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버그의 게이, 레즈비언 축제
남아공에서 최초의 게이, 레즈비언 축제(Gay and Lesebian Pride Festival)는 1990년 10월 10일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축제에는 약 8백명의 게이즈와 레즈비언들 만이 참여했으며 단지 2대의 가장행렬 차량만이 축제에 참여했을 정도로 그 규모는 적었다. 이 축제의 행진은 동성애자들이 그들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는 항의의 한 형태였다. 남아공의 첫 번째 다인종선거가 실시된 1994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만델라 대통령은 게이의 권리도 인정하는 헌법 조항을 포함시켜 세계 최초의 게이의 헌법 보장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95년부터 게이와 레즈비언의 항의성 행진은 축제로 바뀌게 되었다.
남아공의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은 남아공의 민주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남아공에서는 1990년대초 이래 많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340여년간 지속된 흑백간의 인종차별법(Apartheid)이 종식하였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흑인들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며 많은 분야에서 흑인들의 진출이 두더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괄목한 변화를 겪은 것은 게이와 레즈비언(Gay and Lesbian) 공동체문화이다. 현재 남아공의 경우 게이와 레즈비언을 헌법에서 보장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이다. 남아공 헌법에는 국가는 하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종, 성, 성적 정체성 등으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지않을 권리가 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피해망상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의 보수주의적인 관점하에서 동성애 허용은 절대 불가의 입장이었다. 백인정권하의 소도미(Sodomy) 법에서는 동성애 행위는 기소되었고 처벌받았다. 게이 바(bar)들과 클럽(club)들이 주요 도시에 존재했으나 이곳은 종종 경찰들의 목표물이 되었고 급습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술집으로 위장하여 운영하였다. 심지어는 남자가 여장을 한다거나 여자가 남장을 하는 등 동성애적 분기위의 옷을 입는 것 조차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케이프타운 인근의 유명한 누드 비치인 샌디 베이(Sandy Bay) 조차도 경찰의 급습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동성애들이 발견하면 즉시 처벌을 받는다.
1994년 남아공에서 최초의 다인종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도래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게이와 레즈비언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남아공의 정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이 인물 중의 한 사람은 세실 아브라함(Cecil Abrahams)이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백인이며서 인종차별이 실시되었던 백인정권하에서 만델라와 같은 흑인 정치지도자들을 도와주었으며 또한 남아공 공산당에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는 만델라와는 아주 친한 사이로 남아공의 유명한 영한 ‘만델라와 동승한 사람’(The Man Who Drove With Mandela)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남아공에서는 게이와 레즈비언 평등을 위한 국민연합(The National Coalition for Gay and Lesbian Equality)이 게이 공동체의 법적 권리를 위한 싸움을 위해 1994년 설립되었다. 그리고 남아공의 새로운 헌법이 인종차별금지를 위한 이유로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도 금지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도록 성공적인 로비도 하였다. 현재 이 단체에는 남아공 전역에 있는 74개 게이,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Bisexual) 단체들이 가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은 그들의 권리를 위해 계속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1990년부터 요하네스바그에서 실시된 게이와 레즈비언의 거리행진 축제는 1996년에 1만명 이상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참여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40대의 가장행렬 차량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참가규모가 줄어들고 이 축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이는 기존의 흑백 동성애자들간의 공존에서 점차 그 한계성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백인 게이들은 이 축제의 전통적인 행진 루터가 흑인들의 밀집지역인 힐브로(Hillbrow)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불만들이 있었다. 백인 게이들은 그곳은 언제나 위험한 지역이며 이 빈민가를 행진하는 동안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흑인 게이들 또한 이 행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음악이 그들의 취향과 다르다고 말한다. 노래를 들려주는 DJ들은 흑인들이 그들의 취향에 맞는 알엔비(R&B) 그리고 하우스 엔 힙합(House and Hip Hop)을 신청하지만 춤추는 장소에서는 막상 백인들이 좋아하는 유럽풍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축제의 위원회들은 항상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설사 한두명의 흑인들이 위원회에 끼여있다고 해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은 거의 없다고 믿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않는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즉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에서는 그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 축제에서 주변부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 축제는 백인위주로 프로그램들이 짜여지고 있다.
예를들면, 여전히 오늘날의 이 축제의 가장행렬에는 백합꽃들이 차량을 장식하며 대부분의 흑인들이 그들의 피부색이나 혹은 ‘부적절한 의상’이라는 이유로 인해 출입이 거절되는 경험을 한 유명한 게이 클럽들이 밀집되어 있는 ‘하트랜드 클럽들’(Heartland clubs)에서 ‘비너스’들이 선출되곤 한다.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은 오늘날에는 범죄행위로 처벌받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밑바탕에는 인종차별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에서는 더욱 실감을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인종차별은 흑인 공통체에게는 큰 모욕을 주는 것이며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인종차별 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2001년 9월 29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연례 아프리카 프라이드 행진(African Pride Parade)은 이전과는 다른 아주 기억에 남을 축제였다. 수천명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그리고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참여하여 요하네스버그 거리를 행진하였다.
2001년부터는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전의 축제와는 다른 변화를 보였다. 과거의 백인음악 위주에서 흑인들이 즐겨듣는 Hip-hop, R&B, House 그리고 크와이토(Kwaito : 남아공 흑인 특유의 음악)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축제의 이름도 이전과는 다르게 ‘흑인들의 자긍심’이라는 의미로 ‘블랙프라이드’(BlackPride)로 불리고 있다.
거리행렬이 끝나면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주요 게이, 레즈비언 클럽에서 그들의 축제 기분을 즐긴다. 약 5천명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요하네스버그 헨리 거리(Henri Street)에 있는 게이들의 중심지인 6개 클럽에서 분장을 하고 즐긴다. 그리고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요하네스버그 시내 중심의 호로르 카페(Horror Cafe)에서 ‘블랙프라이드’ 축제를 즐긴다. 그리고 이들 축제에서 남아공의 가장 흑인 여성다운 분장을 한 사람들이 그들의 분장을 뽐낸다. 이 행사는 이들 게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 중의 하나이며 이 분장을 통해 그들의 성취감을 얻기도 한다.
흑인들은 이 축제를 통해 그들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내세우기도 한다. 흑인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벌이는 ‘차이니스프라이드’라든지 이탈리아인들이 벌이는 ‘이탈리아프라이드’도 남아공에서 행사를 할 수 있으며 이 게이와 레즈비언 축제가 이전의 백인들만의 축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프라이드 축제의 주제>
1990: Unity In The Community
1991: Marching For Equality
1992: Marching For Our Rights
1993: Celebrate, Act and Be
1994: Celebrate Unity
1995: Gay by Nature, Proud by Choice
1996: Pride Beyond Boundaries
1997: African Pride
1998: Recognize Our Relationships
1999: Celebrate For Unity
2000: In The Name Of Love
2001: Out There, Everywhere
남아공에서 최초의 게이, 레즈비언 축제(Gay and Lesebian Pride Festival)는 1990년 10월 10일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축제에는 약 8백명의 게이즈와 레즈비언들 만이 참여했으며 단지 2대의 가장행렬 차량만이 축제에 참여했을 정도로 그 규모는 적었다. 이 축제의 행진은 동성애자들이 그들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는 항의의 한 형태였다. 남아공의 첫 번째 다인종선거가 실시된 1994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만델라 대통령은 게이의 권리도 인정하는 헌법 조항을 포함시켜 세계 최초의 게이의 헌법 보장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95년부터 게이와 레즈비언의 항의성 행진은 축제로 바뀌게 되었다.
남아공의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은 남아공의 민주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남아공에서는 1990년대초 이래 많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340여년간 지속된 흑백간의 인종차별법(Apartheid)이 종식하였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흑인들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며 많은 분야에서 흑인들의 진출이 두더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괄목한 변화를 겪은 것은 게이와 레즈비언(Gay and Lesbian) 공동체문화이다. 현재 남아공의 경우 게이와 레즈비언을 헌법에서 보장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이다. 남아공 헌법에는 국가는 하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종, 성, 성적 정체성 등으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지않을 권리가 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피해망상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의 보수주의적인 관점하에서 동성애 허용은 절대 불가의 입장이었다. 백인정권하의 소도미(Sodomy) 법에서는 동성애 행위는 기소되었고 처벌받았다. 게이 바(bar)들과 클럽(club)들이 주요 도시에 존재했으나 이곳은 종종 경찰들의 목표물이 되었고 급습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술집으로 위장하여 운영하였다. 심지어는 남자가 여장을 한다거나 여자가 남장을 하는 등 동성애적 분기위의 옷을 입는 것 조차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케이프타운 인근의 유명한 누드 비치인 샌디 베이(Sandy Bay) 조차도 경찰의 급습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동성애들이 발견하면 즉시 처벌을 받는다.
1994년 남아공에서 최초의 다인종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도래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게이와 레즈비언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남아공의 정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이 인물 중의 한 사람은 세실 아브라함(Cecil Abrahams)이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백인이며서 인종차별이 실시되었던 백인정권하에서 만델라와 같은 흑인 정치지도자들을 도와주었으며 또한 남아공 공산당에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는 만델라와는 아주 친한 사이로 남아공의 유명한 영한 ‘만델라와 동승한 사람’(The Man Who Drove With Mandela)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남아공에서는 게이와 레즈비언 평등을 위한 국민연합(The National Coalition for Gay and Lesbian Equality)이 게이 공동체의 법적 권리를 위한 싸움을 위해 1994년 설립되었다. 그리고 남아공의 새로운 헌법이 인종차별금지를 위한 이유로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도 금지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도록 성공적인 로비도 하였다. 현재 이 단체에는 남아공 전역에 있는 74개 게이,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Bisexual) 단체들이 가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은 그들의 권리를 위해 계속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1990년부터 요하네스바그에서 실시된 게이와 레즈비언의 거리행진 축제는 1996년에 1만명 이상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참여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40대의 가장행렬 차량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참가규모가 줄어들고 이 축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이는 기존의 흑백 동성애자들간의 공존에서 점차 그 한계성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백인 게이들은 이 축제의 전통적인 행진 루터가 흑인들의 밀집지역인 힐브로(Hillbrow)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불만들이 있었다. 백인 게이들은 그곳은 언제나 위험한 지역이며 이 빈민가를 행진하는 동안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흑인 게이들 또한 이 행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음악이 그들의 취향과 다르다고 말한다. 노래를 들려주는 DJ들은 흑인들이 그들의 취향에 맞는 알엔비(R&B) 그리고 하우스 엔 힙합(House and Hip Hop)을 신청하지만 춤추는 장소에서는 막상 백인들이 좋아하는 유럽풍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축제의 위원회들은 항상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설사 한두명의 흑인들이 위원회에 끼여있다고 해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은 거의 없다고 믿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않는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즉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에서는 그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 축제에서 주변부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 축제는 백인위주로 프로그램들이 짜여지고 있다.
예를들면, 여전히 오늘날의 이 축제의 가장행렬에는 백합꽃들이 차량을 장식하며 대부분의 흑인들이 그들의 피부색이나 혹은 ‘부적절한 의상’이라는 이유로 인해 출입이 거절되는 경험을 한 유명한 게이 클럽들이 밀집되어 있는 ‘하트랜드 클럽들’(Heartland clubs)에서 ‘비너스’들이 선출되곤 한다.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은 오늘날에는 범죄행위로 처벌받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밑바탕에는 인종차별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에서는 더욱 실감을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인종차별은 흑인 공통체에게는 큰 모욕을 주는 것이며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인종차별 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2001년 9월 29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연례 아프리카 프라이드 행진(African Pride Parade)은 이전과는 다른 아주 기억에 남을 축제였다. 수천명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그리고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참여하여 요하네스버그 거리를 행진하였다.
2001년부터는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사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전의 축제와는 다른 변화를 보였다. 과거의 백인음악 위주에서 흑인들이 즐겨듣는 Hip-hop, R&B, House 그리고 크와이토(Kwaito : 남아공 흑인 특유의 음악)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축제의 이름도 이전과는 다르게 ‘흑인들의 자긍심’이라는 의미로 ‘블랙프라이드’(BlackPride)로 불리고 있다.
거리행렬이 끝나면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주요 게이, 레즈비언 클럽에서 그들의 축제 기분을 즐긴다. 약 5천명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요하네스버그 헨리 거리(Henri Street)에 있는 게이들의 중심지인 6개 클럽에서 분장을 하고 즐긴다. 그리고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요하네스버그 시내 중심의 호로르 카페(Horror Cafe)에서 ‘블랙프라이드’ 축제를 즐긴다. 그리고 이들 축제에서 남아공의 가장 흑인 여성다운 분장을 한 사람들이 그들의 분장을 뽐낸다. 이 행사는 이들 게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 중의 하나이며 이 분장을 통해 그들의 성취감을 얻기도 한다.
흑인들은 이 축제를 통해 그들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내세우기도 한다. 흑인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벌이는 ‘차이니스프라이드’라든지 이탈리아인들이 벌이는 ‘이탈리아프라이드’도 남아공에서 행사를 할 수 있으며 이 게이와 레즈비언 축제가 이전의 백인들만의 축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프라이드 축제의 주제>
1990: Unity In The Community
1991: Marching For Equality
1992: Marching For Our Rights
1993: Celebrate, Act and Be
1994: Celebrate Unity
1995: Gay by Nature, Proud by Choice
1996: Pride Beyond Boundaries
1997: African Pride
1998: Recognize Our Relationships
1999: Celebrate For Unity
2000: In The Name Of Love
2001: Out There,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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