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초기 아프리카 왕국들
AD 10세기경에는 아프리카 여러 지역들에서 왕국들이 나타났다. 첫째로, 불충분한 증거이지만, 왕국들의 통치자들 혹은 주요 대표자들은 한때 주요혈통 지도자들과 의식의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종족들의 일반적 복지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 의식의 힘들은 아프리카 외부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존속되었으며 왕의 육체적 인간과는 다른 왕의 정신적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복잡한 의식들과 규칙들을 고안하여 신전으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의식의 힘들은 정치적,경제적 발전아래 점진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된 세속적 힘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세속적인 힘들이 증가함에 따라 전통주의적 혈연 단체들과 분리되고 중앙 관료들에게도 역시 분리가 필요하였다. 천부의 권리에 의한 권력의 지위 임명이 충성심의 선택 혹은 개인의 능력에 의한 임명으로 바뀌었다. 또한 노예들은 왕가의 경호원 혹은 왕가 기병대의 특수부대 그리고 소총부대 요원의 병사로써 사용되기 시작했다. 종종 이 '왕가'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들을 전복시키기에도 충분한 힘을 가질 정도로 증가했으며 그들 자신의 계층들이 왕권을 빼앗기도 했다. 이같은 방법으로 13세기에 아이유비드(Ayyubid) 이집트의 서아시아 상인들은 16세기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던 맘루크(Mamluk) 왕조를 설립할 수 있었다.
(1) 수단의 제국들
비록 그 기록들이 12세기말 혹은 13세기초 말리제국의 '노예'통치기의 말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이후에는 사하라 이남에서도 이러한 발전들이 따랐다. 대규모 중세 제국들 중의 하나는 첫째, 가나로 8세기 이전 오랜기간 소닌케(Soninke)추장에 의해 서부 수단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리고 11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곳의 왕들은 결코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베르베르 무슬림 상인들이 영구 무역지구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사하라 종단 무역망의 중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가나는 북부 지역의 초기 이슬람 작가들에 의해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었으며 13세기 가나가 무너질때 까지 북부의 관심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무역과 공물로 부와 권력을 가진 그곳 통치자들의 권한의 정도가 코르도바(Cordoba), 알 바크리(Al-Bakri) 등의 지리학들에 의해 1067년에 완성된 간접적 기술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이 학자들은 장거리 무역업자들의 동시기 기록들 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안(Andalusian) 칼리프 지위에 관한 기록들도 기술하고 있다.
가나 이후 서부와 중부 수단에서 권력이 증가하게 되는데 여전히 대다수의 말리 단명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서부 무역망의 남부 종착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곳의 만딘카(Mandika) 왕들은 11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이슬람을 수용하였으며 그들 중 몇몇은 순례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말리에서의 이슬람의 승리는 가장 유명한 통치자인 만사 칸칸 무사(Mansa Kankan Musa:1312-1337)의 지배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은 서부 수단의 대다수와 중부 수단의 서부 지역을 그리고 그의 통치하에 있던 남부 사하라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는 카이로에 오래 머물렀던 1324년에 성지순례를 하였으며 귀국후 그의 법정과 정부구조에 이슬람 양식의 행정을 도입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에 도래하는 大수단제국인 송하이(Songhay)의 성장보다 말리의 성장이 왕의 공헌에 있어 덜 성장하여 임명된 왕족들은 중부 니제르의 송하이 종족 중심으로 되었으며 무역의 중심에 있어서는 가오,팀부크두(Timbuktu) 그리고 젠느(Jenne)족 중심으로 되었다. 송하이에 있어서 중앙 집권정부의 강화는 아스키아 무하메드(Askia Muhammed:1493-1528)황제와의 연합으로 연결된다.
동시기 많은 유사한 발전들은 차드 호수의 한끝에 있던 카넴-보르누(Kanem-Bornu)의 4번째 제국에서도 나타났다. 1508년까지 양 제국은 왕의 가신들 - 주로 노예인 병사와 환관 - 은 귀족 중심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구조에 있어서 평행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을 발전시켰다. 하우자(Hausa)족 국가들의 정치체계의 영향을 받은 이 변화들은 이들 국가에 남아있었다. 1천년경에 나타난 하우자족 국가들은 그들의 수공예 산업 특히 직물과 농경 뿐만 아니라 무역과 공물로 성장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현저한 국가는 오늘날 나이지리아 도시들에 아직도 남아있는 카노(Kano), 카트시나(Katsina) 그리고 자리아(Zaria)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기네아의 왕국들
이슬람의 영향력 범위안에 있는 곳은 어디든지 비교되어지는 현저한 발전들이 일어났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지역 - 베르베르어에서 기원한 기네아라는 말은 기네아강 상하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 은 약1400년 이전에 수많은 왕국들의 출현이 있었다. 이것들 중 두드러진 것은 요루바(Yoruba:서부 나이지리아), 에도(Edo:중서부 나이지리아), 아칸(Akan:중부 가나) 그리고 월로프(Wolof:세네갈)족의 왕국들이 있다. 요루바족 왕국은 토착민족과 1천년경 중부 수단으로 부터 온 침입 이민들 사이에 문화적 통합과정에서 발달하여 나타났다. 그들은 예술적 생산품에서 약간의 두드러진 기술들을 가지고 풍부한 문화적 생활과 많은 토지 정착민들의 패턴에는 생소한 특성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체계들을 발전시켰다. 종교의 충성심과 종족의 단결성을 제외하고, 일반적 불일치 때문에 이 많은 요루바족 왕국들은 결국 오요(Oyo)제국(1650-1810)에 합병되어 버렸다.
에도족 도시와 베넹(Benin)의 제국들은 요루바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1400년경 강력한 중앙정부의 집권에 따라 베넹은 계속해서 무역으로 인한 부 창출, 정치질서 그리고 도시의 풍요를 알고 있는 유럽인들의 방문(15세기말에 첫번째로 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이 있었다. 1600년경 네들란드 방문자가 쓴 '당신이 그곳에 들어갈때'(As you enter it)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데 도시들은 아주 크게 기록되어 있다 : 당신은 포장되지 않은 매우 넓은 도로로 들어갔는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와르모에스(Warmoes) 거리보다 7배 혹은 8배는 더 넓어 보인다....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은 네들란드에 있는 집들과 같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그들의 요루바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베넹의 에도는 다양한 수공업 산업을 발전시켰다. 요루바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수준높은 황동과 청도을 작업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3)다른 왕국들
왕의 직책은 다른 유형들, 근본적으로는 미신의 필요성으로 부터 발전한 그리고 그후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의 욕구로 부터 발전한 것은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차이점들이 동부, 중부 그리고 서부 아프리카에서 형성되었다. 그들 중 몇몇은 쇼나와 중서부 평원의 쇼나 이웃 국가들,16세기 이후에는 루바와 룬다 그리고 남부의 콩고-앙골 초원지대의 이웃 국가들과 같은 장거리 무역국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밖에 소 목축지와 농경지의 분배와 방어 그리고 명령체계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예들들면, 그들 중에는 현재 남아공의 트랜스바알(Transvaal), 나탈(Natal) 그리고 동부 케이프주에 남부 반투 국가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인근지역 - 스와지(Swazi), 벤다(Venda), 호사(Xhosa), 그리고 은고니(Ngoni)-에도 있었다(19세기초 줄루(Zulu)족이 마지막이었다). 또한 다른 제국들로는 정복왕조들과 중세 봉건 유럽과 같은 주군관계로 형성된 왕조들도 있었다.
비록 계급 혹은 특권계층의 점진적인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 왕조들이 유럽 혹은 아시아와 같은 완고한 계급계층을 발전시킨 왕조는 없었으며 단지 토지의 개인 소유를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수확과 소들의 개인적 소유도 금하고 있었다.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의 몇몇을 제외하고 혈통 구성원과 충성심의 수직적 분화는 일반적으로 수평적 분화들이 노동의 분화에 의해 도입되고 진척되었던 것 이상의 중요성이 남아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것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동안 다른 사항들을 제공하였으나 수공업 생산의 경제 도입으로 수정되었다.
AD 10세기경에는 아프리카 여러 지역들에서 왕국들이 나타났다. 첫째로, 불충분한 증거이지만, 왕국들의 통치자들 혹은 주요 대표자들은 한때 주요혈통 지도자들과 의식의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종족들의 일반적 복지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 의식의 힘들은 아프리카 외부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존속되었으며 왕의 육체적 인간과는 다른 왕의 정신적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복잡한 의식들과 규칙들을 고안하여 신전으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의식의 힘들은 정치적,경제적 발전아래 점진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된 세속적 힘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세속적인 힘들이 증가함에 따라 전통주의적 혈연 단체들과 분리되고 중앙 관료들에게도 역시 분리가 필요하였다. 천부의 권리에 의한 권력의 지위 임명이 충성심의 선택 혹은 개인의 능력에 의한 임명으로 바뀌었다. 또한 노예들은 왕가의 경호원 혹은 왕가 기병대의 특수부대 그리고 소총부대 요원의 병사로써 사용되기 시작했다. 종종 이 '왕가'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들을 전복시키기에도 충분한 힘을 가질 정도로 증가했으며 그들 자신의 계층들이 왕권을 빼앗기도 했다. 이같은 방법으로 13세기에 아이유비드(Ayyubid) 이집트의 서아시아 상인들은 16세기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던 맘루크(Mamluk) 왕조를 설립할 수 있었다.
(1) 수단의 제국들
비록 그 기록들이 12세기말 혹은 13세기초 말리제국의 '노예'통치기의 말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이후에는 사하라 이남에서도 이러한 발전들이 따랐다. 대규모 중세 제국들 중의 하나는 첫째, 가나로 8세기 이전 오랜기간 소닌케(Soninke)추장에 의해 서부 수단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리고 11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곳의 왕들은 결코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베르베르 무슬림 상인들이 영구 무역지구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사하라 종단 무역망의 중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가나는 북부 지역의 초기 이슬람 작가들에 의해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었으며 13세기 가나가 무너질때 까지 북부의 관심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무역과 공물로 부와 권력을 가진 그곳 통치자들의 권한의 정도가 코르도바(Cordoba), 알 바크리(Al-Bakri) 등의 지리학들에 의해 1067년에 완성된 간접적 기술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이 학자들은 장거리 무역업자들의 동시기 기록들 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안(Andalusian) 칼리프 지위에 관한 기록들도 기술하고 있다.
가나 이후 서부와 중부 수단에서 권력이 증가하게 되는데 여전히 대다수의 말리 단명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서부 무역망의 남부 종착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곳의 만딘카(Mandika) 왕들은 11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이슬람을 수용하였으며 그들 중 몇몇은 순례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말리에서의 이슬람의 승리는 가장 유명한 통치자인 만사 칸칸 무사(Mansa Kankan Musa:1312-1337)의 지배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은 서부 수단의 대다수와 중부 수단의 서부 지역을 그리고 그의 통치하에 있던 남부 사하라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는 카이로에 오래 머물렀던 1324년에 성지순례를 하였으며 귀국후 그의 법정과 정부구조에 이슬람 양식의 행정을 도입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에 도래하는 大수단제국인 송하이(Songhay)의 성장보다 말리의 성장이 왕의 공헌에 있어 덜 성장하여 임명된 왕족들은 중부 니제르의 송하이 종족 중심으로 되었으며 무역의 중심에 있어서는 가오,팀부크두(Timbuktu) 그리고 젠느(Jenne)족 중심으로 되었다. 송하이에 있어서 중앙 집권정부의 강화는 아스키아 무하메드(Askia Muhammed:1493-1528)황제와의 연합으로 연결된다.
동시기 많은 유사한 발전들은 차드 호수의 한끝에 있던 카넴-보르누(Kanem-Bornu)의 4번째 제국에서도 나타났다. 1508년까지 양 제국은 왕의 가신들 - 주로 노예인 병사와 환관 - 은 귀족 중심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구조에 있어서 평행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을 발전시켰다. 하우자(Hausa)족 국가들의 정치체계의 영향을 받은 이 변화들은 이들 국가에 남아있었다. 1천년경에 나타난 하우자족 국가들은 그들의 수공예 산업 특히 직물과 농경 뿐만 아니라 무역과 공물로 성장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현저한 국가는 오늘날 나이지리아 도시들에 아직도 남아있는 카노(Kano), 카트시나(Katsina) 그리고 자리아(Zaria)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기네아의 왕국들
이슬람의 영향력 범위안에 있는 곳은 어디든지 비교되어지는 현저한 발전들이 일어났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지역 - 베르베르어에서 기원한 기네아라는 말은 기네아강 상하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 은 약1400년 이전에 수많은 왕국들의 출현이 있었다. 이것들 중 두드러진 것은 요루바(Yoruba:서부 나이지리아), 에도(Edo:중서부 나이지리아), 아칸(Akan:중부 가나) 그리고 월로프(Wolof:세네갈)족의 왕국들이 있다. 요루바족 왕국은 토착민족과 1천년경 중부 수단으로 부터 온 침입 이민들 사이에 문화적 통합과정에서 발달하여 나타났다. 그들은 예술적 생산품에서 약간의 두드러진 기술들을 가지고 풍부한 문화적 생활과 많은 토지 정착민들의 패턴에는 생소한 특성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체계들을 발전시켰다. 종교의 충성심과 종족의 단결성을 제외하고, 일반적 불일치 때문에 이 많은 요루바족 왕국들은 결국 오요(Oyo)제국(1650-1810)에 합병되어 버렸다.
에도족 도시와 베넹(Benin)의 제국들은 요루바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1400년경 강력한 중앙정부의 집권에 따라 베넹은 계속해서 무역으로 인한 부 창출, 정치질서 그리고 도시의 풍요를 알고 있는 유럽인들의 방문(15세기말에 첫번째로 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이 있었다. 1600년경 네들란드 방문자가 쓴 '당신이 그곳에 들어갈때'(As you enter it)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데 도시들은 아주 크게 기록되어 있다 : 당신은 포장되지 않은 매우 넓은 도로로 들어갔는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와르모에스(Warmoes) 거리보다 7배 혹은 8배는 더 넓어 보인다....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은 네들란드에 있는 집들과 같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그들의 요루바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베넹의 에도는 다양한 수공업 산업을 발전시켰다. 요루바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수준높은 황동과 청도을 작업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3)다른 왕국들
왕의 직책은 다른 유형들, 근본적으로는 미신의 필요성으로 부터 발전한 그리고 그후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의 욕구로 부터 발전한 것은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차이점들이 동부, 중부 그리고 서부 아프리카에서 형성되었다. 그들 중 몇몇은 쇼나와 중서부 평원의 쇼나 이웃 국가들,16세기 이후에는 루바와 룬다 그리고 남부의 콩고-앙골 초원지대의 이웃 국가들과 같은 장거리 무역국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밖에 소 목축지와 농경지의 분배와 방어 그리고 명령체계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예들들면, 그들 중에는 현재 남아공의 트랜스바알(Transvaal), 나탈(Natal) 그리고 동부 케이프주에 남부 반투 국가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인근지역 - 스와지(Swazi), 벤다(Venda), 호사(Xhosa), 그리고 은고니(Ngoni)-에도 있었다(19세기초 줄루(Zulu)족이 마지막이었다). 또한 다른 제국들로는 정복왕조들과 중세 봉건 유럽과 같은 주군관계로 형성된 왕조들도 있었다.
비록 계급 혹은 특권계층의 점진적인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 왕조들이 유럽 혹은 아시아와 같은 완고한 계급계층을 발전시킨 왕조는 없었으며 단지 토지의 개인 소유를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수확과 소들의 개인적 소유도 금하고 있었다.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의 몇몇을 제외하고 혈통 구성원과 충성심의 수직적 분화는 일반적으로 수평적 분화들이 노동의 분화에 의해 도입되고 진척되었던 것 이상의 중요성이 남아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것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동안 다른 사항들을 제공하였으나 수공업 생산의 경제 도입으로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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