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를 보여오던 프랑스의 대(對) 아프리카 정책이 1997년에 그 변화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즉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한 온정주의, 자국의 뒷마당으로 여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해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경향, 옛 식민지 국가에 대한 봉건군주 같은 자세나 특정지역 독재자들에 대한 지원 같은 해묵은 관행 등이 완전히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과 달리 민주주의와 인권은 번영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나섰고, 아프리카의 경제발전과 분쟁해결을 위한 국제기구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했으며, 영어·포르투갈어권 나라들에도 프랑스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야를 넓혔다.
1997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연례 프랑스 대사모임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새로운 '행동지침' 2가지를 제시했다. 첫번째 지침은, 프랑스는 "정치적이건 군사적이건 혹은 그밖의 어떤 형태로든 간섭행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는 그러한 내정간섭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나라에 대해 그러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2번째는,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우방들이 스스로 선택한 방식과 속도로 법치와 훌륭한 통치를 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외국 투자가들이 안심하고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행동지침이 전통적 드골주의자인 시라크 대통령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한층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의 통치자들이 지금껏 프랑스에 묶여 있도록 인간적·경제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깊숙이 관여해온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7년 6월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총선에서 승리해 리오넬 조스팽을 새 총리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조스팽 정부는 바로 전 총리인 드골주의자 알랭 쥐페의 우파 정부뿐만 아니라, 시라크 대통령의 전임자인 사회주의자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1981~95)이 취했던 것과도 다른 아프리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했지만, 구태의연한 대(對) 아프리카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으로 하여금 대통령 관저 엘리제 궁에서 감독하게 했다. 미테랑 통치기간중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 국민을 소개(疏開)하거나 우호적인 지도자들을 반란에서 보호해주기 위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 10차례나 투입되었다. 1995년에 대통령직을 맡은 시라크도 대체로 같은 정책을 밀고나갔다. 다만 정책 집행자들이 바뀌었는데, 샤를 드골 전 대통령과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 밑에서 아프리카 정책을 집행했던 자크 포카르가 자문위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미테랑 통치기간의 마지막 몇 년과 시라크 대통령 취임 후 처음 2년 동안 프랑스의 영향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정점은 1997년 프랑스가 지원하는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이 축출되는 사건이었다 (→ 색인 : 모부투 세세 세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후퇴할 조짐은 과거에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자이르·르완다·부룬디에서 나타났다.
1994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일련의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죽은 이 사건은 폭발 직전의 정국에 불을 질렀고, 후투족의 투치족 대량학살사태로 이어졌다. 그러자 우간다에서 투치족 반군이 르완다를 공격해왔다.
1994년에 프랑스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입했으나, 투치족이 장악한 새 르완다 정부는 프랑스의 개입이 후투족 살인자들이 자이르로 피신하는 것을 돕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자이르를 불안정하게 만든 요인도 되었다. 자이르에서는, 오랜 반군 지도자 로랑 카빌라가 르완다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내어 반(反)모부투 공세를 성공적으로 개시했으며, 반모부투 감정은 점차 반프랑스 감정으로 이어졌다. 카빌라는 정권을 탈취한 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정상회담에 불참했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이 모부투를 지원한 냉전시대의 정책을 뒤집어 그에게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종용한 반면, 카빌라의 반군 세력이 우세하다는 것이 명백해진 지 한참 후까지도 쥐페의 프랑스 우파 정부는 모부투를 조건부로 지원하며 협상을 통한 내전 해결을 호소했다. 프랑스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결코 자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었다.
모부투 통치하의 자이르에 대한 프랑스의 무역과 투자는 1997년 이미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벨기에나 미국의 대(對) 자이르 무역 및 투자 규모보다 더 적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모부투의 철권통치 없이는 자이르가 프랑스의 영향권 내에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랑스 우파정부가 특히 우려한 것은 자이르가 붕괴할 경우 이미 흔들리고 있는 프랑스어권 국가 콩고(수도 브라자빌)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킨샤사는 붕괴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카빌라가 전임자 모부투와 마찬가지로 독재정치를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7년 5월 킨샤사를 점령하고 권력을 장악한 카빌라는 자신의 군대가 저지른 학살 혐의에 대한 국제연합(UN) 조사단의 현지사찰을 계속 거부했다. 그러나 카빌라 역시 모부투만큼 나쁜 독재자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킨샤사의 정권교체가 프랑스의 영향력에 심각한 타격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와 킨샤사에서 거의 동시에 권력자가 교체되기 이전에도 프랑스는 이미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군사적·경제적 관계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1997년말 프랑스는 1960년에 발효된 협정에 따라 지부티·중앙아프리카공화국·차드·가봉·코트디부아르·세네갈에 7,9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드골주의자인 전임자들이 이미 승인한 계획에 따라, 조스팽 정부는 프랑스에 소규모 직업군대를 창설해 아프리카 주둔군의 수를 점진적으로 40% 감축하기로 했다.
1960년대에는 이용할 수 없던 수송수단과 통신을 이용하면, 필요할 때 이 직업군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외부의 침략이 있을 경우에만 프랑스가 개입한다는 1960년 협정과 달리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프랑스군이 현지 반란에 휘말려드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의 급여총액을 동결 또는 삭감하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계획이 반란을 더욱 부채질해, 반란은 사실상 아프리카 전체의 공통 위험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들 국제기구에 신중하고도 유연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음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는 특히 육군 병력이 2개 군단이 넘는 차드에 대해서는 IBRD와 공동으로 군사 2만 7,000여 명을 해산하고 재교육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군대를 훈련시켜 아프리카의 평화유지활동에서 더 많은 역할을 맡도록 하기 위해 영국·미국과 함께 노력했다.
프랑스는 1997년까지 아프리카 문제를 놓고 한때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IMF·IBRD와 보조를 맞추어 일을 추진했다. 이러한 공동협력이 거둔 초기의 성공사례는 1994년 1월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14개국에서 사용하는 아프리카공동재정프랑(Communaute Financiere Africaine Franc/CFAF)의 평가절하였다.
당시 여러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과 대통령이 되기 전의 시라크를 포함한 프랑스의 일부 정치가들은 이 조처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8년 1CFAF당 2프랑스상팀으로 정한 이래 오랫동안 고정되어온 환율을 1CFAF당 1프랑스상팀으로 조정하자, 장기간의 인플레이션 소용돌이를 유발하기는 커녕 아프리카의 수출과 경제가 호전되었다.
1997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CFA 가입국들이 IMF와 IBRD의 계획안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안의 가장 일반적인 사항은 경쟁입찰 방식을 통한 국유기업의 민영화 요구였다. 프랑스는 전기통신 분야와 석유탐사 분야에서는 미국 회사들과, 그리고 임업 분야에서는 아시아 국가들과 치열하게 경쟁해가며 많은 입찰을 따냈다.
이는 프랑스 회사들이 위험요소들을 비롯해 현지 시장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마저 더 이상 자신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인식한 프랑스 회사들은 다른 시장, 특히 남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콩고민주공화국(킨샤사)을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많은 프랑스인들은 그 배후에 미국의 손이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카빌라를 무장시켰다고, 그리고 보다 넓게는 미국이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을 영어권에 편입시키려는 총대를 메고 나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둘러싼 프랑스와 미국의 원조 경쟁은 결국 아프리카에 이익이 될 것이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책 담당자인 샤를 조슬랭 대외협력장관은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몰아내지 못할 것이다. 미국이 들어와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영향력의 약화는 사실 환영할 일이 아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일본 다음으로 많은 공식 개발원조를 제공하고 있고, 유럽의 아프리카 지원 프로그램에서 여느 나라들보다 월등히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 있으며, 세계기구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줄기차게 대변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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