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재미있는 Africa 이야기 II

아프리카인들에게 도덕은 있는가?

africa club 2012. 7. 17. 20:53

 

아프리카인들에게 도덕은 있는가?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신이 그를 처벌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은 인류의 도덕적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률을 귀하게 유지하고 떠받든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행한 잘못을 내세에서 징벌 받는다고 하는 신앙은 거의 없다. 처벌이 내린다면 그 처벌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운은 그 불운을 당한 사람이 신이나 영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의 장로나 다른 구성원에게 어떤 도덕적인 혹은 제의 적인 행위 규정을 범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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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바냐르완다(Banyarwanda)족과 바룬디(Barundi)족은 신이 징벌하는 행위를 “신은 침묵 속에서 복수를 행한다.”라고 하는 잠언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또한 누에르(Nuer)족은 질병을 환자가 그 질병을 앓기 전에 범한 과오와 연결시키고 신의 처벌이 그 환자에게 내리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친다. 결국 이들은 질병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행위에 강조를 두고, 그러한 행위를 하면 어떠한 질병이 예상될 수 있다고 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질병 자체에 강조를 두어 그 질병을 야기케 한 과오를 과거의 행위 속에서 되찾는 행위이다.

 

각개 공동체의 사회는 도덕적인 혹은 법률적인 범법 행위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배상과 처벌 형식을 가지고 있다. 사술이나 마법을 행사하다든가, 살인이나 간음을 범했다든가 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연하게 동료를 다치게 했다든지, 이웃 사람의 밭에 자기네 양이 들어가 감자넝쿨을 먹어 버렸다든지 하면 소나 양이나 혹은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하는데 이르기까지 보상과 처벌의 정도는 극히 다양하다. 관습이나 제의의 규범을 손상하거나 깨뜨리는 여러 형태의 위반을 통하여 야기되는 논쟁이나 위약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연장자들이 취급한다. 물론 전통적인 추장이나 통치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그 지방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그 법을 집행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부의 재판소가 있어 이를 맡고 있다. 그 중에 어떤 재판소들은 장로들의 협조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관습법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재판을 할 때 저주를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유죄라고 하는 것이 판명되면 그를 저주함으로써 그 저주의 말에 의하여 악이 그에게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 신념이다. 주로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며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효과적으로 낮은 위계의 사람들을 저주할 수 있지, 그 역은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가장 두려워하는 저주는 부모나 아저씨, 아주머니 혹은 가까운 친척들이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또 가장 고약한 저주는 임종시에 하는 저주이다. 일단 그 저주자가 죽으면 이를 취소할 방도가 실제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범한 사람이 참회를 하고 저주를 거두어주기를 원하면, 그 저주를 한 사람은 그 저주를 스스로 취소할 수도 있고, 또 그 저주가 심각한 것이었으면 제의를 통하여 취소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부어진 저주가 이루어졌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만약 그 저주를 받은 사람이 죄가 없으면 저주는 기능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사회는 공식적인 저주를 매우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마치 마법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특별히 가족 내에서 좋지 않은 관계를 저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품성은 생명의 줄을 사람의 손에서 끓어지지 않게 한다.”라든가,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은 좋은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훌륭한 품성이란 결혼 전의 순결, 결혼 기간 동안의 진실성, 정중한 예절, 이기심과 반대되는 너그러움, 친절, 정의로움, 진실, 본질적인 덕으로서의 방정함, 도둑질하지 않는 일, 약속을 지키고 어리석음을 피하는 일,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특별히 여자를 보호하는 일, 노인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일, 위선적이지 않는 것 등이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이 자기 동류인 인간에게 행한 것과 연결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훌륭한 품성의 덕을 계발하고 드러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들이다.

 

결국 도덕적인 “선”이나 “악”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개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계의 본성이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은밀한 죄”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간이거나간에 그가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에 의하여 그것, 혹은 그는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반드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항목은 너무 많고 세밀한 것이어서, 인간은 결국 일생 동안 한없는 도덕적인 요청과 끝없이 부닥친다. 특히 개인이 스스로를,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자의식을 가지는 환경 속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더 심각하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친족 관계가 개인을 완전히 “노출”시켜버리는 아프리카적인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여러 도덕적인 요청들이 누구 나에 의해서 거의 불편할 정도로 자세히 살펴지기 때문에, 이를 준행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주목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도덕성의 본질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다. 그것은 “존재”의 도덕이라기보다는 “행위”의 도덕이다. 이는 “정태적인 윤리”라기보다는 “역동적인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윤리는 그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그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을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바로 그러그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행하는 바 때문에 그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가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행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친절은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한 도덕적인 덕목일 수가 없다. 살인도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까지는 악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하기 전에는 “선도 ”나쁜 것“(악)도 아니다. 이 점이 아프리카의 도덕과 윤리 개념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마법, 주술, 사술 등에 대한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적으로나 고의적으로나 간에 어떤 규정을 어기면, 그 범죄로 인하여 범법자는 물론 그 범죄에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운이 닥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악이란 행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 행위를 징벌하는 사실 안에 있다.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도 신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정황에 몰아넣고 만다. 이처럼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행위도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악한 까닭은 그것이 징벌을 받기 때문이다. 악하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위의 내용은 다음 두 가지 사건으로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프리카 케냐에 가보면 시내 중심가의 크고 작은 상점들의 주인들이 인도인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인도인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케냐의 몸바사에서 우간다의 캄팔라를 잇는 철도공사의 계약노동자로 들어왔다가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몇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로 상업적인 분야에서 성공하였다. 이들은 정권과 유착하여 정치자금을 대는 등 소수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외줄타기를 해왔으며 현지인들에게는 대부분 아주 가혹하고 착취를 일삼는 사람들로 비추어지고 있다. 케냐의 정치상황이 불안한지 안정적인지는 인도인들의 동향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인도인 상점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은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고 기회만 있으면 물건을 빼내든지 돈을 훔치든지 하여 착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인도인주인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같이 일하는 현지인들은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현지인중 누군가 도둑질하는 것을 들키거나 적발되면 그 점원은 길거리에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비난과 함께 두들겨 맞고 심지어 사망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경찰에게 신고를 하고 말려주기를 청하면 관습법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현지인들에게 스와힐리어로 “너희들은 주인 몰래 도둑질을 하고 있고 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발각이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매질을 하여 죽게 놓아두느냐?”라고 물으면 정색을 하고 그것을 나쁜 짓이라고 한다. 즉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유학할 때 1주일에 한번 집에 메이드가 집을 청소하러 왔다. 하루 일당은 약 20-25 랜드(우리 돈으로 4,000원정도)이며 오전 7시 30분에 와서 오후 4시정도면 일을 마친다.

 

그런데 이 메이드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일을 하여 우리 집 살림을 필자보다 더 잘 안다. 그런데 한 일년이나 지났을까 부엌에 있던 나의 유일한 사치품인 커피 잔 세트와 티스푼이 몇 개 비어있었다. 어디 갔느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없어진 물건들은 그녀의 집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하는 동안 한두 개를 제외하고 모두 없어졌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잠시 빌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밝혀지면 배시시 웃으면서 갖다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우리의 힘으로 생산을 하는 것이 있을까? 아마 완벽하게 우리가 생산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초재, 중간재 그리고 최종재를 생산한다고 정의할 수 있지만 보다 분명히 말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이용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인들이 말하는 잠시 빌려다 쓴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맞는 것이 아닐까? 내 것이기 보다는 우리 것이고 우리 중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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