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 도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죠복(Joburg)"이라고 불리는 요하네스버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의 도시로 “금의 도시(City of Gold)"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대의 도시로 남아공의 경제와 공업의 중심지이며 금광업의 중심지이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고 발달한 도시이며 동시에 남반구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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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는 1886년 금이 발견됨에 따라 만들어진 비교적 젊은 도시이며 9개 주 중 하나인 하우텡(Gauteng ; 소토(Sotho)어로 ‘금이 나는 곳'이라는 뜻)주에 속해 있다.
조그만 시내와 인공적인 호수를 제외하고는 요하네스버그는 물이 부족한 곳이다. 사실 세계의 주요도시들이 큰 강을 끼고 있고 이 강을 이용한 내륙수로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크게 구별된다. 이 도시가 현재의 위치에 들어서게 된 것은 금 때문이다. 이 도시는 지하에 수백 마일에 걸쳐 금 광맥이 존재하고 있는 비트바터르스란트 주 광산(Witeatersrand Main Reef)의 끝에서 성장 발전해왔다. 이 도시에서 번창했던 대부분의 금광은 1970년대에 폐광되었지만 1970년대까지 비트바터르스란트의 금은 세계 금 생산량의 40%를 차지했다. 도시의 곳곳에는 노란 색과 하얀 색의 인간이 만든 흙더미(Mine Dump)가 산을 이루고 있어 현대화된 도시의 풍경 속에서 이곳이 광산도시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요하네스버그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차별, 분리‘를 뜻함)에 의해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발전하였다. 그 결과 도시는 비 이상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다. 강철 빔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고층건물들과 숲이 우거진 공원과 푸른 초원, 악취를 풍기는 판자촌,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세계적인 대학들과 높은 문맹률, 화려함과 풍요로움, 극도의 가난, 인종적 증오와 인종혼합, 그리고 폭력과 평화로운 전원적 한가로움으로 대비되는 도시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모습들은 과거의 슬픈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변화하는 현재에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 도시의 풍경
요하네스버그는 광활하고 푸른 초원이 굽이쳐 펼쳐져 있는 하이밸트(Highveld)로 불리는 대초원에 위치하고 있다. 트란스발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서로 뻗은 산마루의 분수령으로 바위가 많은 언덕인 란드(Rand)라고 불리는 비트바터르스란드(Witeatersrand)의 남쪽 경사면 해발 1,740-2048m 지점에 불규칙하게 형성되어 있다. 요하네스버그 도심지역의 인구는 약 90만 명 정도이며 거대도시로서 요하네스버그의 인구는 이 도시의 남서지역에 위치한 소웨토(Soweto)를 비롯한 흑인자치지구의 인구까지 포함하여 약 250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이 거대도시의 인구는 약 340만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는 온화한 기후라고 할 수 있다. 비가 적고 증발이 심한 아열대성 건조기후로 여름(12월)에는 평균 섭씨 20-24도를 유지하고 겨울(6월)에는 10-13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가끔 영하로 떨어지는 때도 있다. 그리고 겨울과 여름에 일일평균 일조량이 8시간을 유지한다. 강우량은 연평균 700-760mm이지만 해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가뭄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우의 형태는 여름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늦은 오후에 천둥번개와 함께 나타난다. 겨울에는 대기오염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도시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가 조밀하고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는 흑인거주지에서 가장 심각하다.
요하네스버그의 중심거리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칼톤 센터(Carlton Centre)를 중심으로 동서로 펼쳐져 있다. 칼톤 센터는 요하네스버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빌딩의 정면으로 커미셔너 스트리트(Commissioner Street)가 북쪽으로는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가 있다. 이곳에는 중후한 느낌을 주는 우체국과 시청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가면 마켓 시어터(Market Theatre)와 남아공을 대표하는 거대한 박물관 뮤지엄 아프리카(Museum Africa), 증권거래소(Johannesburg Stock Exchange), 아프리카나 진보 박물관(Africana Museum in Progress), 그리고 요하네스버그의 쇼핑메카로 통하는 오리엔탈 플라자(Oriental Plaza)가 있다.
북동부는 특히 치안이 나쁜 곳이라서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역 주변에는 철도, 사진, 의학 등에 관한 박물관과 요하네스버그 미술관(Johannesburg Art Gallery)등이 있다.
칼톤 센터 서쪽에는 로컬 버스 터미널이 있고 남서부 교외의 금광으로 인해 만들어진 흙더미와 요하네스버그 관광의 관심거리인 골드 립 시티(Gold Reef City)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요하네스버그 교외에는 호텔과 레스토랑이 많고 거대한 쇼핑센터를 가진 상업지가 생겨나고 있다 현재 관광객의 대부분은 요하네스버그 북쪽으로 11킬로 떨어진 샌톤(Sandton)과 로즈 뱅크(Rose Bank)등의 호텔에 숙박하고 백인들도 다운타운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도시의 기능도 서서히 교외로 옮겨지고 있다. 샌톤은 샌톤 스퀘어 쇼핑 센터(Sandton Square Shopping Centre)를 중심으로 고급 호텔이 들어선 거리로 깨끗한 느낌을 준다. 다운타운에서 찾아오면 거리에 흐르는 공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이 지역의 백인 비율은 남아공에서 가장 높다.
남아공의 상업과 재정의 심장으로서 요하네스버그 중심지는 장방형의 격자모양을 하고 있는데 1886년 도시가 처음생길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거리는 좁고 높이 서있는 건물들 사이로 마치 터널 같은 길이 나 있다. 금이 발견된 이후 급성장을 했기 때문에 이 도시는 한마디로 계획된 도시 라기 보다는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생겨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텐트나 진흙으로 만든 초가집은 사라지고 1890년대에는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20세기초에는 건축학적으로 기념이 될만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대법원(Supreme Court)과 요하네스버그 미술관 같은 건물은 영국제국의 변경식민지로서 명실상부한 지위를 갖게되었다. 남아공의 주도적인 광산의 본거지로써 코너하우스(Corner House) 같은 강철 콘크리트 건물은 미국의 건축기술과 이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은 1930년대의 “마천루(skyscraper)" 식 건물 형태에 영향받았는데 1937년에 세워진 에스컴(Eskom) 빌딩이 대표적이다. 이 도시에서의 건축학적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요하네스버그 중심지는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요하네스버그 타운(town)이라 불리는 시 중심지(City Centre), 힐부로(Hillbrow), 그리고 바람폰테인(Braamfontein)이다. 시는 요버트 파크(Joubert Park)와 철도를 따라 동서로 갈라져 있다. 힐부로와 바람폰테인은 모두 북쪽에 있다. 힐부로는 바람폰테인의 동쪽에 있고 두 지역은 시민센터복합단지(Civic Centre complex)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커미셔너 스트리트에 있는 쇼핑몰과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칼톤 센터는 시 중심지에서 알 수 있는 좋은 이정표가 된다. 힐부로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여행객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요버트 파크와 힐부로 사이에 도시에서 가장 값싼 숙소들이 밀집해 있다. 버람폰테인에는 비트바터르스란드 대학이 위치하고 있다.
1994년 개정된 법에 따라 거대 요하네스버그는 북쪽과 서쪽으로 란드버그(Randburg), 샌톤, 그리고 루어드푸어르트(Roodepoort)와 흑인거주지인 소웨토를 비롯하여, 알렉산드라, 그리고 돕슨빌(Dobsonville)같은 지역을 포함한다.
약 1,100평방킬로미터로 구성되어 있는 요하네스버그는 500여개의 교외(suburbs)와 흑인거주구(townships)로 구성되어있다. 1950년에 만들어진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인종 집단에 따라 거주지가 정해지게 되었으며 1991년에 이 법은 폐지되었지만 요하네스버그는 인종적 분리가 지역에 따라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다수의 흑인들은 여전히 도시주변에 위치한 흑인거주 지역에 살고 있다. 이곳은 도시에서 필요한 흑인노동자들을 위한 교외 주택지 역할을 한다, 요하네스버그의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알렉산드라 (Alexandra)는 약 50만명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서쪽에 위치한 소웨토는 약 70평방 킬로미터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는데 약 150만명 이상의 흑인이 살고 있다. 소웨토라는 이름은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Southwestern townships"의 약자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웨탄(Sowetans)"이라고 부른다. 요하네스버그의 칼라드 집단은 소수로써 도시의 서쪽에 분포되어있고 인도인들은 1950년에 요하네스버그로부터 강제 추방되어 레나시아(Lenasia)에서 거주하고 있다. 1990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자 그 동안 부를 축적한 흑인들은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하였는데 특히 제퍼스타운(Jeppestown), 힐부로(Hillbrow), 베자위든호트(Bezuidenhout)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요하네스버그 교외지역의 주 거주자는 백인들이다.
요하네스버그는 거대하고 불규칙하게,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다. 도시의 중앙업무지구(CBD ; Central Business District)는 남아공의 광업, 산업, 그리고 금융업을 지원하는 가장 훌륭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사무실 노동자와 행상인, 쇼핑하는 사람, 그리고 강도와 도둑들까지 다양한 인종이 얼기설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로를 가로질러 북쪽에는 바람폰테인이 있는데 이 지역에는 훌륭한 비트바터르스란드대학이 있고 더 북쪽으로는 요하네스버그의 광산소유주들과 사업가들이 살았던 파크타운(Parktown)이 위치하고 있다. 파크타운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도시를 관망하기에 아주 좋을 뿐 아니라 금광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식민지 지배가 한창이던 때에 지어졌던 과거의 아름다운 대저택을 볼 수가 있다. 이곳에서부터 북쪽에 위치한 프레토리아(Pretoria) 사이에는 숲이 많고 공원과 카페가 즐비한 멜빌(Melville)이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비싼 쇼핑센터인 로즈벵크(Rosebank)가 있다. 로즈벵크는 시내에 나가기가 가장 편리하고 거리도 아주 아름답다.
시의 동쪽에는 도시의 내부라고 할 수 있는 요버트 파크, 베레아(Berea), 그리고 힐부로는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몰려온 이주민들로 혼잡하며 치안이 불안한 상태로 출입금지지역이 되었다.
CBD의 동쪽에 위치한 예오빌(Yeoville)은 아주 싼값에 숙소를 구할 수 있어 많은 베낭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2. 경제생활의 중심지
요하네스버그는 광업, 제조업, 그리고 금융업의 중심지이다. 도시 남부와 남서부에 금광이 분포하고 있으며 모든 광산업을 총괄하고 있는 광산협회(Chamber of Mines)가 이 도시에 본부를 두고 있고 모든 금광회사의 본사가 대부분 이곳에 있다. 또한 국가의 모든 은행, 보험회사 그리고 기타 회사들은 사실상 요하네스버그에 본사를 두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증권거래소(Johannesburg Stock Exchange)도 이 도시에 본사를 두고 있는데 1887년에 설립되었으며, 600여개에 이르는 광산 회사를 지원하여 왔다.
이 이외에도 란드는 석탄, 다이아몬드, 우라늄, 철, 은, 백금, 그리고 크롬같은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다. 광업이외에 도시노동력의 많은 인구들이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서부 사하라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요하네스버그는 약 34%의 노동 인구가 제조업에 밀집되어 있는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이다.
요하네스버그의 경제는 1970년대 중반에 세계 에너지 가격의 상승으로 구조적인 경기후퇴를 겪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 초에 금 가격의 하락과 1980년대 후반에 국제사회의 경제적 제재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중앙은행은 재정수급의 불균형과 이자율의 상승, 그리고 투자의 감소를 발표했다. 요하네스버그는 사실상 1980년대 중반에 마이너스경기를 나타냈다. 1990년대 들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조치의 해제는 약 2%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다른 경제적인 문제는 경직된 노동시장,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느린 자본성장을 들 수 있다.
요하네스버그는 국내외 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이다. 철도와 고속도로는 대도시를 가로지르며 교외와 흑인거주지역의 수 만 명의 통근자들을 실어 나른다. 이 통근 체제는 아파르트헤이트시대에 흑인노동자들을 도시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흑인거주지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시의 버스 체계는 독점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도시와 소웨토 그리고 알렉산드라를 운행하고 있다. 이에 따른 교통수단의 부족은 지방 택시 산업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흑인거주지역 어디에서든지 봉고승합차(미니버스라고도 부름)가 흑인노동자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말이 택시지 태울 수 있을 만큼 태워서 달린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만 흑인들은 그렇지 않다. 흑인들의 자동차 소유현황은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1975년 1000대 당 27명이던 것이 2000년에는 144대로 증가하였다. 도시 북쪽으로부터 약 14마일 떨어진 요하네스버그 국제 공항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국내선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각 도시와 유럽, 북미, 남미, 호주 그리고 아시아를 잊는 중요한 항로이다.
3. 문화생활의 메카
1986년 통계를 보면 도시의 인구는 4개의 주요 인종집단에 따라 분류되었다. 주로 아프리칸스어와 영어화자인 백인인 60%, 25%의 흑인, 11%의 칼라드와 그리고 4%의 인도인으로 구성되었다. 1990년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는 이 도시의 흑인인구를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요하네스버그 시민의 약 70%는 흑인이다. 약 25%는 백인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칼라드와 인도인이다. 그러나 이런 수치는 의미가 없다. 요하네스버그의 매일매일 생활에서는 적어도 12개의 공식언어가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할만큼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의 대다수는 영어와 아프리칸스 화자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포르트칼, 그리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레바논 사회도 구성되어 있다. 흑인 인구는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인종적, 언어적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종교와 만날 수 있으며, 백인과 흑인의 대다수는 기독교인이다. 반면에 아시아계통의 사람들은 이슬람과 힌두교도이다.
결론적으로 남아공의 모든 문화를 이 도시에서 만날 수 있으며 문화생활을 아주 폭넓게 즐길 수 있다. 이 도시가 많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역동적으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모든 문화활동이 이곳으로 모여있다는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으로 이 도시는 거주기능 이외에 특별한 이용물들이 없다는 데도 그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해변, 등산이나 하이킹을 즐길만한 산, 그리고 물론 유유자적 흐르는 강도 없다. 단지 몇 개의 공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즉 요하네스버그의 오락과 밤의 문화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가질 수도 있으며 째즈 클럽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노래들을 감상할 수도 있다. 20세기초에 광산사업가로부터 기증 받아 설립된 요하네스버그 미술관(Johannesburg Art Gallery)은 유럽 인상파의 최고의 미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반면에 10여 개가 넘는 개인 미술관들은 수많은 흑인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극장도 아주 많은 편이다. 약 천백 석의 시민 극장(Civic Theatre)은 유럽의 오페라와 미국의 뮤지컬등 오페라, 발레, 음악, 연극등 각종 문화행사가 수시로 공연 또는 상영하고 있다. 또한 많은 소규모의 극장들은 배우와 작가들을 양성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극장 종합단지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장극장(Market Theatre)을 방문해야 한다. 요하네스버그는 많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1889년에 처음 설립된 요하네스버그 공공 도서관(Johannesburg Public Library)은 지방 도서관들과 광범위한 업무 협약을 맺고 있다. 다양하고 특별한 주제들로 설립 운영되고 있는 박물관들은 남아공의 역사와 아프리카학, 군대사, 고고학 등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도시의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서 위치한 골드 립 시티는 사라져버린 금광의 모습을 옛 도시와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따뜻하고 햇볕이 가득한 축복 받은 요하네스버그는 많은 시간을 집밖에서 보낼 수 있다. 북쪽 교외 지역은 소풍과 새를 관찰할 수 있는 드넓은 지역으로 특징지어 진다. 주말에는 특히 아프리카너들 사이에 일종의 바비큐인 “브라이(Braai)"가 유행한다. 남아공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도 스포츠 광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폐지 이후에 이 도시는 럭비, 축구, 크리컷, 골프 그리고 테니스 같은 국제 경기가 열리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4. 1853-1930년 사이의 초기 시기 ; 금광업의 정착과 신흥도시로의 발전
하이벨트는 AD 4세기-12세기 사이에 오늘날 츠와나(Tswana)와 소토(Sotho)족의 조상인 반투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16-18세기에는 아주 폭넓게 분포되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소를 방목하며 철기도구를 가지고 경작도 하였다. 1800년대에 들어와 이들은 심각한 정치적 격변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나탈항(Port Natal), 케이프, 델라고아 만(Delagoa Bay)에 침입한 유럽인들과의 접촉 속에서 상아와 노예무역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타웅(Taung), 로롱(Rolong), 톨쿠와(Tlokwa), 그리고 탈핑(Thlaping)같은 강력한 부족들은 서로 경쟁하였다.
1820년에 샤카(Shaka)의 장군이었던 음질리카지(Mzilikazi)가 이끄는 은데빌레(Ndebele)족이 츠와나족을 몰아내고 하이벨트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1830년대 중반까지 하이벨트의 인구는 감소하였다. 그러나 베그콥(Vegkop)에서 벌어진 츠와나족과 연합한 보어 이주자들과의 전쟁에서 은데빌레족은 지금의 짐바브웨로 쫓겨가게 되었고 백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840년대에 보어 이주자들은 비트바터르스란드와 지금의 프레토리아에 무질서하게 집을 짖고 소규모가 정착하였다. 이 때만 해도 이 지역은 푸른 초원지대였다.
요하네스버그의 초기 역사는 금의 역사이다. 이 도시는 비트바터르스란드("하얀 물의 봉우리(white water ridge)"라는 뜻)를 따라 발견된 금에 의해 밤사이 만들어진 도시이다. 1853년에 남아공의 광산 탐사자인 마라이스(Pieter Jaclb Marais)는 요하네스버그의 북쪽에 있는 욕스케이 강(Jukskei River)으로부터 사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1886년이 되어서야 호주의 광산탐사자인 헤리슨(George Harrison)에 의해 랑라그트(Langlaagte)라는 농장에서 노천광이 발견됨으로서 비트바터르스란드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헤리슨은 이 발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의 권리를 단지 10파운드에 팔아치우고 동부 트랜스발(Transvaal)의 광산에 투자하였다.
1886년 중반에 광부들이 비트바터르스란드에 몰려들었고 동쪽과 서쪽에 걸쳐 약 40마일의 폭에 대해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삽과 곡괭이로 파헤쳐 졌다. 이런 유입에 따라 데덜란드 이주자들의 후예들이 세운 보어(Boer)공화국인 트랜스발(Transvaal) 정부는 두 명의 탐사자로서 부통령인 요버트(Christiaan Johannes Joubert)와 부조사단장인 리스크(Johann Rissik)를 이곳에 파견하여 금광의 효용성과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 이 새로운 도시는 이들의 이름을 따서 요하네스버그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금의 매장량이 확인되어짐에 따라 요하네스버그는 19세기에 가장 큰 신흥도시가 되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호주와 캘리포니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강력한 노동조합의 전통을 가르쳐준 콘월(Cornish)과 웨일즈(Welsh)의 숙련된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빚과 가뭄으로 고통받은 시골의 가난한 아프리카너들도 브릭스필드(Brickfields)와 페르더도릅(Vrededorp)같은 곳에 몰려들어 슬럼을 형성하였다.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흑인들이 도시에 몰려들어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바벨탑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6-9개월의 계약으로 주로 광산에서 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도시에서 인력거꾼, 하인이나 하녀, 그리고 세탁부로 일했다. 1896년까지 인구는 약 100,000명으로 늘었다. 1930년에는 약 400,000명으로 늘었다.
탐욕을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과 이들이 만든 도시는 온갖 악의 온상지였다. 뉴욕과 런던으로부터 몰려든 범죄집단들이 요하네스버그에서 번창하였다. 수적으로 절대적인 남성성비는 강력한 매춘시장을 가능하게 하여 1913년에 이곳을 방문한 한 저널리스트는 고대의 니네베(Ninevah)나 바빌론(Babylon)이 되살아났다고 쓰고 있을 정도였다. 매춘업에 종사하는 포주나 뚜쟁이는 유럽에서 여자들을 스카웃 하거나 유혹하여 요하네스버그로 데려왔지만 이들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1890년대까지 파크타운이나 호우톤같은 곳에는 광산 경영자들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함으로서 좋은 주거환경지로 인정되었지만 그 밖의 다른 지역은 돈과 탐욕에 의해 지배되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불결한 상태였다 요하네스버그는 20세기의 표준이 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불결함과 끝없는 낭비의 도시였다.
비트바터르스란드의 금광은 품질이 매우 낮았다. 약 1톤의 금광석을 채굴하여 부수고 녹여 수은(뒤에는 시안화물로 바뀜)을 섞은 뒤 1온스(약 28.35그램)나 2온스의 금을 채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고정된 국제 금 시세와 깊이 파 들어가야 하는 채굴조건의 악화와 더불어 채산성을 악화시켰다.(남아공의 금광은 해발고도로 볼 때 약 2마일 이하까지 채굴조건이 악화되어 세계에서 가장 깊은 금광으로 유명하다.)
모든 이러한 조건은 금광업의 합병과 통합을 유도하였다. 1890년대 중반까지 모든 비트바터르스란드의 금광업은 약 6개의 거대광산회사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각각의 회사들은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의 투자로 설립 운영되었으며 수천 명의 광부들과 수백만 달러의 자본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들 회사의 소유주들은 베이트(Alfred Beit), 바르나토(Barney Barnato), 그리고 로빈슨(J. B. Robinson)같은 소위 “지주 경영자(landlords)"들로 킴벌리(Kimberley)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대규모의 산업적인 광산을 운영함으로서 부와 경험을 축척한 사람들이었다. 드비어스(De Beers)다이아몬드 회사를 설립했던 로즈(Cecil John Rhodes)도 ”금광 연합(Consolidated Goldfields)"이라는 이름으로 비트바터르스란드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광산협회(Chamber of Mines)의 후원으로 이 지주 경영자들은 생산을 합리화시키고 특히 노동 비의 절감을 통해 그들의 부를 계속적으로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
광산회사들은 절대적으로 흑인 노동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금광석의 금 함유량이 매우 낮아서 값싼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만이 채산성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가족도 없이 지내야 하는 흑인들의 삶은 요하네스버그의 현재의 모습을 예고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트랜스발의 대통령인 크루거(Paul Kruger)는 주로 영국인 광산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요하네스버그의 아위트란더(Uitlanders ; 외국인)"들의 세력확대가 장차 심각한 정치적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특히 광산경영자들은 친 영국적인 성향을 보이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마침내 광산소유주의 분노에 금광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의 총독이던 광산 사업가인 세실 존 로즈가 입안한 것으로서 선거권을 박탈당한 아위트란더들로 하여금 트랜스발 정부에 대하여 구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구데타가 불발로 돌아가자 구데타에 참여했던 이 ”외국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899년 9월에 영국정부는 모든 백인 아위트란더에 대한 선거권을 즉각 부여할 것을 최후통첩으로 보어정부에 통고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보어전쟁(Boer War ; South African War)이 발발했고 2년 반이나 지속된 전쟁은 보어공화국인 트랜스발과 오랜지자유국(Orange Free State)의 패배로 1902년 막을 내렸다.
영국군은 1900년 6월에 저항 없이 요하네스버그에 입성하였고 아무 피해 없이 남겨져 있던 광산들은 1901년 말에 재 가동되었다. 영국정부는 광산주들의 요구에 충실하여 보어정부의 관세를 폐지하였고 흑인들의 값싼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패스법(Pass Law)을 만들었다.
1904년까지 광산의 채굴조건을 극도로 악화되어 더욱 더 깊이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당연히 비용이 더 많이 들었고 흑인들의 작업조건도 열악해졌다.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광산 경영자들은 약 6만명의 계약 노동자들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이들은 3년 계약으로 남아공에 왔으며 1907-1910년까지 광산에서 일했다. 1910년 남아연방이 설립될 때까지 금광업은 주요한 재정 원이었다.
1911년부터 정부는 새롭게 형성된 백인 노동조합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비숙련직 노동자는 흑인들에게, 숙련직 노동자는 백인들에게 보장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조치에 대해 광산경영자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이들은 낮은 임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흑인들을 훈련시켜 숙련직 노동자로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숙련직에서 일하고 있는 가난한 백인들에게도 불만이었고 더 낳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숙련직 직업을 기대했던 흑인들에게도 불만이었다. 단지 백인 숙련직 노동자만 이익이었다. 그러나 백인 숙련직 노동자들도 채굴조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차차 더 낳은 임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13년 약 19,000명의 백인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5명의 노동자를 해고함에 따라 파업을 일으켰다. 모든 광산이 문을 닫고 파업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군이 파견되어 진압되고 정부는 해고된 5명의 복직을 명령하는 한편 공공질서에 위협이 되는 어떤 집회도 강제로 막을 수 있는 “폭동 집회법(Riotous Assemblies Bill)"을 만들었다. 그러나 1914-1920년 사이에 전쟁의 여파에 따른 정부의 생산성 재고 노력은 백인 노동자의 파업과 처우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하게 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백인들의 파업에 대한 보상은 흑인 노동자들을 자극하였다. 1918년에 낮은 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대한 요하네스버그의 “분뇨통 소년들(bucket boys ; 야간에 분뇨를 치우는 사람)”의 파업은 광산으로 번져 수만 명의 광산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록 강력한 진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광산 노동자들은 백인들의 파업보다도 흑인들의 파업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광산을 비롯한 모든 산업이 흑인들의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란드의 흑인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들은 격리시키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20세기 들어 약 10년 동안은 광법위한 시 당국에 의한 사회적 재구성의 시기였다. 이시기에 나왔던 우생학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따라 시는 도시의 무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1904년에 도시중심에 살고 있던 흑인들은 도시에서 약 10마일 떨어진 클립스푸르트(Klipspruit)라는 곳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포트 엘리자베스(Port Elizabeth)에서 이보다 먼저 실시되었던 것처럼 역병과 질병의 위험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위생(san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물론 강제 이주된 흑인들의 위생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강제이주가 흑인들뿐 아니라 인도인 칼라드 그리고 심지어 가난한 백인들에게까지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강제이주는 남아공의 인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20세기초에 나왔던 ”분리“라는 개념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23년 원주민법(Natives Act)은 도시의 흑인들을 백인들의 요구에 따른 일시적인 체류자로서 분류하고 있다. 도시의 슬럼을 형성하고 있던 수많은 흑인들이 알렉산드라와 서부의 소피아타운(Sophiatown) 또는 동부 올란도(Orlando)같은 새로운 흑인거주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패스와 알코올단속은 흑인거주지역의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으며 경찰은 게으르고 치안에 방해가 되고 또한 백인들의 경제활동에 방해가 되는 흑인들을 거주지에서 뿌리째 뽑고자 하였다.
흑인들은 쉽게 인종차별적인 법규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흑인들은 20세기초에 수많은 탄원활동과 대표단을 조직하였고 법 앞에 누구나 평범하다는 모토를 내걸고 저항하였다. 저항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노골적으로 확대되었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따라 요하네스버그의 흑인철도노동자와 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였다. 192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모태인 남아공 전국 원주민 협회(South African National Congress)가 반 패스법의 선두조직으로 출범하였다. 1920년에 70,000명의 흑인광산노동자들이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 파업하였다. 결국 군이 개입되었고 투쟁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런 저항들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20세기초에 남아공의 주요한 정치적 도전과 변화가 요하네스버그 백인 노동자들로부터 나왔다. 전통적으로 백인들은 숙련공이었으며 1911년 광산 노동법(Mines and Works Act)에 따라 직업에 대한 안정이 보장되고 있었다. 이들의 수입은 흑인들에 비해 약 5-10배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1907년, 1913년, 그리고 1922년 3번에 걸쳐 노동비용을 낮추려는 광산주에 항의하였다. 세 번째 항의에서 백인노동자를 삭감하려는 계획은 전반적인 투쟁을 야기했고 곧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랜드 폭동(Rand Revolt)"라고 불려진 이 폭동은 30여명의 흑인을 포함한 약 200명의 사망자를 내고 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스무츠 정권은 이 폭동으로 남아공의 숙련직 백인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가진 대중이라는 교훈을 얻었고 광산경영자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직업차별법(job colour bar)"을 계속해서 유지하여 나갔다.
5. 1930년대와 40년대의 변화 ; 흑인노동자의 계속된 유입과 도시화의 가속화
1930년대와 40년대의 요하네스버그는 국내의 다른 지역, 특히 시골지역으로부터의 대규모의 이주로 설명할 수 있다. 주로 시골지역의 악화된 생활조건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흑인들의 도시화는 비트바터르스란드의 급격히 증가하는 2차 산업의 영향이 무엇보다도 큰 원인이었다. 1920년대의 지속적인 정부의 관세정책과 전쟁의 위험은 남아공 제조산업이 1930년대에 발전하였고 특히 1933년 금본위제도의 채택은 급격한 경기부양을 가져왔다. 1940년대 초에는 제조업이 국가총생산에서 광업과 농업을 앞질렀다. 이러한 발전의 대부분이 요하네스버그와 베노니(Benoni), 복스부르그(Boksburg), 그리고 점스톤(Germiston)같은 동부 란드(East Rand)에 있는 광산회사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2차 산업분야에서 고용된 흑인들의 숫자가 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앞지르게 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이주자들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사는 도시화된 무산계급이었다.
분리의 필요성과 산업화 사이에서의 갈등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최고조를 이루었다. 경기활성화에 따른 공장들은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스무츠(Jan Smuts)정부는 비트바터르스란드에 대한 유입통제를 중지함에 따라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요하네스버그의 흑인인구는 사실상 두 배가 넘어 400,000명이 되었다. 주택건설은 정지한 상태에서 새로 유입된 인구들은 이미 포화상태가 된 거주지에 쑤셔 넣다시피 하여 수용되었고 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불법적인 거주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더럽고 과부화가 걸린 인구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의식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젊은 만델라(Nelson Mandela) 변호사에 의한 군사조직체인 ANC의 청년연맹이 설립되었다.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나가 1946년 흑인 노동자 파업 때 최고조를 이루었다.
도시흑인 문화는 특히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소피아타운(Sophiatown)을 중심으로 문학, 춤, 그리고 재즈 3가지를 합하여 크웰라(Kwela)문화라고 불리었으며 1930년대와 50년대 사이에 번창하였다. 이 크웰라 운동은 요하네스버그의 흑인도덕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흑인노동조합의 형성에 깊이 반영되었다. 1936년에 설립된 비유럽인 노동조합위원회(CNETU ; Council for Non-European Trade Union)은 19421년에 흑인 광산노동자 연합(AMU ; African Mineworkers's Union)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43년까지 AMU의 멤버는 25,000명으로 증가하였고 몇 번에 걸쳐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투쟁을 통하여 버스요금을 인하시키기도 하고 흑인거주지의 열악한 주거환경과 나아가 분리정책에 대하여 직접적인 저항을 주도하였다. 1930년대 남아공공산당(SACP ;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와 연합하여 ANC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6. 1948-1990년 ;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강화
이런 변화 속에서 요하네스버그와 다른 남아공의 도시들의 미래는 1948년 총선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스무츠의 연합당(United Party)은 완전한 분리는 망상이며 흑인들의 도시화과정은 경제발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말란(Daniel F. Malan)이 이끄는 국민당(National Party)은 위와 같은 변화는 백인들을 몰락시킬 것이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과거의 분리정책을 강력하게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아프리카너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194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결국 46년 동안이나 집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40년대 중반에 요하네스버그의 주변에 증가하였던 불법거주지는 백인들의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한 인종에 따른 분리가 실시되었다. 명백한 백인들의 승리였다.
국민당은 “격리”라는 의미의 아파테이트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이것은 흑인에 대한 단순한 차별을 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백인과 흑인을 완전히 격리시킨다는 목표를 지닌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 정부는 1949년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혼합결혼 금지법(Mixed Marriages Act)을 제정하였고, 1950년과 57년에 개정하여 부도덕법(Immorality Act)을 제정하여 백인과 다른 인종간의 성적접촉을 금지시켰다. ; 1950년에는 인구등록법(The Population Registration Act)을 통해 전국민을 인종별로 분류하였고 ; 이어 같은 해 집단지역법(The Group Areas Act)을 제정하고 모든 도시의 인종별 주거지역을 정해 흑인 주거지역 이외의 장소에 사는 흑인들에 대해서는 재산 몰수 및 강제 이주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 1953년에는 분리시설법(Separate Amenities Act)을 만들어 다른 종류의 색을 가진 인종들은 공공시설(예를 들어 화장실, 극장, 식당, 병원, 학교 등등)의 이용을 제한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다른 인종들이 서로 뒤섞이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인종들은 자신의 공공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백인들은 최상의 공공시설을 이용하였고 다른 인종집단들은 열등하게 취급되었다.
또한 흑인들에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란드의 기독교계학교를 폐교시켰다. 흑인학생들의 대학진학이 금지되었고 흑인 아이들은 정부의 시책에 따라 교육받아야야만 했다. 예를 들어 소피아타운의 흑인들은 1955년 새로 건설된 흑인거주지 소웨토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무장경찰에 의한 강제철거로 일주일도 안되어 남아공의 도시흑인들의 대표적 거주지였던 소피아타운은 사라져버렸다.
흑인저항운동의 금지와 함께 국민당은 “거대한 아파르트헤이트(Grand Apartheid)"를 구상하였다. 국민당은 각종 수법을 동원해 야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장기 집권하면서 아파테이트 정책의 강도를 높여갔다. 1960년대부터는 반투스탄 또는 홈랜드(Homeland) 정책이라는 흑인분리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흑인들을 완전히 추방해 전국토의 10% 이내로 제한된 기존의 보호지역에 몰아넣는다는 정책이었다. 흑인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뜻을 지닌 이 정책에 따라 흑인들은 변방의 볼모 지역에 밀집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여러 개의 반투스탄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4백만의 흑인들이 소위 홈랜드로 강제이주 또는 재배치되었다. 1986년 유입 통제법이 부활될 때까지 원활한 노동력의 공급을 위해 국가는 패스법을 강화하였고 하루에 평균 1000여명의 패스법 위반자를 기소하였다. 반면 백인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구가하였다. 1960년대에 연평균 6%의 경제성자율을 지속하였고 이 성장률은 일본 다음이었다.
7.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과 현재
요하네스버그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은 저항과 불만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76년 6월 16일 남아공의 경찰은 흑인학교에서 아프리칸스를 교육언어로 채택시키고자하는 국가정책에 대하여 항의하는 소웨토의 학생들에게 발포하였다. 이 사건은 대중들을 흥분시켜 곧바로 남아공 전국의 80여 개의 도시로 퍼져나갔다. 요하네스버그 주변에 있는 흑인거주지도 1984년 국민당 정부가 다수인 흑인들을 제외하고 인도인들과 흑인들에게 제한된 선거권을 주려하자 다시 봉기하였다. 이러한 폭동은 남아공 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는 흑인들의 노동조합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비트바터르스란드의 경제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흑인들의 저항과 상응하는 비인도적인 대응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져오게 되었고 남아공의 백인들에게 1994년 다인종 총선거를 향한 협상테이블로 이끌어 내었다.
1994년 이후 요하네스버그는 요하네스버그 대도시 위원회(Greater Johannesburg Metropolitan Board)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대표들은 요하네스버그 대도시에서 선출된다. 또한 계획위원회(planing councils)는 더욱 큰 프레토리아-비트바터르스란드-페르니어너헝(PWV ; Pretoria-Witwatersrand-Vereeniging) 또는 프레토리아-비트바터르스란드 연합(Pretoria-Witwatersrand Union)과 긴밀하게 정책적 협의를 하고 있다. 이 위원회들은 소웨토와 알렉산드라와 같은 흑인거주지역의 불평등한 도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최근 요하네스버그 도심지의 아파트 건물의 탈인종화 추세는 인구과밀화와 함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8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 들어와 세입자들은 집세와 공공요금을 지불하지 않거나 한 방에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며 시설물의 질을 하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건물 소유주들은 거물의 관리를 포기한 경우가 속출하고 있으며 전기, 수도 또는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도시에 살던 백인 연금생활자와 중하류층 백인 서민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며 흑인 칼라드 그리고 인도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 이러한 도시중심지 파괴 현상은 도시에 거주하는 흑인 거주자들이 가난하고 주거자의 계층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주택의 심각한 공급부족과 생활여건의 악화와 범죄의 온상화,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의 분쟁이 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체적으로 1994년 이후 흑인들은 도심지역 특히 힐부로의 아파트에서 많이 거주하고 백인들은 북쪽의 교외지역에 살고 있으며 칼라드와 인도인들은 도시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서쪽과 남쪽에서 살고 있다.
현재 요하네스버그가 안고 있는 인종분포에 따른 불균형적이고 기형적인 발전모습은 모두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시의 지속적인 발전은 인종집단의 거주지에 따른 균형 잡힌 발전전략과 사회경제적인 불균형의 해소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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