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

1600년대 인구와 무역로(population and trade routes in AD 1600)

africa club 2002. 1. 6. 18:42
1600년대 인구와 무역로

(population and trade routes in AD 1600)


1600년에 아프리카 인구는 5천5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중 천백만 명, 즉 5분의 1 정도가 사하라 북부에 살았다 - 이 중 반은 마그립(Maghreb) 지역에, 나머지 반은 이집트에 살았다. 남은 4/5의 인구는 사하라 이남에 살았다. 제 2의 중심지임에도 불구하고 서부 아프리카에서 주요 인구 통계의 초점은 현대의 우간다(Uganda), 르완다(Rwanda), 브룬디(Burundi) 지역에 맞춰져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대부분은 외부와 어느 정도 접촉을 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 아랍에 의해 형성된 거래 관계는 사헬, 북부 수단 그리고 동부 해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확립된 해상로는 직접적으로 대서양 지역의 공동체들과 현대의 모잠비크(Mozambique), Rodesia까지 연결되었다. 사헬과 수단에 공급된 물품들은 소금, 말, 섬유, 유리 제품과 금속 물품이었다: 해안가 도시들에서는 주로 종이, 여러 종류의 제조품들, 나중에는 기호에 따른 술과 담배가 거래되었다.
이러한 물건에 대해 값을 지불하여야 할 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모든 이가 원하는  금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매매를 위한 잉여 노예도 있었다: 아랍은 전통적으로 노예의 큰 구매자였고, 부분적으로 여성 노예도 구매하였다. 금과 노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수출의 약 9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이밖에 또 다른 수출품목은 상아였다.
16세기까지 유럽인들이 해왔던 노예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포르투갈이 흑인 노예를 시장에 내놨을 때 그들은 노예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초기에 사왔던 노예들은 아프리카(주로 모로코)로 다시 팔렸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은 노예의 이용가치를 스스로 깨달았다. 그들의 탐험 과정 속에서 그들이 발견했던 대서양 섬들 -마데이라(Madeira), Cape Verde Isles, 사오 토메(Sao Tome), 그리고 Principe-이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노동이 요구되는 이러한 재배를 그들 스스로 하기 꺼려했다. 흑인 노예는 그 문제에 해결책으로 제공되었다. 결과적으로, 16세기 전반부에 노예에 대한 활발한 거래가 서부 해안 아프리카와 인근 섬들 사이에 증가했고, 이와 같은 거래는 곧 신세계의 정착민들과 농장들에 확장되었다. 이 세기 후반부까지, 신세계는 그러한 상황에 기여해야만 하였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보내진 노예의 수는 15세기초에는 1년에 연간 1∼2천명이었으나(거의 아랍으로 보내어졌다) 1년에 5천명 정도로 증가하였다(대다수가 결국에는 아메리카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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