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 문명들
오늘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프리카의 역사에 가장 뚜렷한 인상을 준 시기는 약2천년전으로 되돌아가서 살펴볼 수 있으며 초기 인류가 사하라 이남의 평원, 언덕, 그리고 삼림지역에서 발달하고 분산되었던 것 처럼 철제작업과 경작의 발달에 의해 - 항상 희미하고 때때로 어렴풋 하지만 - 역사 이전과 분리된다. 물론 예외적인 것도 있었다. 기원전 4천년경 고대 가장 위대한 문명중의 하나가 나일강 삼각주에서 나타났으며 나일강 제방을 따라 남부로 발전하였다. 그 자체의 독특한 계보의 오랜 발전의 결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는 인류의 문화적 기원에 있어서 탁월하였는데 이집트의 문명은 보다 진전이 늦었으나 철학과 수학 그리고 종교적 사상의 영역에서 탁월했던 그리스문명의 모태가 된 중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그리스문명의 기원이 된 아프리카는 후에 19세기초 10년 동안 유럽 중심적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부정되거나 감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그것들을 충분히 확인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고전주의적 그리스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원전 약50년경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르스(Diodorus)는 그 이전 역사가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기원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였다. 그러나 헤로도투스(Herodotus:BC 450)를 포함한 다른 몇몇 작품들 이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정례적으로 공부하고 정돈하였던 이집트인들이 남부 이집트의 오지에 살고있던 흑인들에 대해 디오도르스가 언급했던 이디오피아인들에 의해 식민지의 뿌리를 정착하게 한 시초가 되었음을 그리고 역사적 설명으로써 모든 인류의 첫 번째 인류로써 이집트인을 설명한 디오디르스의 작품들을 믿었다. 이 오지로 부터의 '식민지'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땅에 정착하였으며 큰 강의 낮은 계곡에 있는 나일강 침니(沈泥)가 점차 축적됨으로써 이땅에서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디오도르스는 현 고고학이 현재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일강 제방의 비옥한 토지 개발과 근동(Near East)으로 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을 흡수함으로써 초기 이집트의 인구는 놀라울 정도의 안정적인 발전을 보았으며 종종 찬란한 파라오 왕국이 발전하였다. BC 3500년경 형성된 두개의 이웃 왕국들은 후에 통합되었는데 이것은 3천년동안 두더러진 문명을 발전시겼으며 아프리카인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것의 유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훌륭하고 감탄할 만한 자원으로 남아있다.
파라오 통치의 이집트 남부 (現 동부 수단) 에서는 다른 중요한 문화들이 그들 자신의 창의나 혹은 이집트 문화의 상징으로써 발달하였다. 이것들 중 일부는 기원전 17세기경 중부 나일(현 누비아의 남부)을 따라 형성되었다. 그것의 돈골라(Dongola)의 북부 고고학적 유물로 부터 이름 붙여진 케르마(Kerma)문화는 아마 쿠쉬(Kush)종족 문화의 조상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이집트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식민통치를 받은 이들은 BC 10세기 말 경에는 그들의 독립을 획득하였다. 기원전 9세기경 그들의 국왕들은 그들의 생활변화로 북부 정복을 감행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서 그들은 이집트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후 앗시리아 침입군들에게 패배한 쿠쉬트(Kushite) 통치자들은 나일강의 네번째 폭포 근처인 나파타(Napata)에 있는 그들의 수도로 되돌아 갔다. 그후 기원전 6세기초 그들의 주요 행정 중심지를 현 카르튬(Khartoum) 북부 약160km에 있는 모로에(Moroe)의 서부쪽으로 옮겼는데 현재 여전히 인상적인 유적물들을 볼 수 있다.
모로에와 이웃 현 부타나(Butana) 사막에서 석조로 건축한 마을들이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비아 저지대(현 이집트,수단 국경근처)에도 마을들이 건설되었으며 쿠쉬트족들은 많은 독창적이고 몇몇 장엄한 문명들을 건설하였다. 비록 오랫동안 파라오의 통치를 받았지만 쿠쉬트문화는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었다. 기원전 5세기 부터는 석조 건축물들을 발전시켰으며 그들 자신의 신들에 대한 숭배,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 철을 만드는 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장거리 무역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적어도 그같은 문명의 성취는 민용(民用) 이집트어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c:천동설) 이집트의 그리스 활자에 의해 영향받은 그들 자신들의 알파벳의 도입이 있은 것은 아니며 형태에 있어서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자음과 말의 분할에 대한 부호를 포함한 23개 부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활자는 적어도 5세기에 걸쳐 분묘와 다른 묘비들에서 쿠쉬족들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고고학자들이 아마 묘비나 혹은 역사와 생활들을 상세히 언급한 문자로 쓰여진 기록물들을 여전히 찾고 있는 것에 활기를 불어주고 있다. 해독 작업은 1910년에 착수되었으며 그 필체는 오늘날 쉽게 읽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쿠쉬트 종족의 언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헌신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금속을 사용한 베르베르 문화들도 초기에 나타났다. 그들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푸닉(Punic), 그리스 그리고 후에는 로마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들에 의한 외부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것들 중 약간, 특히 페잔(Fezzan)족의 가라만테(Garamante)족들(남부 튀니지아와 남서 리비아)은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여 대상을 하는 초기 개척자들로서 중부와 서부 수단으로 달리는 사막로의 이용으로 상아와 황금을 가지고 북부 시장의 재료를 공급하였다. 이 장거리 무역은 기원원년에 즈음해서는 말 혹은 당나귀를 대신해 낙타가 대체됨으로써 보다 확대되었으며 이것은 계속 확대되어 7세기에는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개조로 아주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오늘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프리카의 역사에 가장 뚜렷한 인상을 준 시기는 약2천년전으로 되돌아가서 살펴볼 수 있으며 초기 인류가 사하라 이남의 평원, 언덕, 그리고 삼림지역에서 발달하고 분산되었던 것 처럼 철제작업과 경작의 발달에 의해 - 항상 희미하고 때때로 어렴풋 하지만 - 역사 이전과 분리된다. 물론 예외적인 것도 있었다. 기원전 4천년경 고대 가장 위대한 문명중의 하나가 나일강 삼각주에서 나타났으며 나일강 제방을 따라 남부로 발전하였다. 그 자체의 독특한 계보의 오랜 발전의 결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는 인류의 문화적 기원에 있어서 탁월하였는데 이집트의 문명은 보다 진전이 늦었으나 철학과 수학 그리고 종교적 사상의 영역에서 탁월했던 그리스문명의 모태가 된 중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그리스문명의 기원이 된 아프리카는 후에 19세기초 10년 동안 유럽 중심적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부정되거나 감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그것들을 충분히 확인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고전주의적 그리스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원전 약50년경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르스(Diodorus)는 그 이전 역사가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기원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였다. 그러나 헤로도투스(Herodotus:BC 450)를 포함한 다른 몇몇 작품들 이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정례적으로 공부하고 정돈하였던 이집트인들이 남부 이집트의 오지에 살고있던 흑인들에 대해 디오도르스가 언급했던 이디오피아인들에 의해 식민지의 뿌리를 정착하게 한 시초가 되었음을 그리고 역사적 설명으로써 모든 인류의 첫 번째 인류로써 이집트인을 설명한 디오디르스의 작품들을 믿었다. 이 오지로 부터의 '식민지'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땅에 정착하였으며 큰 강의 낮은 계곡에 있는 나일강 침니(沈泥)가 점차 축적됨으로써 이땅에서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디오도르스는 현 고고학이 현재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일강 제방의 비옥한 토지 개발과 근동(Near East)으로 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을 흡수함으로써 초기 이집트의 인구는 놀라울 정도의 안정적인 발전을 보았으며 종종 찬란한 파라오 왕국이 발전하였다. BC 3500년경 형성된 두개의 이웃 왕국들은 후에 통합되었는데 이것은 3천년동안 두더러진 문명을 발전시겼으며 아프리카인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것의 유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훌륭하고 감탄할 만한 자원으로 남아있다.
파라오 통치의 이집트 남부 (現 동부 수단) 에서는 다른 중요한 문화들이 그들 자신의 창의나 혹은 이집트 문화의 상징으로써 발달하였다. 이것들 중 일부는 기원전 17세기경 중부 나일(현 누비아의 남부)을 따라 형성되었다. 그것의 돈골라(Dongola)의 북부 고고학적 유물로 부터 이름 붙여진 케르마(Kerma)문화는 아마 쿠쉬(Kush)종족 문화의 조상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이집트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식민통치를 받은 이들은 BC 10세기 말 경에는 그들의 독립을 획득하였다. 기원전 9세기경 그들의 국왕들은 그들의 생활변화로 북부 정복을 감행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서 그들은 이집트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후 앗시리아 침입군들에게 패배한 쿠쉬트(Kushite) 통치자들은 나일강의 네번째 폭포 근처인 나파타(Napata)에 있는 그들의 수도로 되돌아 갔다. 그후 기원전 6세기초 그들의 주요 행정 중심지를 현 카르튬(Khartoum) 북부 약160km에 있는 모로에(Moroe)의 서부쪽으로 옮겼는데 현재 여전히 인상적인 유적물들을 볼 수 있다.
모로에와 이웃 현 부타나(Butana) 사막에서 석조로 건축한 마을들이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비아 저지대(현 이집트,수단 국경근처)에도 마을들이 건설되었으며 쿠쉬트족들은 많은 독창적이고 몇몇 장엄한 문명들을 건설하였다. 비록 오랫동안 파라오의 통치를 받았지만 쿠쉬트문화는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었다. 기원전 5세기 부터는 석조 건축물들을 발전시켰으며 그들 자신의 신들에 대한 숭배,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 철을 만드는 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장거리 무역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적어도 그같은 문명의 성취는 민용(民用) 이집트어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c:천동설) 이집트의 그리스 활자에 의해 영향받은 그들 자신들의 알파벳의 도입이 있은 것은 아니며 형태에 있어서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자음과 말의 분할에 대한 부호를 포함한 23개 부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활자는 적어도 5세기에 걸쳐 분묘와 다른 묘비들에서 쿠쉬족들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고고학자들이 아마 묘비나 혹은 역사와 생활들을 상세히 언급한 문자로 쓰여진 기록물들을 여전히 찾고 있는 것에 활기를 불어주고 있다. 해독 작업은 1910년에 착수되었으며 그 필체는 오늘날 쉽게 읽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쿠쉬트 종족의 언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헌신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금속을 사용한 베르베르 문화들도 초기에 나타났다. 그들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푸닉(Punic), 그리스 그리고 후에는 로마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들에 의한 외부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것들 중 약간, 특히 페잔(Fezzan)족의 가라만테(Garamante)족들(남부 튀니지아와 남서 리비아)은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여 대상을 하는 초기 개척자들로서 중부와 서부 수단으로 달리는 사막로의 이용으로 상아와 황금을 가지고 북부 시장의 재료를 공급하였다. 이 장거리 무역은 기원원년에 즈음해서는 말 혹은 당나귀를 대신해 낙타가 대체됨으로써 보다 확대되었으며 이것은 계속 확대되어 7세기에는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개조로 아주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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