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가나의 엔크루마의(Kwame Nkruma : 가나의 전대통령)

africa club 2001. 10. 19. 15:14

가나에서 독립운동과 가나를 건설했던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웅적이었던 정치지도자는 크와메 엔크루마였다. 그는 가나만의 영웅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전체국가들에 대한 표상이었고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가나를 산업국으로 변화시키는데 노력하였고 가나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가나인들의 과분한 기대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의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경제 정책은 실패하였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지 못했고 경제계획은 이상적인 것도 아니었고 현실적인 것도 아니였다. 그는 인민당을 창당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정당이 정부의 방파제 역할을 시켰다. 그는 매일같이 가나는 영국의 영향을 받지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아프리카의 역사상 엔크루마는 하나의 정치적 야심가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결과는 전연 없었다. 결국 경제성장은 하나의 구호로써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가 경제적인 빈곤의 속도를 다소나마 지연시켰다고 지적한다면 해안지역에서 코코아를 생산하여 제3세계에 수출을 했다는 것 정도이다. 1947년부터 영국의 통치가 종결 되면서 새로운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비영국적인 정치인들을 포섭하였다. 새로운 정치그룹들은 독립국가로서 만족했고 순수한 아프리카인이 되기를 원했다. 조국이거나 모국이라는 용어를 구사하기 시작했고 그들에 모든 나라에 대하여 가나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1947년경에는 교수, 법률가, 사업가 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당시에 엔크루마는 미국과 영국에서 봉급생활을 했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정책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영국 등 각국의 언론동향과 당시의 국제정세로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1949년에 귀국하여 반영시위와 폭동에도 가담했었고 이때 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인민당은 수도인 아크라에 본부를 두면서 엔크루마 자신의 왕정주의적인 통치권 행사를 하게되고 그는 자유와 그의 정부는 "지금"이라고 강렬하게 국민에게 요구했다. 이로써 영국으로부터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도 일찍 독립하게 되었다. 이래서 엔크루마는 가나인 들에게 처음에는 박력 있고 용감한 지도자로 인식된 점도 있었으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는 그가 정치적 카리스마적인 면이 있다고 지적한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1951년에 최초에 실시된 선거에서 그는 의회 인민당을 이끌고 반식민지정책 투쟁을 제시하고 무난히 당선되었다. 또한 수년후인 1954년에는 의회인민당이 당세가 확대되면서 국민들로부터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1957년에는 약간 부진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정부는 지금부터다"라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엔크루마는 불행하게도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는 야심을 가짐으로써 야당들로부터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독립이 될 때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사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토후들이 엔크루마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이러한 의사결정을 포기하였다. 이때 특징적인 상황은 코코아값이 급락하였다.

1954년에 코코아 1톤당 US $l,002에 하락되던 것이 점차 하락세를 보였는데 1957년에 이르러서는 1톤당 US $692까지 내려왔다 이렇게 되자 농부들의 부에 대한 기대는 없어지고 펀코아 시장도 페쇄위기에 놓였다 한편 영국의 지지파와 반대파는 서로가 "자유"의 구호가 선거유세의 주종을 이루었다. 1960년의 선거에서 야당이 적지 않게 진출했다.

1956년도에 실시했던 결과에서는 40%밖에 지지를 못했으나 과거에 비하면 지지율이 10%가 증가된 셈이다. 이때의 엔크루마정부는 경제적인 실정이 계속되었다. 1958년에도 코코아 값은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고 1960년의 세계곡물시장에서의 코코아 값은 US$633이였다 1962년에는 US $ 476이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가나의 유일한 수출품목의 하락은 엔크루마의 통치력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투자액은 총US$8,400만 불이었다. 가나에 투자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들이 차관도입후에 경제계획에따라 잘 진행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획없이 차관금액이 가나에 포착한 후 자금의 행방을 확인하는 기관이나 공무원도 없었다 따라서 그 차관금액의 사용 처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차관은 먼저 사용을 위한 우선 순위가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당시에는 많은 아프리카국가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엔크루마는 차관의 현금행방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차관의 사용 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크루마는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보다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그의 경제정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볼타강에 있는 알루미늄생산계획에 관심을 가진 듯이 공포했다. 영국은 엔크루마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되어가고 있는 상황들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엔크루마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엔크루마를 대신할 정치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가나에 대해서 알루미늄 수입정책을 시도하는 듯 했다. 이때 엔크루마는 영국대신에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의 결과 1961년에 가나는 카이셀 알루미늄 회사와 합작협정을 체결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카이셀 회사는 경비가 과다함에도 발전소 건설계획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소모되는 예산의 외화는 1년간 US$45-53만불이며 인원소요는 1,600여명이나 되었다. 4) 한편 의회인민당 당원들은 가나의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보다 해외자본가들의 손에 움직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정적인 사고력 때문에 그들은 엔크루마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나 엔크루마는 볼타강의 점공사는 가나경제의 상징이라고 했다.

의회민주당내에 일부 부정적인 지식인 당원들을 의식해서 1961년 4월에 엔크루마는 다운방송을 통하여 모든 정치와 경제는 투명할 것이며 정책은 사회주의 정책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의회인민당은 엔크루마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1962년에 당의 대변인은 좌파적 운용을 북쪽지역부터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후 1개월만에 그의 저택에 폭발물이 폭발하였다. 타위아 아다마피오는 엔크루마의 선전책임자인 동시에 고문 이였으며 의회인민당의 사무총장 이였으나 폭탄테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1964년 1월에는 엔크루마의 관저에 근무하는 경비경찰관이 그를 암살하려 사격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들의 젊은 경찰관들은 야당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은자들이였다. 엔크루마는 각종 테러의 위협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어떻든 엔크루마는 정치적인 적에 대하여 외형상으로는 탄압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1964년 1월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유일한 의회인민당이 2,773,920 표를 획득한 반면에 엔크루마를 반대하는 표는 2,452표에 불과했다. 다음해에 대통령선거에서 엔크루마의 대통령 당선은 어려운 예측은 아니었다. 그러나 엔크루마가 없는 의회민주당은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더욱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엔크루마의 인기가 점차 약해지자 야당에서 정치지도자들이 예상외로 정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연합당이다. 이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의 부시아 박사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69년에 진보당을 창당하여 선거에 임함으로써 부상되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부시아체제는 경제정책에서 수입정책에 따른 관세문제에 관심을 두었고 가나인 이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했고 고급인력으로서 근무하는 자는 모두 퇴직시켰다. 뿐만 아니라 1971년 말경에는 44%가량 감원을 시켰다. 이에 반발한 공무원과 군부는 아체암퐁 대령을 주축으로 하여 군사혁명이 발발하였다. 이들은 부시아에 의한 경제정책을 백지화시켰다. 대부분의 공직자들을 복직시키고 봉급을 지불했다.

군사혁명을 지지한 계층은 첫째, 군부였고 둘째 법률가들이었고 셋째, 사업가들이었다. 그들 군부는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유도하고 승화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1979년에 군사혁명의 영향으로 80여명의 고급장교들이 축출 당했으며 이로 인해 가나의 정국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정치적 안정기를 가져왔다. 정치적 안정기는 곧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 이후 계속 하락하던 코코아가격이 국제시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일부 코코아상인들은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혁명에 가담했던 군부는 단기간 내에 군사정부를 민간정부체제로 전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81년 말에 재리로링스 공군중위는 1979년에 있었던 고참장교들의 혁명을 부정하고 혁명을 일으켜 재집권을 하였다. 이때 젊은 엘리트 장교들과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정부를 관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현재 가나에서는 엔크루마가 존경을 받는 지도자인지 비판을 받아야하는 정치인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의 당시 정치체제에 대하여 분명한 지지계층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군사혁명이 발발하였고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물가고가 상승했고 수출에 유일한 품목이었던 코코아가격은 국제시장에서 계속 하락을 가져와서 빈곤한 가나에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가나의 유일한 희망과 기대는 가나의 군사교육기관에 대한 기대였다. 그것은 그들의 교육기관에는 건강보호제도가 잘 되어 있었고 지방경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 교육기관에는 별로 부족함이 없는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즉 앤크루마 시대에는 물가의 상승률이 대단했다. 예를 들면 에채암퐁 통치시대보다 더 곤경에 놓여 있었다. 즉 영어권 교육 보다는 아칸 지방 어를 사용하는 풍조 때문에 문맹률이 더욱 높았다. 이 아칸 지방어를 사용하는 북부지역에는 정치력, 행정력 등이 전연 미치지 않았다.

이래서 북부지역 사람들은 남쪽지방 사람들과는 별개의 사람들로 인식 되였다. 따라서 북쪽지방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지도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엔크루마로 기억되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가나는 식민지 정치체제로 형성되어 있으면서도 가나국민들은 식민지정치체제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소련을 통하여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과거역사가 식민지통치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코코아 농장에 있는 농부들과 코코아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노동댓가 지불을 과감하게 요구하였다. 이런현상은 전국의 중소도시로 확산되기도 했다. 더욱이 학교와 무역회사에 까지 파상적으로 전파되었다 이같은 충동적 움직임은 나이지리아 ,시아레레온, 코트디보아르까지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위의 4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하는 기본지침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면서부터 좌파적 사회주의에서 우파적 사회주의 내지는 자본주의 국가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위와 같은 모든 사실들이 엔크루마의 정치적 지도력을 평가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가나의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코코아값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제거하기에는 불가능했다.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국가나 프랑스의 통치하에 있었던 국가나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는 사실이 특징이였다 비록 양대 국으로부터 독립을 각각 했음에도 기타외국으로 부터받은 현금차관액은 식민지 당시에 지원받은 차관액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가나정부에서 이러한 차관액의 증가없이 거의 동결된 상태에는 엔크루마 체체가 차관액에 관한 정부가 보증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즉 정부보증을 주저한 이유는 외국자본의 차관에 대해서 영국의 간섭을 받지않기 위함이었다.

이는 영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엔크루마 자신이 경제적 독립성과 사회주의적 사회건설을 위해서 독자적인 운용관리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실은 경제능력이 없었던 가나가 영국의 경제운용에 영향력을 받았었으면 다소 나았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운용방법을 관할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시간을 습득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차관의 대부분을 볼타강개발에 총투자하면서 여전히 재정이 궁핍해지자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권력의 침투를 막아야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권력의노화를 방지하려고 반식민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가나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엔크루마는 1962년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서도 자본주의 에 대해서 투쟁하기를 권장했고 더욱이 외국의 자본가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나인은 행복과 근로에 대한 계획을 세워서 강력한부의 국가로 건설하겠다고 했다. 엔크루마는 1957년까지 정치적 황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흥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국민들에게 이해시켰고 그의 개발정책은 1961년 국가예산에서 7개년 경제계획을 제시했었다. 이경제 7개년계획은 엔크루마의 마지막 허구적인 계획이었음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이때부터 엔크루마는 가나에서 자기의 정치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양될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고 이에 따라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선택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정부는 점차 권력이 약화되어 갔고 각 지역에서 반정부테러도 자주 발생하여 국가도 쇠퇴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니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61년 이후부터 엔크루마는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의회인민당으로 하여금 사회주의 정치체제로 발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아마트위는 엔크루마에 대하여 정치적 공격을 하였고 따라서 각 지역에서는 폭동이 재발됨으로 양측모두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었다.

아마트위는 1966년까지 계속 엔크루마를 공격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가나의 국내정치상황이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국제적으로 가나의 혼란에 대해서 견제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의회인민당의 간부들은 엔크루마 보다는 기회주의적인 경향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엔크루마의 마지막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즉 정권을 포기하느냐 정권유지를 위해서 투쟁하느냐의 기로에 있었으나 후자를 택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경과했고 실정이 많았다. 가나 국민들은 엔크루마 스스로가 선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엔크루마는 사회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방국가들로부터 신용을 얻지 못했고 따라서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지 못했고 자기정당으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엔크루마의 정치적종말에 대한 예견이었다

엔크루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한 시대에 많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 주었다. 그 희망과 미래가 비록 가나에서는 미래성이 없었지만 아프리카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되고 아프리카인들의 민족주의의 역할과 사상을 주입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아프리카의 일부 정치인들은 아직도 엔크루마를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가나의 국민들은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지 않고 더욱이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가 장기간 그의 업적이 존속되어 위대한 정치인으로 존경 받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