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항해의 결과는 세 왕의 전쟁으로 알려진 '알카자르 엘 케비르(Alcazar el Kebir)' 전쟁에서 결정되었다. -세 왕의 전쟁이란 이름은 포르투갈 왕과 그의 허수아비 술탄이 그 전쟁에서 죽었고, 본국에 있던 이슬람 군주도 죽을병에 걸렸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것은 포르투갈에게는 재앙이었다: 포르투갈의 26,000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 한번의 일격으로 모로코는 터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신을 얻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포르투갈은 너무 큰 타격을 입어 한 세대 동안 스페인에게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왕위에 오른 모로코 왕자는 '승리자' 라는 뜻의 알만서(Almansur)라는 호칭을 얻었다. 실제로 그 명칭은 그의 공적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1590년에 그의 내각의 만장 일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하이(Songhay) 왕조에 대단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아직 정렬이 되지 않아서 작은 규모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1590년 10월에 마라카쉬(Marrakech)에서 출병했을 때 병사는 5,000명도 채 안됐고, 넉 달 후에 니제르에 도착했을 때 군력은 반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송하이(Songhay)의 불건 세금 징수 제도는 모로코의 소총 부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 왕조는 알만서(Almansur)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며, 모로코의 국고는 수단의 막대한 금은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동아프리카 역시 이 시기에 분주했다. 한 움직임은 나일-사하라의 유목민인 루오(Luo)가 빅토리아 호수의 북부 해변을 향해 백 나일강으로 이동한 것이다. 또 하나, 보다 극적인 것 마라비(Maravi)족 중 하나인 식민 전사족인 짐바(Zimba)족의 진출이다. 짐바(Zimba)는 말린디가 있는 더 먼 북쪽의 해안 도시들까지 아울렀다: 그들이 1589년 모바사(Mombasa)를 공격한 것은, 포르투갈이 무슬림 저항의 중심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아프리카의 혼(Horn)에서는 갈라(Galla)에 의한 보다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거주지였던 혼의 사막지인 Ogaden에서 서부로 흩어졌고, 아비시니아와 아달 왕조를 침략하였다. 갈라족의 이동의 원인은 소말리(Somali)로부터의 압력에서 찾을 수 있지만 두 민족은 정말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해안 부족 국가인 소말리(Somali 이 시기에는 거의가 무슬림이었던)와 그 위에 위치하는 갈라는 여전히 이교도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촌국이었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갈라를 차지하기 위해 이동하려 했었다면, 그들은 유목민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목초지를 다 소모했기 때문에 이동하려 했을 것이다. 차드 호수와 백 나일강 사이에 Darfur의 술탄의 통치가 나타난다: 이 이슬람 군주는 아랍계였고 무슬림이었다. 차드 호수 지역에서 현재 최고 실력자는 Borne의 이슬람 군주인 이드리스 알로마 (Idris Aloma)였다: 그는 Almansur 가 했던 것처럼 트리폴리에 있는 보병 군단을 모집하여 카넴(Kanem)을 정복하는데 그들을 이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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