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 역사의 10대 위인

africa club 2001. 11. 20. 14:45
쿠푸 - 이집트의 파라오(재위 BC 2589?~ BC 2566)
세계 최대의 불가사의인 대(大) 피라미드(the Great Pyramid)를 BC 2560년에 건축한 것을 알려진 이집트의 왕이다. 그 피라미드는 자신의 무덤으로 기제에 밑변 230 m, 높이 146.5 m 정도로 그 규모면에서 세게 최대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만 명의 노동자가 3개월간 교대로 일을 하는 작업의 반복을 20년간 걸려서 함으로써 피라미드를 건조하였다고 했고, F. 페트리는 2.5 톤의 거대한 돌이 이 피라미드에 총 230만 개 정도가 쌓여있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 속에 있던 고대 이집트의 유뮬둘운 현재 모두 독ㄹ 당했고, 1954년 피라미드 근처에서 '태양의 배'가 2척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일화에 댛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시바 - 에티오피아의 여왕
BC 1000년에 솔로몬 왕을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의 부유한 왕국의 여왕. 아라비아ㅘ 남서부 예멘과 말라위에 살고 있던 시바족의 여왕으로, 그녀는 금옥과 향로등 예술살렘의 특산물을 선물로 준비하여 솔로몬을 방문하였다고 하고, 이 방문은 통상상의 교섭의 성격을 띠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슬람 성전인 '코란'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빌키스(Bilzus)라고 기록하고 있고, 소로몬의 지혜와 영화를 확인한 후 많은 선물을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솔로모의 아들 메넬리크(Menelik)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성장한 후에 유대인을 이끌고 에티오피아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클레오파트라 7세 - 이집트의 여왕
BC 47년경 줄리어스 시저와 마크 안토니와의 관계로 유명한 이집트의 여왕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태어나서, BC 51년 이후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으나, BC 48년경 이집트에 온 G. J. 카이사르를 이용하여 복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사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를 하였고, 카이사르와 사이에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얻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를 따라서 잠시 로마에 간적도 있었지만, 그가 암살된 후에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그녀는 뛰어난 자태와 용모, 그리고 수 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등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왕국을 굳건히 지킨 여왕이었다. 그리고,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등 등의 문학 작품에서 등장하는 등 현대에도 매우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모노모타파 - 베나메타파의 왕
중세 아프리카 제국 최고의 왕이자 AD 1200년 대(大) 짐바브웨의 통치자

만사 칸칸 무사 - 말리의 황제
수단 군주 중 가장 유명한 인물.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을 "약 1년"이라고 선언하였다. 말리는 당대 세계 최대의 국가 중 하나였다.

하일레 셀라시 - 에티오피아의 황제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 민주국을 영도했던 황제(1930-1974).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초대 회장이다. 그의 본명은 라스타파리 마콘넨으로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마콘넨가의 자손이다. 24세 때, 당시의 왕이 이슬람교도로 개종하자 반대파 그리스도교도드을 규합하여 정권을 잡았다.그리고, 후에 메넬리크 2세의 딸 자우디츠 여왕이 죽은 뒤에 황제에 올랐다.

알버트 루툴리 - 아프리카민족회의 총재
1960년에 아프리카 대륙출신으로는 최초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한 인물. 그는 남아공의 더반 근교에서 태어났다 1952년부터 60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을 지낸 그는. 젊은 시절에는 교사를 했었다. 하지만, 남아공의 현실과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해서 심각한 인식을 한 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참여하는 등의 활발한 운동을 통해서 아프리카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는데, 생애를 바쳤다. 1961년 12월에는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잠시 부인과 함께 그루트빌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비폭력 노선을 지켜온 남아프리카 민중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유는 너무도 멀리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1주일 후 '민족의 창(槍)'이라는 사보타지 집단이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산업시설 파괴에 돌입했고 드디어 비폭력주의는 포기되기에 이르렀다. 루툴리는 노벨상 수상 이후 다시 연금상태로 돌아왔고 존경받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자서전을 구술하고 경찰당국이 허가하는 방문객만을 맞으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 1967년 7월 21일 습관대로 농장 근처 철교를 지나다가 기차에 치어 사망했다.


크리스챤 바나드 박사 - 최초의 심장 이식수술
1967년에 최초의 인간 심장 이식수술을 집도한 외과 의사이다.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에 소재한 흐루트 슈르 병원에서 실시된 이 수술은 의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었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 국제연합 사무총장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1992년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이집트 태생으로 이집트의 부총리를 지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사상 두번째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이집트 출신의 거물 외교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자신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간 '악연'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며 미국 외교정책의 문제점을 신랄히 비판한 회고록을 펴내기도 하였다. 제3세계 국가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92년 1월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던 갈리는 냉전종식후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에 등극한 미국에 밉보여 5년 임기 내내 갈등을 빚다가 결국 미국의 거부로 연임에 실패, 97년 1월 앙앙불락하며 물러난 인물. 당연히 미국에 대해 이빨을 가는 철저한 반미주의자이다.

넬슨 만델라 - 남아공 대통령
아프리카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하고 존경 받는 인물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태어났고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트헤어 대학교에 들어갔고,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험난한 인생 여정을 겪어왔다. 때문에 그는 1990년 2월에 석방 되기 까지 27년간 감옥에서 보내기도 하는 등의 어려운 행로를 통해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 등등 자선전과 '자유에의 먼 도정(Long walk to freedom)'등 의 저서를 냈고, 남아공 최초의 민주선거(1994)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자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우리나라에는 1995년 7월에 방문하여 우의를 다지는 한편 경제협력을 약속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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