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5

africa club 2001. 10. 19. 13:43
5) 발전 요인

도약은 분명하게 서서히 그리고 아프리카의 아주 다양한 생태학에 의해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도약의 발전적인 성장들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팽창을 이끌었다.  19세기까지 사하라 이남의 모든 부속적인 사회 경제적 성장은 대개 이러한 양상으로 형성되었다.
반면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에게 직면한 여러 주요 생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아프리카 인구들은 서서히 증가하였으나 그들의 생산능력의 안정적인 팽창도 또한 뒤따랐다.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20세기가 되어서 아프리카는 인구과잉에 직면하였다.  즉 인구성장의 상승곡선과 현재의 식량생산과 다른 생활 필수품들의 궁극적인 하락 곡선 사이에 아주 넓은 차이가 발생하였다.
반면 이러한 여러가지 성공은 또한 창의력 있는 변화에 방해물이 되었다.  만약 사하라 이북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지중해와 서아시아 세계에서 영향받았으며 기술의 새로운 과정들과 문화의 합당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처럼 움직였다면 사하라 이남 사람들(몇몇 주변을 제외하고)은 생산과 수송 혹은 변화의 창의력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혹은 그같은 유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속적이고 때떄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약 2천년 전의 도약으로  이어온 그들 자신들의 시스템들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같은 시스템들로 부터의 이탈에 대한 급진적인 필요성은 좀처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19세기까지 그들에게 충분히 봉사하였다.  그후 그들은 그들의 체계 보다 뛰어난 세계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인식하였다.
성장의 결정적인 요소는 기원후 1천년 경으로 아마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기술진보의 산물로써 아프리카 인구의 규모는 계속적으로 성장하였으나 그 성장은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이끌어 내었다.  이것들은 아프리카 문화들의 특성에 남아있는 방법들로 해결되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심오한 영향은 여전히 오늘날의 상황들을 커다랗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 통치 패턴
석기시대의 소규모 사냥과 채집사회들은 가부장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자치 통치의 형태를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정착생활은 그같은 간단한 권위주의 형태들을 곧 성장하게 만들었다.  친족 연장자에 의해 확대되고 수정된 초기 통치의 유형들은 아프리카 사회들이 사회적 정치적 발전의 역사속으로 진입한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 대부분은 정부, 추장, 왕가들 그리고 여기저기의 강력한 제국 추장들의 통치시대인 석기시대 기원의 초기 양상들로써 그 근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이 그같은 방법으로 부터 출발한 이같은 많은 자치 형태들 - 생태계의 다양한 영향으로 인해 다시 수정된 - 은 세부 사실과 외형적인 관습에서 아주 상이하나 근본적인 행위와 믿음의 본질적 유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과거 15세기가 넘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발전 혹은 그같은 상황은 다양성 속에서 지속적인 단일성으로 나타났다.  '유럽문명'이라는 한가지 단어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를 가진 단수 개념으로 '아프리카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 커다란 만족들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2) 해외에서 도입된 곡식들
처음에 아프리카의 식량곡물은 빈약했으나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식량공급을 해외로 부터의 식물들, 뿌리들 그리고 과일들의 도입으로 상당히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바나나들 중 영양이 가장 풍부한 것 중의 하나인 무사 파라디시아코(Musa Paradisiaco)는 AD 1세기경 인도네시아로 부터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산 쌀은  同 시기 인도로 부터 온 것으로 쌀의 고유 유형은 BC 2천년경 서부 수단에서 수확되었었다.  그러나 이같은 주요 수확물들은 유럽 선박들에 의한 옥수수, 카사바, 파인애플, 감자 그리고 다른 식품들과 함께 도입된 16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부터 유입되었다.  이것들 중 카사바는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판명된 것 같다 ; 식품 가치가 비교적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사바는 열과 질병에 저항성이 있으므로 카사바 뿌리는 17세기 말까지 아프리카 경작자들의 가장 광범위한 범위안에서 주요 곡물이 되었으며 아마 인구성장을 초래시키는데 상당히 일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무역의 영향
무역의 기술들은 여러 복합적인 성장과 부의 성장으로 인한 사회의 욕구에 의해 자극되었으며 또한 그것들은 장거리 무역에 의해 촉진되었다.  지역간 무역 - 이웃 사회들과의 단거리 무역 - 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착민의 가장 초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마을들은 금속 대장장이 혹은 다른 공예가들이 연장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식량과 교환하는 초기 형태를 발전시키는 버팀목이 되었다.  점차 상품들간의 거래는 보다 먼 장거리 무역으로 이루어졌다.  각지의 외부 인들이 무역을 목적으로 도착하였다.  카르타고인 그리고 그들 후에는 로마인들은 그들의 황금과 상아 그리고 해안무역 혹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족들의 방법에 의한 육로무역으로 부터 온 다른 아프리카 상품들을 교환해 갔다.  AD 150년경에 쓰여진 것을 보면 홍해와 북서 인도양에서 그리스-이집트 선원 안내도에는 홍해 항구들과 현재 소말리아, 케냐 그리고 탄자니아의 항구들 사이에 규칙적인 무역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4) 사하라 사막 종단 무역
서부 사하라 아프리카에서는 지역간 무역의 대규모 조직망의 발달이 주요 외부 영향의 도래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니제르강의 '내륙 삼각지'에 있는 제메-제노(Jeme-Jeno)에서 1970년대말 발굴됨으로써 입증되었다.  고고학자 맥킨토쉬(McIntosh) 부부는 지금까지 무시된 유적들이 BC 3세기 실질적인 마을들이 발견됨으로써 AD 1천5백년 경에는 놀라운 도시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역사가들의 의견에 확고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지금까지 정설로써 간주되어 왔는데 서부 아프리카에의 지역간 무역이 규칙적인 사하라 종단 무역의 설립전에 발달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고고학적 증거는 순수하게 토착적인 장거리 무역의 발달로 시간의 장거리 개념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마지못해 친 이슬람적 도시화를 강화시켰다.
아프리카 장거리 무역의 강화는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 문명의 팽창후에 발생하였으며 그리고 주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서부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도양을 따라 해외에서 였다.  AD 7세기에 북부 베르베르족 국가들과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 지도자들은 그들의 注意를 비잔틴으로 부터 사하라 종단 무역으로 돌렸으며 후에 로마와 카르타고를 획득했다.  남부로 향하는 초기 아랍 정복자들은 사막 때문에 패배하였으며 무역상들은 곧 병사들이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하였다.  이 무역상들이 성공한 주요 요인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때문에 이슬람의 형식을 받아들인 베르베르족들이 그 상인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8세기에 마그레브 주위에서는 그들의 우두머리로 있는 타헤르트(Tahert)와 시질마사(Sijilmasa)와 함께 베르베르 이슬람 정치가들의 일련의 연계가 있었는데 그들 스스로 사하라 종단 무역의 수장을 만들었고 베르베르(Tuareg,기타) 사막을 통해 무역했으며 서부와 중부 수단 종족들과 새롭고 유익한 연계를 꾸준히 전개하였다.  그들 무역상들은 현재 이 초원들에 형성되어 있는 국가들에게서 환영받았다.  곧 이 무역로에서 서부와 중부 수단의 민족들과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서부 아프리카 해안 가까이 수림지역에 있는 먼 남부의 다른 종족들도 이집트와 근동 그리고 이슬람 스페인과 함께 북부 아프리카에서 넓은 무역망을 구축하였다.  이 거대한 '서부의 무역망'은 여러 세기동안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가치를 증명하였다.  유럽인들은 황금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켰다.  예를들면, 13세기의 피오렌티노(Fiorentino) 혹은 플로린(florin)족들은 서부 아프리카의 황금에 가장 확실하게 충격을 가한 것이다.  반면, 동시기에 가정용, 군인 그리고 수공업을 위한 서부 아프리카 노예들의 수출이 점차 발전하였다.  초원지대의 아프리카인들은 수공업된 철사, 말 그리고 사하라 사막으로 부터 소금, 다른 유용한 상품들 그리고 또한 가정에서 사용하기 위한 약간의 노예들을 수입하였다.

(5) 인도양 무역
동부와 남중부 지역의 몇몇 지역에서는 비교적 장거리 무역망이 발달하였다.  인도양을 따라 무역소들이 설립됨에 따라 남동아시아와 중국 남부, 페르시아만 국가들로 부터 온 아랍인들은 보다 큰 규모의 장거리 무역을 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아프리카 무역에 약간의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9세기초에 동부 해안을 따라 설립된 무역소는 곧 중요한 항구로 성장하였다.  해안에 접해있던지 혹은 섬 가까이에 있던지 이것중 몇몇은 AD 1천2백년경 이후 훌륭한 석조건물 도시들이 되어 있었다.   스와힐리 문화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스와힐리 문화의 근본과 종족구성은 반투족이나 그 문화의 상당수에는 무슬림과 아랍문화들이 스며들어 있다.  장거리 무역의 기업 경영에서 이 스와힐리 도시들은 인도양의 해외 무역업자들과 아프리카 대륙 무역업자들 사이에 아프리카 중개자들로서 활동했다.
수단인-사하라인-지중해인 무역망에서도 마찬가지로 금과 상아들은 아프리카 수출산품이며 반면, 수입품들은 주로 직물과 철사 뿐만 아니라 부유한 집들에서는 페르시아 도자기와 중국 자기제품과 같은 사치 상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더구나 서부와 마찬가지로 장거리 무역들은 중서부 고원의 황금 생산가들 중에는 내륙이든지 해안지방이든지 간에 정치적 발달에 대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므로 쇼나(Shona)왕국 - 대 짐바브웨(Great Zimbabwe, Khami, Dhlo Dhlo)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왕국들과 성지들의 몰락으로 유명하다 - 은 장거리 무역의 기회들에 대한 좋은 반응으로 나타났으며 고대 가나와 말리와 같은 서부와 중부 수단의 초기 왕국들도 마찬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