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영국의 이집트 침략

africa club 2001. 10. 22. 11:00
이집트 문제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시대(Africa and the Victorians)’란 저서에서 로빈슨(Robinson)과 갈라헤르(Gallaher)는 이집트의 문제해결에 있어 쟁탈(Scramble)과 분할(Partition)에 관한 적절한 시기와 이유를 주장했다.:
"이집트를 점령하지 않고서 아프리카에 대한 어떠한 국제적 쟁탈이 동, 서 진영 간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이집트문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에즈 운하 공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공사책임자로서 그 공사를 담당했던 프랑스 기술자 레셉스(Fredinand de Lesseps)가 1869년 수에즈운하를 완공시켰다. 18세기 동안 대서양무역을 독점했던 영국은 인도양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따라서 수에즈운하의 개통은 인도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케디브 이스마일(Khedive Ismail)이집트 정부의 커다란 약점은 재정정책에 있었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의 외국차관에 의존했고 기간 내에 차관 상환 능력에 대한 평판은 좋지 못했다. 시민들의 이익이 문제가 되었으므로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은 차액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조정하였는데 그들의 임무는 이집트 정부가 그들의 부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재정정책을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판무관(Commissioner)들은 케디브와 마찰을 빚었고 그는 그들을 면직시켰다.
유럽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케디브를 물러나게 하도록 술탄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이것은 1879년 6월에 단행되었고 그의 아들인 토피그(Tawfig)가 그를 계승하였다. 토피그의 괴뢰 정권하에 이집트는 판무관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에 이어 군사폭동이 발생하였다. 1880년 아흐메드 우라비 파샤(Ahmad Urabi Pasha)는 토피그에 반대하는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에 영국은 이집트에 대해 그들의 동반자인 프랑스와 협의 없이 1882년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영국은 비스마르크의 선동으로 이런 조치를 취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프랑스의 분쟁을 기대하였고 두 번째로 수에즈 운하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려 했다. 영국은 튀니지혁명에 일시적으로 개입했던 프랑스의 태도를 관망하면서 그들의 동구제국과의 이러한 모든 중요한 유대를 스스로 지키는데 있어 프랑스를 능가하기 위한 기회로 여겼다.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비스마르크는 그의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는 그러한 조치로 영국을 철저히 괴롭혔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에 대한 프랑스 반응
1871년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프랑스는 보상의 한 일환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정치적 팽창을 고려했다. 그때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태도는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건설함에 있어 특히 나일 주변에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영국은 이집트점령에 대한 성공이 그들의 부채를 지불하기 위해 이집트를 점령함에 있어 그들의 성공은 나일강을 이용하기 위한 그들의 능력에 의존한다고 믿었다. 그 당시 프랑스 또한 그들이 나일강 상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들이 강줄기를 딴 곳으로 변경시킬 수 있고 영국을 이집트에서 사막으로 몰아낼 수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최초의 근대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자료를 보면 독일은 젊은 인구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출산율도 프랑스보다 훨씬 높았다. 따라서 그러한 인적자원의 균형이 프랑스에 비해 명백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군사력이 부족한 곳에는 신입병 보충이 필요했다. 당시 이집트사건은 분할의 완료에 따른 후속조치를 취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