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뜨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여러국가 중에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국가중의 하나이다. 특히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도 교육의 열성, 은행원의 능력, 기술의 개방력이 월등하다 따라서 정치적 안정도 이룩했고 이는 세네갈, 가봉 등과 같이 과거에 프랑스 통치하에서의 국가중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국가중의 하나였으며 이는 정치지도자들의 사고가 정상적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농산물의 수출과 2차 산업상품의 수입 등을 균형있게 무역정책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1960년대에서 1970년 간에 경제개발의 발전기였다. 그 수출 주요품목은 파인애플, 바나나, 설탕, 목화 등이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에 수출했었다. 이 일차상품을 집중적으로 개발 생산함으로써 약 1백만명의 실업자를 구했다. 그도 초기에는 노동자운동과 현실투쟁을 했다. 더욱이 군부에 의한 권력에도 다른 아프리카와 같은 유형의 행로를 걸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코뜨디부아르는 그들이 반프랑스 전쟁을 했던 1939년에도 코코아를 55,000톤을 해외에 수출하였고 커피는 18,000톤을 수출했다.
즉 반프랑스 투쟁전쟁을 하면서도 정권은 프랑스의 통치하에서도 경제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을 유도했다. 1944년 9월에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 보다도 일찍이 공화체제를 수립했다. 따라서 코뜨디부아르는 세계 제2차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가나에 비하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욱 월등한 위치에 있었다.
교육에도 차이가 있었다. 1948년에 다카르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불과 200-300여명이었고 국민학교 총수가 20개 뿐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세네갈도 비슷했다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로 인하여 노동자, 농민들은 교육에 관심을 두었고 그로 인하여 생산량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정치적 비중과 경제적 효과에 의하여 정책을 수행했다. 즉 다른 통치국에 대한 외교정책과는 달리 협력적 외교정책을 지향했고 둘째는 직접적인 단기적 경제성장의 효과보다도 사회의 간접자본을 투자하는 장기전략을 세웠다. 셋째는 국가의 모든 공무에 대하여 경제지식과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모든 국민을 경제정책에 투입시켰다 이를 위하여 중요한 지역 및 조직마다 프랑스인으로 하여금 자문을 받도록 프랑스인 고문단을 창설하였다. 이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아아보리코스트 관리로 하여금 점검케 했다. 즉 프랑스고문단들은 코뜨디부아르의 모든 경제를 투명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또 코뜨디부아르정부는 파악하도록 요구했다. 왜냐하면 코뜨디부아르 정부는 자국의 경제건설에 있어서 프랑스인의 자존심에 맡겼다 따라서 프랑스고문단은 코뜨디부아르의 경제성장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뜨디부아르는 인접한 가나와는 자연환경이나 토질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은 전연 다르다 이것은 바로 그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능력에 따라 성공의 여부가 구별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정부의 동의는 아주 어려웠던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코뜨디부아르에서의 우푸에 부아니는 국민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게 되었다.
즉 아프리카인의 정의를 위해서 영웅적인 투쟁가로 인식되었다. 그의 명성은 현재 양국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그를 일명"아프리카의 의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의 정치지도력은 엔크루마와 다른 형태의 지도력을 갖고 있다 대외적으로 선전을 하면서 통치하는 엔크루마에 비하면 모든 정책을 실시하는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단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지도자들처럼 그도 1951년부터 군부와 접근하였고 군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코뜨디부아르를 부강한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뿐 공산주의나 마르크스 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1960년부터 1970년 사이에 연평 균 7-8% 증가율을 나타내었다. 이같이 경제성장에 따른 노동력은 1947년에 78,000여명이었으며 1957년에는 171,000여명이었다. 이들 중에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90,000여명이었다.
호우포우트 보이그니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초점을 두었다. 가나, 기니아 등의 유럽통치국가들 보다 더 강력한 의지로 국가를 겨냥했다. 1960년에 마다가스갈과 말리연방 등이 새사회건설에 초점을 둔 것과 같았다. 어떻든 우푸에 부아니는 특별한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정치능력을 발휘했다. 1960년 8월에 그는 민족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유럽국가들과는 여유있는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코뜨디부아르 국민들은 결코 기니아나 가나처럼 되지는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엔에 근무하는 코뜨디부아르 직원들 마저도 그들의 경제가 매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57년에 가나의 엔크루마는 자국의 정치적 독립에 정력을 경주한 것에 비하면 코뜨디부아르는 프랑스의 관리들 마저도 가나와는 차별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에 아비 잔에서 비 아이보리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폭동이 발생했다. 이는 비아이보리 아프리카인들에게 아이보리 인들과 같은 경제적 권리를 부여하는 정책의 움직임이 있었다. 사회가 안정된 상태에서 예상외의 폭동으로 인하여 외국에서 투자되던 차관들이 주춤하였다. 의회인민당은 경제성장에 대한 불가파성을 강조했고 우푸에 부아니 자신도 국민에게 역설했고 아이보리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코뜨디부아르에서 발생한 폭동은 당시의 엔크루마와 세꾸우레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불안한 시기였다 우푸에 부아니는 1960년에 그의 경제정책의 실효성이 한계에 달했고 또한 해외투자의 한계도 달했음을 감지했다. 이때부터 아이보리인들의 수출은 점차 감소현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외국투자는 더욱 줄어 들었다 급격히 근로자의 수가 감소되고 경제가 위축됨에 따라 개방경제정책을 시도하여 모든 회사와 사업가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요구했었으나 경제의 회생은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코뜨디부아르가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일 때 주변국가의 나이지리아, 가봉, 리비아 그리고 알제리아 마져도 석유의 개발에 의하여 수출고가 높아졌고 따라서 농업부분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성장율은 1960년도에 10-12%였고 1970년도에 후반기에는 세계 경제가 침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6-8%의 성장률을 나타냈다.
코뜨디부아르에는 정치지도자들의 특유한 행운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푸에 부아니가 경제적 위기에 처할 경우에는 주변국가에서 정치적 혼란의 현상이 나타났고 그의 정치적 행동에는 절대수의 국민들이 순종했었다 코뜨디부아르의 정치지도자는 생성과정에서부터 주변국가와는 다르다. 그것은 첫째 1946년에 우푸에 부아니가 의회인민당을 관리하면서 군부와 철저한 아프리카인으로서 정권을 잡았으며 프랑스 통치정부에 대항했고 둘째는 1951년에 프랑스정부를 최대한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1945년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의 협력함으로써 아비잔선거에서 승리를 했고 프랑스 식민지 저항색깔로 부각했었다. 위와 같은 상황들이 우푸에 부아니가 국가의 권력을 쟁취하는 요인들이 되었다.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 선풍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고 반 식민지 운동이 격렬해졌을 때 그는 의회'인민당은 여당으로서 마치 토고에서 추진되였던 그러니치스키당과 같은 당체제와 1950년에 엔크루마가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에 기조를 두었다 우푸에 부아니는 자국내의 공산주의가 와해된 후에 아이보리사회에 자본주의관념을 간접적으로 주입시켰던 것이 경제발전의 요체가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독립국가에서 있었던 군사혁명을 수없이 발발했었음에도 행운아적인 정치적 소요 속에서 의회인민당을 능력있게 관리했다는 점이 아프리카에서의 정치지도자로서 잔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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