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6 10

유럽은 왜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였는가?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핵심적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럽 각국은 민족주의적 경쟁과 힘의 균형, 그리고 국가주의적 시각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경쟁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시각에 따라 새로운 시장과 자원의 공급지로서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욕구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선교사들이나 해안가에 거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소규모 무역상들에게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은 1870년대에 들어와 점점 치열해졌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그리고 독일에서는 개인과..

1884년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가 왜 아프리카 역사에서 중요한가?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독일 재무장관 비스마르크(Bismarck)에 의해 개최된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는 이렇게 고조되고 있는 아프리카 쟁탈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 사이에 전쟁을 피하고 각국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을 위한 회의의 주제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무역’이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아프리카가 국제법상 그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자유롭게 점령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 쟁탈을 합법화했고, 유럽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자고 공식적으로 비준하였기 때문에 아프리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조약에서는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주권을 주..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게 끼친 노예무역의 부정적인 영향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사회가 후진성을 띠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약점과 의존성은 식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에 크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환경이나 기술, 사회 조직, 종교적 신념, 개인적 시도와 같은 식민지 이전 시대의 아프리카 사회를 형성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노예무역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인위적인 인구손실로 아프리카가 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예무역의 성장은 아프리카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하였다. 17세기-19세기에 이루어진 노예무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붕괴시켰다. 신세계로 이송된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데에는 기록이 부정..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과 침략과 약탈

유럽인들에게 암흑의 대륙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리적 발견과 탐험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부터 이루어진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탐험은 경제적 목적과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지리적 관심으로 시작되어 노예무역 폐지 등으로 이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침략과 약탈의 역사였다. 유럽인의 아프리카 내륙탐험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니제르 강에 대한 탐험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니제르강의 탐험은 팀북투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팀북투는 황금의 도시로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이슬람문명이 번영하고 있었다. 1828년에는 프랑스인 르네 까이예(René-Auguste Caillié)가 팀북투를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팀북투에 도달했으며 195..

왜 서구인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거래했을까?

아프리카가 인도로 가는 무역로의 중간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곳으로 생각했으나 16세기 말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에 설탕 플랜테이션이 시작되자 극적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설탕, 담배, 커피, 면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동력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질병에 노출되자 사망률이 높아졌고, 식민지 노동력으로 편입되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저항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노동자들 역시 열대병 때문에 높은 사망률을 보였고,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우기에 유럽 노동자들의 숫자는 태부족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열대병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을 통해 유럽인들과 접촉을 해왔기 때문에 유럽의 질병에도 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과 항로의 개척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호작용의 역사는 1400년대 초반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헨리(Henry)의 후원을 받은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헨리 왕자는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아랍 지역을 우회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주요 문명 지역들과 황금을 직접 교역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계획은 기술이 발달하여 포르투갈인들이 기니 남쪽을 탐험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1460년, 무역선이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에 당도하였고, 곧 이어 1471년에는 황금해안(Gold Coast), 1483년에는 콩고, 1488년에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다.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과 동부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힐리 해안도시에 도착했고, 그 이후 인도에 도착..

인도양 무역로와 스와힐리 문명

인도양에 접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은 계절풍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 인도, 그리고 멀리 중국과 왕래했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내륙지방과의 무역은 일찍 시작되었고 인도양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채굴된 금, 구리, 철 등의 주요 목적지였다. 특히 14-15세기에 스와힐리 해안과 짐바브웨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스와힐리 무역망은 해안가와 내륙지방을 따라 확대되어 갔으며 내륙지방과의 장거리 무역은 18-19세기에 급격히 확대되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일부 학자들은 스와힐리 문명이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정체성을 분명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스와힐리 문명을 인도양의 대양문명(大洋文明)으로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와힐리어 문명은 인도양 무역로를 중심으로..

사하라 종·횡단 무역로와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교류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는 오래전부터 서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아랍인 상인들이 중․서부 수단의 서아프리카 시장들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북아프리카에 아랍인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유대인, 시리아인, 페르시아인들이 무역을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에 더욱 확대되었다. 초기의 상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주로 무역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서아프리카의 상업 중심지를 방문하고 정착했다. 서부 수단의 지역의 통치자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였고 무슬림 학자들을 고문, 대사, 행정전문가로 고용했다. 또한 서부 수단 지역의 통지차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국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전통종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통치자..

아프리카의 반투(Bantu)인, 반투문화(Bantu Culture)

20세기 초, 학자들은 현재 카메룬에서 케냐까지 광활하고 넓은 동부 지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쪽까지 걸쳐 살고 있던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아공의 블레이크(W. H. I. Bleek)는 1862년 동남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들을 반투(Bantu)인, 반투 문화(Bantu culture)로 정의하였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언어에는 모두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은투(-ntu)’라는 어근, 또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언어에서 ‘바(ba)’라는 접두어는 복수를 지칭했으므로 ‘반투’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뜻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농사법, 그리고 가축재배..

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 인류의 기원지!

지금까지 학자들은 현대 인류가 세계 여러 지역에 살았던 고대 인류로부터 각각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다지역(多地域)기원설’과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세계로 퍼졌다는 ‘단일지역(單一地域)기원설’로 나뉘어져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는 인류의 화석은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출현했다는 단일지역 기원설을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또 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진화경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 ‘남쪽의 민꼬리 원숭이’라는 뜻)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믿어지는 화석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여러 화석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화석은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다른 대륙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오스트랄로피테쿠..