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민주공화국은 독재와 부정부패로 역사적으로 실패국가(failed state)였다!

2018. 4. 13. 16:07



[세계의 분쟁지역]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아프리카 지역분쟁이며 자원이 있는 한 계속될 수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식민지 시기 이전에는 콩고왕국(Kongo Kingdom)이었으나 4번의 국명을 바꾸고 나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개의 국명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콩고민주공화국이 순탄치 않은 역사를 갖게 되었으며 현재의 상황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지도 > 콩고민주공화국 국명

(http://www.bbc.com/news/magazine-24396390) 



콩고지역에는 콩고왕국이 있었으나, 19세기말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침입에 의해 콩고강을 중심으로 분리되어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서부지역은 프랑스가, 내륙의 탕가니카호()를 끼고 있는 동부지역은 영국이 각각 점령하였다. 1885년 콩고조약에 의해 동쪽은 벨기에령이 되고, 서쪽은 프랑스령이 되어 1960년 독립을 성취할 때까지 각각 식민통치를 당했다.


1960년 서부지역은 콩고공화국(브라자빌 콩고라고 부르기도 함)으로 동부지역은 콩고 민주공화국(킨샤샤 콩고, 1971년부터 1997년까지는 자이레로 불림)으로 각각 독립하여, 냉전시기에는 콩고공화국이 구소련에, 콩고민주공화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콩고민주공화국은 75년간 레오폴 2세와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독립과 함께 5년 동안 내전을 치렀다. 벨기에령 콩고는 독립 당시 카사부부(Joseph Kasavubu)가 이끄는 바콩고협회( Alliance of Bakongo)와 패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가 이끄는 콩고국민운동(Cologolese National Movement : MNC)이 정치 세력으로 활동했다.


카사부부는 레오폴드빌(현재의 킨샤사)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연방주의를 주장하였고, 루뭄바는 스탠리빌(Stanleyville, 현재의 Kisangani) 지역에 지지 기반을 두고 가나의 지도자 응크루마(Nkrumah)의 범아프리카주의에 호응하여 즉각적인 독립과 반식민주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606월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하였으며 카사부부는 대통령에 루뭄바는 총리에 각각 선출되었다.


그런데 독립과 동시에 광물자원이 풍부한 남부 카탕가(Katanga) 지역에서 벨기에의 지원을 받은 모이스 촘베(Moise Tshombe)가 독립을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켜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엔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내전상태가 지속되자, 루뭄바는 가나와 구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문에 루뭄바는 친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어 서방권 국가들로부터 기피인물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카사부부가 루뭄바를 총리직에서 해임시키자, 루뭄바는 이에 불응하고 의회를 동원하여 카사부부를 하야시키려 하여,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정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모부투(Mobutu Sese Seko)가 자신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루뭄바를 체포하여 카탕가 반군에게 넘겨 루뭄바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모부투의 도움으로 정권을 되찾은 카사부부는 촘베를 총리에 임명하는 등 일시적으로 정권을 안정시켰으나, 196511월 모부투가 재차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이후 약 30여 년간 모부투의 장기집권이 지속되게 된다. 자이레로 국명을 바꾼 모부투는 독재와 부정축재로 콩고민주공화국을 실패국가로 만들었다.


19975월 모부투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롤랑 카빌라(Laurent Désiré Kabila)는 권위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으나 패트리스 루뭄바의 민족주의를 추종했다. 그는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다수당체제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필자가 킨샤사에서 한 택시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 시기에 콩고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뇌물을 주고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정부로부터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2001년 대통령 경호원에 의한 모부투의 암살로 콩고민주공화국은 강력한 지배체제를 만들지도 못했고 내전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도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아들인 조셉 카빌라(Joseph Kabila)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롤랑 카빌라가 주장한 콩고민주공화국의 민족주의 정책이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암살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다. 중세의 왕권국가도 아니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젊은 카빌라는 취임 이후 좋은 통치(good governance)를 통한 국가발전보다는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또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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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부터 왜 아프리카에서 민주화가 시작되었을까?

2018. 4. 13. 15:55


많은 부분에 있어 1990년대 초 아프리카 정치사는 냉전의 소산이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가 없었다면 아프리카에서 독재자들이 계속해서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한 후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치경제 상황은 국제사회의 이데올로기 대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의 관심이 아프리카에서 멀어지면서 아프리카인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강대국이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을 위해 더 이상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프리카에 결정적인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1990년 초기, 독립 이후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외국 후원이나 지지보다 국내 지지가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정권의 정당성과 허약성에 직면해야 했고, 다른 지도자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1990년대 초반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힘든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심각한 구조적인 경제 위기와 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에 열망은 경제위기와 함께 공공 의식의 성장 속에서 터녀 나왔다. 도시 노동자들을 포함한 전문가, 학생 등 정치적으로 의식을 갖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정부의 정책과 비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세계은행, IMF, 그리고 그 밖에 원조기구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재정적인 도움에 대해 확실히 못박았다. 아프리카 정부는 그동안 방치했던 인권문제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관심을 가져야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국민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했으며, 부패를 타파해야 했다. 아프리카 정부는 구조조정정책(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s)을 받아들여야 했고, 시장 세력이 그들의 경제에 대해서 내리는 지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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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후 아프리카국가들이 일당제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2018. 4. 13. 15:54


독립을 얻은 새로운 아프리카 국가는 국민의 정치적 이익의 수준을 지속시키고 국민을 통합시키는데 실패했다.


많은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이 일당제를 채택한 것은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일당제는 정당내부에 심각한 경쟁과 분열을 막을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당제에 대한 반대 주장에 대해 유럽인이 고안한 제도보다 집단 내부의 민주주의를 반영하는 아프리카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행히도 일당제는 정당의 권력집중을 합리화시키는데 사용되었고 정부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정치화 되었다. 또한 어떤 때는 일당제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민족적, 지역적 집단을 국가라는 제도 속에서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일당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했다.


정치적 영역에서 합법적 경쟁은 불가능했고 부패한 정부 관료가 경제적으로 착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인물의 출현은 이단자로 여겨지거나 배제되었다. 오래지 않아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구테타를 경험해야 했고 역 구테타가 발생하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문제로 인해 아프리카의 정치적 문제는 식민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취약성과 함께 작용하여 더욱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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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왜 발전하지 못하고 1세기 동안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야만 했는가?

2018. 4. 13. 15:53


1960년대 독립 전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주의의 흥기와 함께 탈식민화로 인한 해방을 맛보게 되어 아프리카의 낙관주의(Afro-optimism)가 예고되었으나, 국가체계의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과거 식민지 유산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서구에 대한 재의존과 냉전체제 속에서 내전 및 국가간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식민지 독립 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식민/제국주의의 조형물이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독립에 대해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독립 후 아프리카국가들은 민족집단의 통합과 국가의식을 함양하는데 최우선적인 목표를 두어야만 했다.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를 얻은 초기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흥분과 희망이 가득했다. 곧바로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통치라는 명백한 짐이 사라진 것이었다. 정부 청사에는 새로운 깃발이 펄럭였고, 유럽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 정치 권력을 쥐었으며, 세계가 신생국들을 자치국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독립의 흥분 뒤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곧 대면할 수많은 문제들이 가려져 있었다.


시작부터, 독립 후의 지도자 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당파들 사이에 내부 갈등이 빚어졌다. 민족주의 운동 단체로 이루어진 반식민주의 기구들은 민족, 지역, 이데올로기적 계통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독립을 이루자, 식민주의 압제에 대한 반대라는 공통적 유대가 약해지거나 사라지면서 당파간 또는 당파내 갈등이 생겨났다. 불화를 일으킨 이슈 중 가장 큰 것은 정부와 여당내 권력에 대한 접근이었다. 중앙 정부건 지역 정부건 간에 정부 내 직위는 영향력 있는 결정과 자원에 대한 지배력, 개인적 이익에 대한 접근을 의미했다.


탈식민화 시기의 선거로 국가 지도자가 된 반식민주의 지도자들은 깨지기 쉬운 국가적 화합에 직면했다. 식민주의자들이 통치한 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 집단, 정치적 존재, 상업 지역이 해당되었다. 식민 통치기에는 식민지 내에서 사람들을 통합하거나 단결시키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통제 수단으로 민족 집단들이 서로 대립하게 하는 경우가 잦았다.


독립 이후 취약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 계층, 엘리트 집단과 같은 경쟁 세력 간의 갈등과 부와 고용의 창출, 교육, 및 국가 자원의 배분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정치구조는 정쟁의 장이 되었고 그 뿌리가 허약했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독립초기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낙관주의가 팽배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정치적 식민주의는 끝났지만 경제적인 간접지배를 통해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독립 이후 40여 년간 잘못된 통치와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낙후, 빈곤, 불평등 악화. 정치적 실패로 이어졌는데 이는 과거 식민시대의 정치형태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1970~1980년대에 국가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또한 정치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도구로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는 식민지배시기부터 이어온 외국인들의 착취를 없애고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과거에 있었던 공동체적 평등주의 요소를 부활하자는 전략의 표출이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에 들어와 일당독재체제 또는 군사독재정권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정치인들의 폐쇄적인 정치행태와 개발독재를 정당화 하려는 욕심은 군사정부가 출현하게 하였다. 아프리카 특징적인 정치 형태는 공직자의 부정부패, 정부의 신뢰성 결핍, 그리고 인권침해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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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당시 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정이 달랐을까?

2018. 4. 13. 15:52


독립의 과정은 식민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독립의 과정을 겪었다. 즉 백인 이주민들의 이익에 따라 독립의 방식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지도> 식민지배국가와 아프리카의 독립년도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식민지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수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 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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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게 끼친 노예무역의 부정적인 영향

2018. 4. 6. 10:05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사회가 후진성을 띠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약점과 의존성은 식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에 크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환경이나 기술, 사회 조직, 종교적 신념, 개인적 시도와 같은 식민지 이전 시대의 아프리카 사회를 형성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노예무역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인위적인 인구손실로 아프리카가 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예무역의 성장은 아프리카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하였다. 17세기-19세기에 이루어진 노예무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붕괴시켰다


신세계로 이송된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데에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최근의 계산에 의하면, 15세기와 16세기에 잡혀간 사람들까지 합쳐 모두 1,000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절반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나머지 절반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사람들이다. 노예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약 5배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의 인구손실은 약 1억명을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약 1,000만 명 이상이 노예무역으로 인해 죽거나 유출되어 가장 심각했으며, 19세기에는 약 400만 명 이상이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미친 광범위한 부정적 이미지와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지금까지 고착화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아프리카 사회가 저발전의 단계에 머물게 하였으며 생산적이지 못한 무역체계로 인해 세계 시장에서의 불리한 위치 놓이게 되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해 서구사회는 아프리카의 희생을 발판으로 부유해졌고, 그러므로 아프리카가 현재 처해 있는 경제적 후진성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중심주의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광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프리카의 문명은 오히려 대서양 노예무역의 영향으로 변형되고 야만화 되었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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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와 아프리카 중심주의(Afrocentrism) 역사학 방법론은 무엇일까?

2018. 3. 23. 16:24

아프리카 중심주의의 주요한 지지자로 여겨지는 아산테(Molefi Kete Asnate)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를 하나의 이념적인 운동으로서 정의하고 "아프리카 문화와 그들의 행동에 대한 분석의 중심이 되는 아프리카의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아산테에 따르면 아프리카 중심주의는 "누비아, 에티오피아, 이집트의 아프리카 문명으로부터 획득한 아프리카의 문화유산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된다. 그는 검은아프리카의 역사적 성취가 고대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국외이주로 인해 서구의 지적인 사고, 문화, 과학적 진보에 중요한 공헌자로서의 아프리카인들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풍부한 유산을 빼앗겨 역사서술에서 타자화(Others)되고 주변부화(marginalization)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의 필요성은 그동안 아프리카학에 대한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Eurocentric paradigm)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면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시각이 보편적인 연구방법론으로서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유럽이 모든 가치 판단의 근거로서 인식되어왔고 문명에 대한 정의도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방법론으로서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시각은 분명히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해줄 것이 틀림없다.


아프리카 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은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와 인종주의(racism)를 극복하고 아프리카인들 스스로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바라보려는 자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는 백인들의 독재와 주도로 인해 아프리카인들과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를 주변부에 머무르게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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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역사학 방법론과 구전전통(oral tradition)의 중요성

2018. 3. 23. 16:23


특히 문자사회라는 아프리카의 특성상 구전전통구비전승(oral tradition)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구전은 풍부한 기억력과 상상력을 기초로 에서 을 통해 사실을 전승하는 방법론으로 문자체계가 없었던 사하라이남 반투 사회의 대표적인 역사전승 방식이었다. 함파테(Hampâtâ Bé)아프리카에서 나이 많은 이가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진다고 말한 내용은 역사적 자료로서 구전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전전통은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니고 있는 보물단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유산을 관리하는 사람들(the custodians of heritage)’로 불렀다. 이러한 사람들을 서부아프리카에서는 그리오(griots), 남부 아프리카의 줄루족과 코사족에서는 임봉기(imbongi)라고 불렀고 서부 아프리카보다는 자유로운 형태로 동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연장자나 주술사 등 사회의 전문가집단에 의해 전승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이 이와 같은 구전역사가들의 발화를 통해 나타난 신화, 전설, 찬양시, 속담, 이야기, 그리고 음악 속에서 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프리카인들은 말을 대상화하지 않고 지시체의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언어를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존재의 통합적 특성이 발화의 힘 속에 체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말은 단지 학습된 형식의 효과적인 정교화가 아니라 개인이 가진 발성되는 힘이었다. 그리하여 발화는 개인의 지위에 따라 상대적 무게를 가진다. 말의 힘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되어 저주, 주문, 기도와 같은 위대한 말들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문화에서 말하고 명명하는 것은 경험을 창조하는 것,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체계는 구체에서 추상의, 사물에서 말의 명쾌한 분리에 실증적 지식이 있다고 보았던 19세기 유럽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비전승의 역사전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책, 기록문, 기록보관소의 문제와 관련된 나라들에서는 과거에 대해 일종의 거리감, 격리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친숙한 이름들을 지닌 구비전승에 너무도 가까이 있어 역사가 공동의 자산으로 변모되어 대대손손 읊어지고 또 읊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구비전승된 것들은 주의 깊게 추려질 것과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적확히 직시한다면 아프리카를 이해하기 위한 구전전통의 연구를 통한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연구는 매우 의의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의 구전전통이야말로 아프리카 역사문화의 보고로서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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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였을까?

2018. 3. 23. 16:17


서구 학자들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문명화에 대해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언제나 아프리카 대륙 외부로부터 영향과 기여를 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하여 설명하여왔다


이러한 인식과 평가는 아프리카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거나 아프리카는 역사가 없다.’라는 아프리카 타자화(Others)’ 또는 주변부화(marginalization)’의 과정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근거에는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적인 사고와 쓰인 문헌 자료(written materials)’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역사적 자료로 여기지 않는 역사학적 대한 접근방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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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가 다양성(多樣性)과 복잡성(複雜性)을 갖고 있는 것일까?

2018. 3. 16. 10:45


아프리카는 다양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이유로 복합성(複合性)과 다양성(多樣性)이 존재하는 대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아프리카는 알라스카를 뺀 미국의 3.5배 크기로 아시아 대륙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대륙으로 국가 수만 54개에 이르고 있다. 언어는 곧 민족 집단의 수라고 할 수 있는데 지구상에 알려진 6,000여개의 언어 중 1/3이 넘는 약 2,034여개의 언어가 아프리카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언어적으로 다양하다. 도농 간 격차, 지역적 차이, 경제적 생활환경, 그리고 종교 같은 사회문화적인 다양성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식민주의의 유산, 민족주의 등으로 인하여 국가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립이후에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각기 다른 정치체제의 선택, 식민종주국과의 이해관계, 지도자들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 강력한 보편적 공유요소, 즉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이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즉 아프리카를 하나의 대륙 또는 하나의 지역으로 묶어서 설명하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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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지역학 연구의 연구방법론.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 방법론

2012. 7. 17. 21:39

 

 

아프리카 지역학 연구의 연구방법론.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 방법론

 

 

 

아프리카는 전 지구 면적의 1/5(3032만 ㎢)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이다. 정치적 통합체는 약 53개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약 8억 3천만(2000년 추정)으로 1000여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아프리카는 多樣性(diversity)과 逆動性(dynamism)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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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프리카의 역사가 유럽인들의 도래로 시작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증명할 필요는 없으며 또 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이며 ‘유전학적 보고(genetic heritage)'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질문거리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에 대한 의식은 어떠한가?”, “과거에 대한 그들의 의식은 무엇인가?”, “아프리카인들의 사고체계 속에서 역사의 역할은 무엇인가?”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전통에서, 신화(myth), 전설(legend), 그리고 상징(symbolism)들은 종족의 기원, 역사적 사건의 원인, 이주, 그리고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분리되거나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사실들은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의존은 조상들, 부족의 창시자나 왕국의 건설자에 대한 외경과 공경들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신에 대한 존재, 살아있는 것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세대를 거쳐 나타난 그들의 정신과 기억들만큼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은 젊은 사람들의 역사의식의 과정을 도와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동과 연장자에 대한 태도등 집단의 전통과 일치할 때 그것은 칭찬되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조상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덕적 규범들을 어기거나 공격하는 것은 조상들의 정신을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이런 생각에서 역사는 사회적 통제와 집단의 공고함과 결속을 가져올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아프리카 역사전통은 식민주의 가치, 기술, 인종적 우월주의, 그리고 편견으로 후퇴를 가져왔다.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보존할만한 가치 있는 과거가 없었다는 주장은 식민주의자들이 전략적으로 꾸며낸 논리이며 상대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 가치, 그리고 제도들을 더욱 훌륭한 것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적자생존논리에 입각한 다아윈의 진화론에 근거한 유럽인들의 지적 환경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인들에 의해 고착화되고 뒤틀려진 이러한 흐름을 바꾸려는 노력을 아프리카인들은 계속하고 있다. 남아공의 웨스턴 케이프 대학(University of Western Cape)에는 메이부이어(Mayibuye)연구센터가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식민지시대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자’라는 뜻이다.

 

 


아프리카학 또한 다른 학문(지역학)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본질’ 또는 ‘아프리카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른 지역학분야와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지역학분야보다도 더욱 학제간 연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는 아프리카 대륙만이 갖는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그렇다. 기록 문자가 다른 대륙보다 적은 아프리카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나가기 위해 새롭게 개발된 실증적 연구방법론을 갖춘 연구분야가 중시되고 있는데 구전전통과 구비전승의 역사,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언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역사의 재구성은 하나의 도전으로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자료의 한계로 아프리카 연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에서 식민지 시대 이전의 과거역사에 관한 문자 이외의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이러한 자료로서 구전전통ㆍ구비전승(Oral historyㆍoral tradition)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함파테(HampâtâBé)가 ‘아프리카에서 나이 많은 이가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진다.’고 말한 내용은 역사적 자료로서 구전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전전통은 세대를 거쳐 전해내려온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니고 있는 보물단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관리하는 사람들(the custodians of heritage)이었다. 이러한 집단기억을 관장하는 관리집단을 서부아프리카에서는 그리오(griots) 말리에서는 디엘리(dieli)라고 불리어졌다.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비전승의 역사전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책, 기록문, 기록보관소의 문제와 관련된 나라들에서는 과거에 대해 사람들이 일종의 거리감, 격리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친숙한 이름들을 지닌 구비전승에 너무도 가까이 있어 역사가 공동의 자산으로 변모되어 대대손손 읊어지고 또 읊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주의 깊게 추려지고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이 신화, 전설, 격언, 시, 의식, 이야기, 그리고 음악속에서 그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아프리카의 고고학(archaeology)으로부터 우리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구전전통의 역사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주로 고대유적이나 사원등을 발굴하여 당시의 생활상이나 문화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고도의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이는 아프리카 유적들(예를 들어 짐바브웨 유적)을 탐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고고학중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민족들을 연구하는 것이 선사학(先史學)인데 아직까지 문맹률이 높아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부족민의 문화와 생활을 연구하는데 인류학과 더불어 좋은 방법론을 아프리카지역하게 제공하고 있다.

 

 


셋째, 인류학(anthropology)또한 중요하다. 인류학분야중 문화인류학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문화에 관한 일반화와 이론화를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학 연구를 통해 얻어진 물질문화자료, 사회, 정치제도, 사회집단, 사회변화, 가치체계 그리고 종교와 철학적 사고의 연구는 역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언어학의 연구도 중요하다. 언어는 두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기호체계(a system of signals)이며 또 하나는 특정 언어집단의 문화유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어학의 연구는 바로 사람들의 문화양상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특별한 언어가 발전되었을까?, 다른 언어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상호관계를 가졌을까? 이런 질문들은 역사비교언어학(comparative historical linguistics), 어휘통계(lexico-statistics), 그리고 언어연대학(glottochronology)같은 연구를 통해 아프리카 지역학 연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의 유산인 언어를 제반 다른 사회영역 즉 정치, 사회, 철학, 역사, 심리학 등과 연관지어 언어가 이들에 미치는 영향 혹은 언어속에 이들 요소들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가 정치와 연관되는 부분에서는 언어정책(language policy), 언어선택(language choice), 다언어 현상(multi-lingualism), 언어교체현상(language-substitution)등 아프리카 사회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언어사회학적 제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동물학(zoology)과 식물학(botany)또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었는가는 사람들의 생각, 이주, 무역루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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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이미지와 역사․문화적 정체성

2012. 7. 17. 21:27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역사․문화적 정체성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반쯤 벌거벗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아프리카(Primitive Africa)로 인식되고 있거나 아니면 열대우림의 정글과 야생의 동물들이 살고 있는 야생의 아프리카(Wild Africa)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좀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발전되지 못하고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아, 가난, 질병, 내전, 구데타, 부정부패 등 아프리카는 희망이 없는 비관주의(Afro-Pessimism)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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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아프리카를 정확하게 보고 있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는 것으로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프리카는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에 역사적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지배 통치하였던 국가들이 세계사 속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역사문화적인 분석이 물론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지역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대륙으로 53개국이라는 국가가 속해있으며 약 10억에 이르는 인구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보고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울러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아프리카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을 채택하고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됨으로서 21세기에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될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친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언제나 우월한 인종으로서 행동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일을 같이하면서 느낀 점은 이들은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오랜 기간동안 외국인들을 대하는 ‘노하우(?)’가 잘 준비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매사에 진정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며 정말로 어떤 계기가 없다면 외국인들은 ‘친구’라기 보다는 ‘이방인’ 또는 ‘침략자’ 등으로 생각한다. 또한 외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검둥이’, ‘머리 나쁜 사람들‘ ’게으름뱅이‘ ’흑인들은 안돼!‘ 라는 의식을 저변에 깔고 대하기 때문에 좀처럼 ’차별‘이라는 벽을 넘기가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 역사와 문명이 존재했었는가에 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인종차별주의와 문명 우월주의자들의 중요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는 백인이 도래한 이후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설사 그 이전에 어떠한 원주민의 사회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nold Toynbee)로 인한 바 크다. 그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이집트, 안데스, 중국문명 등 세계의 문명을 21개의 문명으로 분류하여 상호비교연구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문명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또 21개의 문명의 주체를 인종에 따라 분류할 때에도 “어느 문명에도 적극적으로 공헌하지 않는 것은 흑색인종뿐이다”라고 흑인의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무지를 가져오게 된 이유는 아프리카의 '타자(他者 ; Others)화'되고 ‘주변부화(Marginalization)'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머피(E. Jefferson Murphy)교수의 말처럼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고 백인들의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경멸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필요로 했던 유럽인들은 非유럽 세계를 자신들의 타자로 상정하였다. 유럽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확인하였으며 어떤 면에서 유럽은 非유럽인들에게 부과한 인식론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유럽문명의 토대가 되는 백인과 非백인, 문명과 야만, 진보와 정체 등의 개념이 정립되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유럽 지식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근대를 보편적 근대로 상정하고 공간적․시간적 동질화를 추구하는 역사 인식을 낳았으며, ‘유럽의 현재’를 ‘非유럽인의 미래’로 투영함으로서 역사적 진보를 정의하였다. 유럽이 ‘근대’라면 非유럽은 ‘전근대’ 또는 ‘非근대’여야만 했다. 서양인들이 非서구세계에 대해 행한 차별하기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서양에 대조되게 非서구세계를 정체한 혹은 퇴락한 사회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유럽이 자유, 진보, 문명, 역동성을 의미한다면 非유럽세계는 예속, 정체, 야만, 무기력을 의미하였다.

 

오늘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유럽의 식민통치체제와 맞물린 경제, 환경, 정치,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통치 이전 수천 년에 걸쳐 쌓인 아프리카 역사의 일정한 양식과 정체성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고 식민지 이후의 아프리카를 형성하는 데에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대륙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이 역사적 도전에 처했을 때마다 반응했던 고도의 적응성과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고 또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이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배와 침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처럼 완전히 서구문화에 동화되지 못했는가?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문화가 월등하고 우월하다면 당연히 아프리카라 문명권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서구인들의 지배와 침탈의 과정이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에 비해 이익이 덜했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은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나타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을 살펴본다면 절대적인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중국, 인도등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서구열강으로부터 지배를 벗어나고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강력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 아프리카에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문화적 전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아프리카인들이 그들 나름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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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2012. 7. 17. 13:3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이주와 식민지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이주의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주요한 언어집단들이 서로 교류하였고 문화이입(文化移入)이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인종적 다양성은 인종의 우열과 열등이라는 악마적인 개념을 갖게 함으로서 남아공의 정치역사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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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500년사라고 이야기하며 백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는 비어있는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남부 아프리카에는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비롯한 코이산족과 쿨루, 코사등 반투인들이 살고 있었다.

 

백인들의 최초의 이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는 네덜란드 본토에서 보내는 식민 이주자들과 종교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주해 온 프랑스계, 독일계 등의 이주민들로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18세기말에는 영국계 선교사들도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을 비롯한 남아공의 주요 지명을 보면 유럽의 다양한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인근 서부 아프리카와 동인도 등지에서 노예들을 수입하는 한편 자신들이 정복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은 새로운 인종집단이 칼러드(Coloured)가 생겨난다.

 

또한 유럽 본토에서 발생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혁명에 잇따른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네덜란드의 왕정이 무너지자 영국은 두 차례에 걸쳐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강제로 점령하였다.

 

 

영국의 케이프 타운 지배와 영국화 정책에 항의하여 이루어진 보어인 들의 대이주(Great Trek)는 수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들은 이주자(Voortrekkers)로 불리어졌고 우마차를 타고 소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철저한 켈빈교도였으며 영국의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이주해 각각 줄루족, 은데벨레족, 코사족 등 흑인 원주민들과 치열한 싸움을 거친 끝에 트랜스바알 공화국, 오렌지 자유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남아공에서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케이프 총독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케이프 타운에서 카이로까지의 종단정책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 세력간의 적대감정은 3년간에 걸친 앙골로 보어 전쟁(Anglo-Boer War)으로 나타났다.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1910년에는 케이프, 나탈, 오렌지, 트랜스바알 등 4지역이 합쳐져 대영제국내의 특수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The Union of South Africa)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정책을 내건 국민당(National Party)이 승리하기까지 남아연방의 정권은 줄곧 보어계 정당들이 장악해 왔으나 1991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는 연설에서 아파르트정책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드디어 1994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최초의 흑백 다인종 선거를 실시하여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6월 민주당과 국민당이 합당을 통해 민주동맹당(Democratic Alliance)이 됨으로서 아프리카너 백인과 영국계 백인이 서로 화합하게 되었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던 국민당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흑인정권 출범이후 남아공은 흑백간의 갈등 또는 흑흑간의 정권투쟁으로 인해 내전이나 종족분규로 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깨고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남아공 호는 인종간의 갈등을 화해와 타협으로 이끌어 무사히 안착했으며 염려했던 경제도 예측가능한 상황으로 회복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명실공히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헤게모니를 가진 지도국의 위치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아프리카국가들의 발전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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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말'의 힘

2012. 7. 16. 22:52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말'의 힘

 

 

1. 서론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반쯤 벌거벗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아프리카(Primitive Africa)로 인식되고 있거나 아니면 열대우림의 정글과 야생의 동물들이 살고 있는 야생의 아프리카(Wild Africa)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좀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발전되지 못하고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아, 가난, 질병, 내전, 구데타, 부정부패 등 아프리카는 희망이 없는 비관주의(Afro-Pessimism)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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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아프리카를 정확하게 보고 있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는 것으로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프리카는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에 역사적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지배 통치하였던 국가들이 세계사 속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역사문화적인 분석이 물론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지역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대륙으로 53개국이라는 국가가 속해있으며 약 10억에 이르는 인구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보고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울러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아프리카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을 채택하고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됨으로서 21세기에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될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친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언제나 우월한 인종으로서 행동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일을 같이하면서 느낀점은 이들은 식민지배를 겪으면서 오랜 기간동안 외국인들을 대하는 ‘노하우(?)’가 잘 준비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매사에 진정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며 정말로 어떤 계기가 없다면 외국인들은 ‘친구’라기 보다는 ‘외국인’으로 생각한다. 또한 외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검둥이’, ‘머리 나쁜 사람들‘ ’게으름뱅이‘ ’흑인들은 안돼!‘라는 의식을 저변에 깔고 대하기 때문에 좀처럼 ’차별‘이라는 벽을 넘기가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있지 않고 특히 아프리카인들의 ‘말’에 대해 주의하여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아프리카인들의 ‘말’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친구’로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2.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아프리카에 역사와 문명이 존재했었는가에 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인종차별주의와 문명 우월주의자들의 중요한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는 백인이 도래한 이후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설사 그 이전에 어떠한 원주민의 사회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nold Toynbee)로 인한 바 크다. 그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이집트, 안데스, 중국문명등 세계의 문명을 21개의 문명으로 분류하여 상호비교연구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문명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또 21개의 문명의 주체를 인종에 따라 분류할때에도 “어느 문명에도 적극적으로 공헌하지 않는 것은 흑색인종뿐이다”라고 흑인의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무지를 가져오게 된 이유는 아프리카의 '타자(他者 ; Others)화'되고 ‘주변부화(Marginalization)'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머피(E. Jefferson Murphy)교수의 말처럼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고 백인들의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경멸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필요로 했던 유럽인들은 非유럽 세계를 자신들의 타자로 상정하였다. 유럽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확인하였으며 어떤 면에서 유럽은 非유럽인들에게 부과한 인식론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유럽문명의 토대가 되는 백인과 非백인, 문명과 야만, 진보와 정체 등의 개념이 정립되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유럽 지식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근대를 보편적 근대로 상정하고 공간적․시간적 동질화를 추구하는 역사 인식을 낳았으며, ‘유럽의 현재’를 ‘非유럽인의 미래’로 투영함으로서 역사적 진보를 정의하였다. 유럽이 ‘근대’라면 非유럽은 ‘전근대’ 또는 ‘非근대’여야만 했다. 서양인들이 非서구세계에 대해 행한 차별하기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서양에 대조되게 非서구세계를 정체한 혹은 퇴락한 사회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유럽이 자유, 진보, 문명, 역동성을 의미한다면 非유럽세계는 예속, 정체, 야만, 무기력을 의미하였다.

 

 


오늘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유럽의 식민통치체제와 맞물린 경제, 환경, 정치,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통치 이전 수천 년에 걸쳐 쌓인 아프리카 역사의 일정한 양식과 정체성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고 식민지 이후의 아프리카를 형성하는 데에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대륙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이 역사적 도전에 처했을 때마다 반응했던 고도의 적응성과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고 또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이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배와 침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처럼 완전히 서구문화에 동화되지 못했는가?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문화가 월등하고 우월하다면 당연히 아프리카라 문명권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서구인들의 지배와 침탈의 과정이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에 비해 이익이 덜했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은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나타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을 살펴본다면 절대적인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중국, 인도등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서구열강으로부터 지배를 벗어나고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강력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 아프리카에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문화적 전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아프리카인들이 그들 나름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에 있어서 구전전통의 중요성

 

모든 사회는 그들의 문화적 유산과 인간적 경험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아프리카 문화에서, 물려받은 인간적 경험의 집합체인 통찰력과 관습은 말을 통해 전달된다. 구전으로 전달하는 과정과 그 결과물인 구전 텍스트들은 구전전통이라 부른다. 구전전통의 가장 특징적인 사항은 입을 통해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전해진다는 것이다. 구전전통 텍스트는 지난 사건과 관습을 배타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몇몇 동시대의 아프리카 사회에서, 그 주민들의 주요한 부분과 구전전통과의 관련성이나 타당성은 동시대의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쓰여진 역사적 증거보다 훨씬 더 높다.

 

역사가, 인류학자, 그리고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을 편찬하기 위해 구전을 사용한다. 구전은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기록이다.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구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무쿨라(P. M. Mukula)는 구전이 없이는 아프리카의 사회에 대한 역사 기록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구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한 국가의 역사와 미래세대의 참고자료로서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구전의 전승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망하기 전 구전을 채집하는 일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기록보존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에게 구전을 전해주는 읽고 쓰는 방법은 몰랐지만 속담, 그림, 이야기, 노래 등과 같은 세심한 장치를 통해 부족의 역사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예술 장르들에 삶의 다양한 면면을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정보의 전달과 보존은 구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구전을 정보를 보존하고 다음세대에 전달하는 기록관리자의 임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록보관은 아프리카사회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구전은 특정한 집단에 속하는 정보의 집합이다. 세대를 거쳐 구술로 전해진다. 무엇이 어떻게 전수되었는지는 집단정신이 무엇을 보존하고자 하는지에 달려있다. 전수의 수단도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구전은 집단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과거로부터 전해져 오며 미래의 세대에 전수할 의무를 지닌다. 전통의 창시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전은 항상 익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첫 번째 증인 혹은 창시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전의 중요한 역할은 과거의 집단적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지켜나가며 소속감을 향상시킨다. 재앙이 닥쳤을 때도 정체성은 집단의 재산이었다. 구전을 모두에게 유효한 공적 재산으로 여겼다

 

아프리카인들은 구전 문화와 전통에 그 뿌리를 둔 세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와 이야기꾼을 경외한다. 고대의 글쓰기 전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존재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주로 구전인들이며 그들의 예술형태는 문헌적이라기 보다는 구전형태이다. "쓰여진 문헌(written literature)"과는 반대로 케냐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응구기 와 시옹고(Ngugi wa Thiongo)가 사용한 “구연(orature)"이라는 용어는 말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으로 춤과 음악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말로서 공동체내에서 종종 만들어지고 행해진다. 아프리카의 구전예술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아프리카 문화의 초기부터 발전을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꽃을 피우며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전해내려오고 있다.

 

아프리카 ‘구전문화(oral culture)’의 개념은 구연문학(oral literature), 구전전통(oral tradition)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구연문학이란 입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개념의 구전문화는 그 초점이 생산물과 멀리 떨어져 변화한다. 다시 말해, 원문은 구전원문의 이야기가 행해지는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을 포함한다. 게다가 구전문화는 구연 의사소통 관습의 지속성을 위해 말하는 단어의 사용과 주의를 끄는 것과 관련된 모든 관습과 습관을 가리킨다. 공연(performance)은 구전 텍스트의 실질적인 행위인 반면에 구전문화의 다양한 생산물은 구연문학으로 불리어질 수 있다. 

 

 


특히 非문자사회라는 아프리카의 특성상 구전전통ㆍ구비전승(oral tradition)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구전은 풍부한 기억력과 상상력을 기초로 ‘입’에서 ‘입’을 통해 사실을 전승하는 방법론으로 문자체계가 없었던 사하라이남 반투 사회의 대표적인 역사전승 방식이었다. 함파테(HampâtâBé)가 ‘아프리카에서 나이 많은 이가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진다’고 말한 내용은 역사적 자료로서 구전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전전통은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니고 있는 보물단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유산을 관리하는 사람들(the custodians of heritage)’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사람들을 서부아프리카에서는 그리오(griots) 남부 아프리카의 코사족에서는 임봉기(imbongi)라고 불리어졌고 서부 아프리카보다는 자유로운 형태로 동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연장자나 주술사등 사회의 전문가집단에 의해 전승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이 이와 같은 구전역사가들의 발화를 통해 나타난 신화, 전설, 찬양시, 속담, 이야기, 그리고 음악속에서 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적확히 직시한다면 아프리카를 이해하기 위한 구전전통의 연구를 통한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연구는 매우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4. 아프리카인의 ‘말’의 권위와 힘.

 

아프리카인들은 말을 대상화하지 않고 지시체의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언어를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존재의 통합적 특성이 발화의 힘 속에 체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말은 단지 학습된 형식의 효과적인 정교화가 아니라 개인이 가진 발성되는 힘이었다. 그리하여 발화는 개인의 지위에 따라 상대적 무게를 가진다. 말의 힘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되어 저주, 주문, 기도와 같은 ‘위대한 말들’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문화에서 말하고 명명하는 것은 경험을 창조하는 것,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체계는 구체에서 추상의, 사물에서 말의 명쾌한 분리에 실증적 지식이 있다고 보았던 19세기 유럽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어에도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나이가 많다든지, 사회적인 위치나 공직에서의 직위가 높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속에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는 말속에는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특별히 위기에 처한 경우에 발언되는 부모의 말은 행운을 “낳기도”하고, 저주, 성공, 평안, 슬픔, 혹은 축복을 “낳기도”한다. 또 주의의 말은 그가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주는 그 약을 통해 작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병을 치유하거나 불운을 예방해주는 것은 약초보다도 사실은 그 주의의 말의 효험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인 “저주”와 “축복”은 지극히 실제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앞장에서 서술한 전문가들도 실은 개인적으로나 그들의 직책이나 직능으로 인해서 그와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재판을 할 때 저주를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유죄라고 하는 것이 판명되면 그를 저주함으로써 그 저주의 말에 의하여 악이 그에게 떨어질 거라고 하는 신념이다. 주로 가족내에서 이루어지며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효과적으로 낮은 위계의 사람들을 저주할 수 있지, 그 역은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가장 두려워하는 저주는 부모나 아저씨, 아주머니 혹은 가까운 친척들이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또 가장 고약한 저주는 임종시에 하는 저주이다. 일단 그 저주자가 죽으면 이를 취소할 방도가 실제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범한 사람이 참회를 하고 저주를 거두어주기를 원하면, 그 저주를 한 사람은 그 저주를 스스로 취소할 수도 있고, 또 그 저주가 심각한 것이었으면 제의를 통하여 취소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부어진 저주가 이루어졌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만약 그 저주를 받은 사람이 죄가 없으면 저주는 기능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사회는 공식적인 저주를 매우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마치 마법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특별히 가족권 안에 있는 좋지 않은 관계를 저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사고는 신화, 구전 전통 그리고 연장자들 그리고 세대간 논의를 통해서 표현된다. 또한 영적인 힘을 끌거나 그것의 자비를 얻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포함하는 의식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이러한 의식이 많은 전통속에서 최고 존재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최고 존재는 이미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제물은 종종 야자 술, 기장맥주 그리고 물과 함께 바쳐지는 데 이는 말해진 것(단어)어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은 제주(술)와 말해진 언어의 힘을 포함하는 생명력을 풀어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의식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종종 참가자들은 희생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술을 마신다. 따라서 이 모임은 그들의 기도자들을 향하여 일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성직자와 영적 존재들이 결합된 것이다.

 

 

5. 결론

 

아프리카인들은 말을 잘한다. 모두가 연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창하고 논리가 있다. 또한 말은 하는 사람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힘과 권위를 갖는 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의 말을 무심히 흘려버린다면 꼭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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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근 역사

2011. 1. 11. 11:4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재의 모습은 2개의 아프리카너 공화국이었던 트랜스발(Transvaal)과 오랜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가 영국의 식민지로 된 앙골로-보어전쟁(Anglo-Boer War ; 1988-1902) 이후 191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12년에 아프리카인 행동주의자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 ; ANNC)를 결성했으나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로 바꾸었다.

1920년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이전에 독일이 지배하던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위임통치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던 바소토랜드(Basutoland), 베추아나랜드(Bechuanaland), 그리고 스와질랜드(Swaziland)와 로데지아를 소위 남아연방(South African Union)으로 편입시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격적인 확대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스와질랜드를 남아연방으로 통합시키는데 반대했다. 비록 영국이 모든 보호령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른 나라에 둘러싸인 위의 나라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적 팽창은 엄청난 광물자원, 특히 19세기 다이아몬드와 금의 발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 2차대전의 발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업화를 강요하였고, 도시화된 흑인노동자와 그 취약성에 대한 의존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발전된 흑인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흑백정책을 옹호하였고, 다양한 사람 사이에는 특징적 차이가 있으므로 각각의 집단들은 자신의 “고국(homeland)”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타 인종간의 결혼(백인과 흑인간의 결혼)은 불법이었고, 아프리카인은 태어난 곳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948년 이후 부도덕 법(Immorality Act)을 포함하여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 제시설분리법(Separate Amenities Act), 그리고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은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을 강화시켰다. 1959년에 나온 반투 자치촉진법(Promotion of Bantu Self-Government Bill)은 반투스탄(Bantust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 자치 흑인구역)에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준다고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1960년 3월 21일 샤퍼빌(sharpeville)에서 패스법(pass laws)에 반대하는 평화로운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67명의 아프리카인이 살해되었다. 수상인 페르부어르트(Verwoerd)의 대응은 백인들의 표를 잡는 것이었고,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을 선포하였다. 페르부어르트는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정치적인 삶으로부터 제외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4년 구속되었다.

포르투갈에서의 구데타는 1974년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독립을 선언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던 남아공은 MPLA대신 구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고 있던 UNITA를 무너뜨리기 위해 앙골라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나미비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SWAPO가 나미비아에 배치된 남아공 군대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동안에 사모라 마첼(Samora Machel)이 이끄는 FRELIMO가 권력을 잡고 로데지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여 이안 스미스 정권에 게릴라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잠비크에 기지를 제공하였다.

1976년 남아공은 소웨토(Soweto)반란을 겪게 되는데, 점차적으로 흑인들의 저항이 심각하게 거세어져 갔으며 백인들은 나라가 재앙에 빠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1989년 UN의 지지를 받은 자유선거가 나미비아에서 치러졌으며, 1990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1990년에 남아공은 나미비아와 앙골라로부터 물러났다.

드 클레르크(De Klerk) 정부는 ANC를 공인하고, 1990년 2월에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범 아프리카회의(Pan African Congress ; PAC)와 ANC, 줄루족이 중심이 된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인종차별주의정책은 철폐되었고, 총선이 1994년 4월에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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