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에서 흑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정책의 시행과 함께 이루어진 영국화 정책은 보어인들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북쪽으로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영국 통치자들의 정책은 흑인들 혹은 “햄의 후손들”의 노예화를 합법화 시켰던 캘빈교도의 기독교적 가치관과 갈등상태에 놓이게 했다. 1809년의 호텐토트 법(Hottentot Code)은 코이산족과 다른 흑인들에게 고용과 거주의 증거로써 통행증을 가지고 다니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종말은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강화됨으로서 50번 조례(Ordinance Fifty)의 신설과 호텐토트 법의 폐지로 나타났다.
북쪽으로 이루어진 대이주(Great Trek)는 보어인 공동체가 현재 아프리칸스(Afrikaans)로 알려진 네덜란드어의 방언을 사용하기 시작한 1836년 무렵에 시작됐다. 대이주는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내륙지방에서 그들의 경쟁자들인 영국과 원주민 아프리카인들로부터 벗어나 빈 땅을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오랜지 강을 건너 바소토를 피해 타바 은추(Taba 'Nchu) 근처에 집결했다. 일부는 펠트(Veld)를 가로질러 나아갔고 은데벨레(Ndebele)족의 왕인 음질리카지(Mzilkazi)에 의해 공격받았다. 1836년 베그콥(Vegkop) 전쟁 이후 피터 레티프(Piet Retief)가 이끄는 사람들은 나탈로 이동했다.
림포포 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음질리카지와 경쟁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1837년 보어인들은 은데벨레를 다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레티프는 나탈에서 줄루족의 왕인 딩가네(Dingane)와 협상을 벌여 땅을 받기로 하였으나 딩가네의 약속위반과 공격으로 죽음을 당했다. 1838년 음군군들로브(Mgungundluvu) 근처의 피의 강(Blood River) 전투에서 보어군은 딩가네를 패배시켰다. 평화조약의 조건은 나탈과 줄루랜드의 투겔라강을 가로지르는 길고 좁은 땅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다. 또 다른 이주자들은 나중에 벤다(Venda)족에 의해 쫒겨나지만 북쪽으로 이주하여 라이덴베르그(Lydenberg), 오링스타트(Ohrigstad), 그리고 사우판스베르그(Soutpansberg)에 정착했다. 그러한 저항에 대해 보어인들은 투겔라(Tugela)의 남쪽지방에 정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나탈리아(Natalia)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 그리고 트란스발(Transvaal) 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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