분포되어 있다. 트위(Twi), 판테(Fante), 아샨티(Ashanti), 아칸(Akan), 에웨(Ewe), 가(Ga), 요루바(Yoruba ; 1986년 Wole Soyinka ‘The interpreters’로 노벨상 수상), 에도(Edo), 누페(Nupe), 이보(Igbo ; Chinua Achebee, 'Things fall apart', 'Arrow of God')어 등이 속한다. 다섯째, 아다마와 우방기(Adamawa-Ubangi)어군으로 서부 나이지리아로부터 북부 카메룬, 차드남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 북부 및 수단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한다. 참(Cham), 상고(Sango ), 음바(Mba), 잔데(Zande), 그바야(Gbaya)어가 속한다. 여섯째로 베누에 콩고(Benue-Congo)어군으로 약 400여개의 반투어가 이에 속하며 10만 이상의 언어는 50여개, 100만 이상의 언어는 10여개이다. 두알라(Duala ; 카메룬), 무에네(Myene ; 가봉),  뇨로(Nyoro ; 우간다), 키쿠유(Kikuyu ; 케냐), 스와힐리(Swahili ; 케냐 ; 탄자니아), 키콩고(Kikongo ; 잠비아), 벰바(Bemba ; 잠비아), 야오(Yao ; 말라위, 모밤비크, 탄자니아), 헤레로(Herero ; 나미비아), 쇼나(Shona ; 짐바브웨), 츠와나(Tswana ; 보츠와나와 국경을 맞댄 남아공), 줄루(Zulu ; 남아공), 소토(Sotho ; 남아공), 페디(Pedi ; 남아공), 코사(Xhosa ; 남아공), 팡(Fang ; 카메룬), 루안다(Ruanda ; 루안다), 루간다(Luganda ; 우간다), 쵸크웨(Chokwe(구자이레, 앙골라, 잠비아)어 등이 속한다.

니제르 콩고 언어들은 많은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고 다른 어족들보다 더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니제르 콩고 언어들은 지금의 나이지리아(Nigeria)와 카메룬(Cameroon)의 사바나(savanna)와 열대 우림지역에서부터 시작된 이주와 정착으로 인해 현재의 분포지역을 갖게 되었다. 서쪽으로의 이주는 니제르와 세네갈 강의 위쪽 지역까지 이르렀고 이 지역에서 그들은 포니오(fonio)와 아프리카 쌀에 기초한 농업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곳에서 그들은 흩어져 있는 나일-사하라 어족 공동체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세기에 농업, 고기잡이, 그리고 가축 돌보기 등과 소규모의 무역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가지고 있었던 원형 만데(proto-Mande)어 화자들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장소는 농업적으로 가장 비옥한 곳이었던 니제르 강 삼각주 내륙 내에 위치한 젠노-제노(Jenno-jeno)였다. 이 곳은 큰 교역망의 일부분으로 돌, 철, 구리 제품을 교역하였다.

젠노-제노와 다른 중심지들은 왕국과 제국이 출현했던 곳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그 첫 번째는 가나(Ghana)로  만데어족 중 소닌케(Soninke)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던 곳으로 이미 18세기 말 무슬림 방문자에 의해 잘 묘사되었다. 가나는 소금과 금의 무역을 관리함으로 부유해졌다. 소금은 서부 사하라(Western Sahara)에서 생산되었고 소금이 부족한 서부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우림지역에 공급되었다. 금은 이와 반대로 밤북(Bambuk)으로 알려진 세네갈(Senegal) 강의 상류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카르타고와 로마시대부터 존재한 사하라 횡단 무역로를 따라서 교역되었고 가나 왕조에서 자시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북부 아프리카를 아랍이 정복함에 따라 사하라를 따라 금을 운반하는데 노예들이 동반되었다. 국내의 노동력으로 그리고 군인들로 이용되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물로 남서 아시아 지역에서 그 가티가 높게 평가되었다.

가나의 계승자는 말리(Mali)였다. 또 다른 만데족인 말린케(Malinke)족에 의해 세워졌으며, 말리는 14세기 중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말리의 지도자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여 무슬림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팀북투(Timbuktu)와 젠네(Djenne)를 이슬람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모든 성직자들과 학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인들이 서부 아프리카를 통과하여 북쪽 지역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왕가라(Wangara), 디율라(Dyula), 마르카(Marka), 그리고 야레(Yarre)족 등이 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말리의 영토는 세네갈 강과 니제르 강의 중심지로 뻗어나갔고, 니제르 강의 연안을 넘어 동쪽과 사하라의 북쪽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많은 다른 종족들이 합류하게 되었고 14세기 말에는 심각한 파벌주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민족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리는 점차 그 영역을 잃어갔고, 마침내 16세기 말에 멸망했다. 송가이(Songhai)는 말리가 통치하던 지역에서 출현한 국가였다. 송가이 제국이 힘과 이슬람의 명성은 말리보다 훨씬 더 컸으나 얼마 안가 내부의 파벌주의에 의해 힘겨운 상태가 되었다. 1590년대, 모로코(Morocco)의 술탄(Sultan)에 의해 침입을 받았는데 그는 사하라 무역로에 공급되는 금 산지를 통제하고자 했다.  송가이 군대들은 그들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송가이 화살들과 창들은 모로코 군대의 화승총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송가이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작게 분열되었고 인종적 집단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중 하나는 타크루르(Takrur)인데, 세네갈 강의 저지대와 중간지대에서 발전하였다. 이 국가는 니제르 콩고 어족의 대서양 어군의 하나인 투콜로르(Tukolor) 어 사용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국가 종교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하라 남부의 첫 정치공동체가 되었다.

풀베(Fulbe) 또는 풀라니(Fulani)족은 소를 기르는 목축 생활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기원후 1000년 이전에 세네갈 강 계곡 지역에 다다른 베르베르족 유목민들과 접촉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처음에 타크루르의 일부로서 풀베족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의 길은 푸타 잘론(Fouta Djallon)의 고지대로 향하는 길이었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농업을 하던 다얀로케(Dyanlonke)족들과 조우하여 목축의 권리와 농산물을 교환하는 대가로 가축을 공급하였다. 개척된 또 다른 길은 니제르 강을 따라서 이어졌는데 말리와 송가이 제국에 도달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농부들과 교환 관계를 성립시켰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며 결국 하우자랜드(Hausaland)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들이 이동하는 동안 풀베족의 일부는 도시에 정착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슬람은 목축업자들을 개종시켰고 하우사족들을 개종시켰다. 이 두 공동체의 강력한 동맹은 18-19세기에 걸쳐 서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는 것을 도왔다.

송가이의 몰락 이후 지역적으로 중요해진 다른 지역 정치 공동체는 모씨(Mossi), 맘프룰리(Mampruli), 다곰바(Dagomba), 월로프(Woloff) 그리고 세레르(Serer)족 등이 있다.

니제르 콩고 지역의 통합과 확장으로 생긴 또 다른 지역은 니제르와 베누에(Benue)강의 합류지점에 있는 사바나와 열대 우림 기후의 경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5000~4000년 전 사이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렵, 채집, 그리고 고기잡이를 하였으며 얌과 기름야자를 기르기 시작했다. 인구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크와(Kwa)와 베누에 콩고(Benue Congo)어군이 출현하였다. 크와족의 구성원들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반다마(Bandama)강에 이르렀고 만데어 화자들과 경계를 맞대게 되었다.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몇몇 지역들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일부는 나이지리아의 크와 중심지역과 가까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지역은 이그보-우크우(Igbo-Ukwu) 고고학 발굴 지역으로 현재의 오니차(Onitsha)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기원후 9세기 무렵에 큰 규모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지중해보다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전해진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이그보(Igbo, Ibo) 사람들의 고향이었고 다음 세기에 남동부 나이지리아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현재 요루바(Yoruba)족은 이페(Ife)가 조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페는 기원 후 10세기 말에 정착이 시작된 도시이다. 이곳은 명백히 요루바족이 공동체가 발전하고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다른 도시들에 전략적 거점으로서 역할을 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루바족은 이 시기에 크게 번성했고, 많은 도시들과 지방 왕국들이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상아, 구리, 철,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질 높은 제품들이 생산되었다.

대략적으로 보아서 이그보-우쿠웨(Igbo-Ukwu)와 이페가 출현했던 동시대에 에도(Edo)화자들에 의해 세워진 베닌(Benin)이 출현했다. 다른 인종집단들과는 달리 이 국가는 주위의 정착지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15세기 초에는 더 넓은 베닌왕국으로 발전하였다. 하우사(Hausa) 도시국가, 그리고 송가이에 이르는 무역로는 베닌왕국이 이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왕국으로 거듭나게 했고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계속된 경제적 우위를 장악했다.

더욱 더 서쪽으로 네 번째 크와 집단이 가나의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발전했다. 11세기에 크와 어군의 아칸(Akan)족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가나와 말리에 금과 콜라 열매들의 교역으로 연결되었으며 자원들을 찾아 남쪽지역의 열대우림기후지역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어 나갔다. 16~17세기에 작은 지방의 국가들이 출현했지만 아산테(Asante)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쿠마시(Kumasi)를 중심으로 아산테 왕국은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여 갔다.

16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서부 아프리카의 인구발전은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향을 받았다. 포르투갈에 의해 초기에 이루어진 노예무역은 월로프, 세레르, 마린케족이 살고 있던 세네감비아(Senegambia)해안을 따라 이루어졌다. 가장 중요한 노예거래 장소는 고래(Gorée)섬이었다. 포르투갈은 또한 아칸족 상인들과 무역을 했는데 금의 저장소로 엘미나(Elmina)에 지어진 요새를 주요 노예 거래소로 이용하였다. 포르투갈은 베닌 사람들을 노예로 공급하여 이익을 남기려고 시도했지만 통치자들이 이익을 많이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노예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여 원활하게 노예무역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카리브해(Caribbean)과 브라질(Brazil)에서 플랜테이션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함에 따라 16세기에 들어와서는 노예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노예무역은 17세기에도 계속 성장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최고조에 달해 한 해에 평균 4 만 명의 노예들이 선적되었다. 노예무역의 감소는 카리브해 연안의 플랜테이션 농업에 변화가 일어났고 특히 영국에서 노예 폐지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1810년대에 들어와 노예무역의 수가 현저하게 감소했고 1800년대 중반에 서부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서양을 노예무역을 통해 얼마나 실려갔는지는 통계가 아직까지도 정확하지 않다. 약 1000만~1500만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고 서아프리카에서 약 절반이 넘는 인구가 유출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장 큰 인구유출 지역은 지금의 베닌에서 칼바(Calbar)의 해안과 니제르 강 삼각주의 동쪽지역이었다. 노예무역의 부정적 영향과 충격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전반적으로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인구성장이 정체되어 있었다. 노예를 포획하였던 측은 인구와 지역적 영향에 있어서 더 조직화 되어있고 군사적으로도 발달되었으며, 막강한 정치력을 가졌다. 이그보, 요루바, 아산테는 노예무역으로 성장했던 국가들이었다. 노예무역에 참여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했던 국가는 폰(Fon)족이 설립한 다호메이(Dahomey) 왕국이었다. 18세기 말까지 요루바족이 세운 오요(Oyo)왕국과 경쟁적인 관계였다.

노예로 빼앗긴 작은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특별히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소위 말해서 중부 지대(middle belt)였는데, 하우사와 모시(Mossi) 왕국과 같은 내륙지방과 해안의 왕국들과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은 비교적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정치와 경제분야의 영향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좀더 권위적인 정권이 출현했고, 총기를 갖춘 군사력을 보유하였으며 제조업과 농업이 모두 쇠퇴했다. 그들은 이러한 혼란 때문에, 노예들을 거래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노예를 포획하거나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베누에 콩고(Benue Congo)어군의 발전은 반사적으로 얻는 이익이 더 많았다. 이것은 대부분 반투의 이주에 기인했고, 이들은 실제 대륙의 절반정도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그들의 말을 가져왔다. 이들의 이주는 대부분 반투(Bantu)족의 이주로 이루어졌는데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부와 남부로 이주와 정착이 이루어졌다. 이주는 약 5000년 전에 크로스 강 계곡(Cross River valley) 근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고기잡이와 사냥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얌과 다른 작물들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결국 인구의 성장을 가져와 새로운 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몇몇 집단은 습기 있는 늪지대의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적도의 열대우림기후의 북쪽 가장자리까지 다다랐다. 3000년 전에 이들은 알버트(Alvert), 에드워드(Edward), 그리고 빅토리아(Victora) 호수의 비옥한 곡창지대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새로운 반투인구가 핵심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더욱 활발한 이주와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일부는 동아프리카로 들어갔으며 다른 사람들은 기원후 1세기 경에는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

분명히 반투족의 동쪽이주와 정착은 또 다른 나이저 콩고 어군의 일파인 우방기인(Ubangian)들의 이주와 정착을 동시에 발생시켰다. 그들은 반투족이 경험했던 유사한 식량경제체제를 시작했지만 북쪽에 살고 있던 중부 수단(Central Sudanic groups)과의 접촉으로 곡물과 가축을 기르고 있었다. 초기의 우방기인들은 적도 북쪽에서 세력을 규합하였고 후에는 잔데(Zande), 망베투(Mangbetu), 은자카라(Nzakara)와 같은 집단으로 분화하여 발전하였다.

또 다른 반투 이주자들은 좀 더 남쪽에 있는 적도의 열대우림지대로 이동했다. 강의 계곡들을 따라 그들은 작물들을 위한 비옥한 토양들과 풍부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지역, 그리고 사냥하기에 좋은 장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주와 정착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정착하여 수렵과 채집활동을 하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인 피그모이드(pygmoid)와 조우하게 되었다. 이러한 접촉은 대부분 적대적 행위가 아닌 숲의 생산품과 농산물과 제조품을 교환하는 협력적인 관계가 출현하였다. 이 결과 피그모이드의 언어는 반투족의 언어로 대체되었고 점점 더 늘어나는 반투족의 성장은 피그모이드들의 활동영역을 좁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음부티(Mbui)와 트위(Twi)와 같은 소수의 피그모이드 집단만이 소수로 남아있다.

반투족의 이주와 정착이 성공한 주요 요인은 철기 도구의 사용이었다. 철기의 사용은 보다 더 많은 땅을 개간하고 경작할 수 있게 했고 강력한 화살촉과 창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철기제조기술의 전파에 대한 기원은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하나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조스 고원(Jos Plateau)의 주변에 있는 타루가(Taruga)다. 발견된 용광로와 철광 침전물은 기원전 400-700년 사이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철기제조기술이 이곳에서부터 반투족이 이주한 지역을 포함하여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고 추측되어진다. 두 번째는 빅토리아 호수 지역에 있는 부하야(Buhaya)에 있다. 타루가와는 어떠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러한 발전이 독자적인 발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열대우림지역에서 출발한 반투족의 이주는 모든 방향에서 이루어졌고 동부 아프리카의 사람들과 상호교류를 했다. 결국 특별한 지역들이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으로 출현했다. 그 하나는 빅토리아 호수 지역으로 바나나가 보급됨으로서 농업 생산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나나는 남동 아시아가 그 기원지로 약 200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약 600-700년 전에 왕국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분요로(Bunyoro), 부간다(Buganda), 은코레(Nkore), 르완다(Rwanda), 그리고 부룬디(Burundi)왕국들이 강력한 왕국들로 출현하였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소에 기반을 둔 귀족 정치가 나일(Nilotic) 목축업자들과 반투족들의 연합으로 발달하였다. 그들은 투치(Tutsi)로 알려지게 되었고 다수 집단인 후투(Hutu)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동아프리카에 있는 또 다른 반투 집단들은 고원 지대에 출현했는데 특히 키쿠유(Kikuyu), 메루(Meru), 그리고 엠부(Embu)족들이 대표적이었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산은 차가(Chaga)인들이, 우삼바라(Usambara) 산맥은 샴바(Shambaa)인들이, 그리고 말라위(Malawi) 호수의 북쪽 고지대는 냐큐사(Nyakyusa)인들의 주 정착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비옥하지 않은 저지대로의 이주는 이후 이루어졌는데 헤헤(Hehe), 고고(Gogo), 투루(Turu), 그리고 냠웨지(Nyamwezi) 족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케냐의 그레이트 리프트 계곡(Great Rift Velley)에서부터 탄자니아 중부까지 반투족과 나일(Nilotes)족의 접촉은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접촉은 때때로 갈등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관계는 평화스러웠고 서로의 생산물을 교환하는 관계를 만들었다.

동아프리카를 넘어 반투인들의 이주는 그들을 가장 생산성이 높은 남부 아프리카의 경작지역으로 이루어졌다. 트란스발(Transvaal)에 그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많은 소토-츠와나(Sotho-Tswana)족들이 정착하였고 나탈(Natal)의 언덕을 따라 은구니(Nguni)족이 정착했다. 두 언어집단의 정치구조는 은구니 줄루(Zulu)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18세기 말까지 작고 자급자족적인 형태로 남아있었다. 줄루족의 군사체제인 임피(impi)는 19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전략으로 자리 잡았고 줄루족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파괴와 이주를 의미하는 음페카네(Mfecane)의 시기 동안 많은 남부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멸망하거나 쫓겨났고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음펭구(Mfengu)나 바소토(Basotho)같은 새로운 집단들이 만들어졌다.

짐바브웨의 비옥한 토지는 어떻게 쇼나(Shona)족들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지 잘 설명해준다. 이 지역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갖게 된 이유는 금 무역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금 무역의 독점은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의 도시국가를 출현시켰고 12세기부터 15세기 까지 번영을 누렸다. 두꺼운 돌로 집이 만들어졌고 비단, 양탄자, 그리고 자기 제품 같은 사치품들이 소팔라(Sofala)와 킬와(Kilwa) 항구에서 아랍과 스와힐리 상인들에 의해 거래되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다른 쇼나(Shona) 국가들, 특히 무타파(Mutapa)와 바투아(Batua) 같은 국가들에게 무역 주도권을 잃게 됨으로서 이 지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생산적인 농업활동과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은 또 다른 사람들은 콩고 강 하류의 둑을 따라 거주한 콩고(Kongo)인들이었다. 그들이 형성한 왕국은 15세기 말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침입했을 때는 이미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상업적인 관계가 세워졌고 두 국가는 외교관계도 맺었다. 상아와 밀랍이 처음에 거래되었고 다음 세기 초반에는 콩고인들은 노예무역에 종사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활동이 그들의 지위를 강화시켰지만 17세기에 왕국의 붕괴를 초래한 내부와 외부의 경쟁으로 치달게 되었다.

노예 거래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중앙아프리카에 영향력을 계속해서 미쳤다. 중부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대서양 횡단 무역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주로 브라질에 노예가 공급되었다. 오빔분두(Ovimbundu), 룬다(Lunda), 초크웨(Chokwe), 그리고 로지(Lozi) 같은 왕국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 노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점 더 상아 무역에 치중하게 되었는데 대서양 해안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상아무역이 이루어졌다. 노예 무역에 의한 붕괴는 서아프리카에서 경험한 것 보다 훨씬 더 컸고, 상당한 인구 손실을 야기했다. 가장 큰 타격 가운데 그들이 카르툼(Khartoum) 노예상인들의 목표가 된 우방기(Ubangians)인들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